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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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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8일 05시 39분 등록

 

친구와 점심을 먹기 위해 휴가를 받았다면 조금 웃길까? 오랜만에 얼굴 보자는 약속이 석 달째 미뤄지고 있었다. 매번 퇴근하기 직전에 회의가 생겨서, 집에 일이 생겨서, 다른 급한 일이 생겨서 친구와 나는 번갈아 가면서 약속을 취소했다. 그때마다 서로 괜찮아. 다음에 보면 되지 뭐. 라고 얘기 하면서 다음 약속을 잡았다. 이런 상황이 네 번째 반복되자 나는 몹시 불편했다. 우리의 약속이 이토록 하찮았던가. 매번 사소한 일들에 밀릴 만큼 우리의 관계가 아무것도 아니었는가. 왜 퇴근 후 일곱 시에 친구를 만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됐을까. 그래. 좋다. 그렇다면 내가 휴가를 받고 너를 만나러 가마.

 

곱게 차려 입고 친구 회사를 향해 출발한다. 아침잠 한 시간을 더 자서 그런지 몸이 가뿐하다. 계단을 내려가는 리듬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아침 햇살이 내 발걸음에 발랄함을 더해준다. 집 앞 가게 유리창에 내 모습을 비춰본다. 긴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가 다시 빼 내서 자연스럽게 흐트러뜨린다. 이게 더 예쁘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편안함과 약간의 들뜸이 공존한다. 일 년 만에 만나는 친구라면 더욱 그렇다.

 

순대국 같은 거 먹니? . 좋아해. . 그럼 순대국 먹으러 가자. 잘 하는데 알아. 같이 한 시간이 10년이 넘는데, 서로가 순대국을 먹는지 안 먹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우리는 주로 퇴근 후에 만났고, 저녁시간에 만나면 든든한 안주에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우리의 고정메뉴였다. 밥보다는 술이 우리를 더욱 가깝게 해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와 쌀밥을 나눠 먹은 적이 한번도 없구나.

 

나란히 순대국 집으로 들어간다. 오랜만에 만났다고 괜히 멋스러운데 데려가는 게 아니라 자기가 먹던 그대로의 상차림을 내오는 친구의 소탈함이 좋다. 순대국밥을 한 그릇씩 시켜 놓고 살아가는 얘기를 풀어 놓는다.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 여행 계획을 세운다는 이야기, 영어 공부를 시작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친구는 딸이 영어를 잘 한다는 이야기, 남편이 말을 듣지 않아 속상하다는 이야기, 시어머니가 자기를 예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서른 세 살의 우리는 한 명은 결혼을 했고, 한 명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서로 전혀 다른 고민을 안고 있지만 왠지 말이 잘 통한다.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구나. 꼭 힘내라는 말을 보태지 않아도 위로가 된다. 친구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것만 아니면 낮술 한잔을 하고 싶다.

 

카페로 자리를 옮긴다. 우리의 입은 더욱 바빠진다. 점심시간 만남이기에 마냥 늘어진 수다일 수는 없다. 짧은 시간 몰입해서 터져 나오는 속이야기에 마음이 후련하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벌써 다 됐다. 친구는 사무실에 돌아가고 나는 카페에 계속 앉아 있다. 물방울이 가득 맺힌 플라스틱 컵에서 커피를 힘껏 빨아 마신다. 이제야 한숨을 돌린다. 아이스커피에 있는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앉아 있어야겠다.

 

친구와 한 시간 반 동안 마주 앉아 이야기 하기 위해 두 시간을 달려온 이 시간. 이 자리. 이 길. 나는 이제 집까지 돌아가는데 또 두 시간이 걸린다. 자기를 만나기 위해 먼 곳까지 달려와준 나에게 친구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했다. 뭐가 미안한지 모르겠다. 미안해할 필요가 없는데 친구는 자꾸 그렇게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약속이 자꾸 미뤄지는 게 괜히 서러워서 욱하는 마음에 휴가를 내고 친구를 만나러 와야겠다 결심했다. 근데 점심시간에 친구 회사 앞에 찾아 오는 거, 해 보니까 예상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다. 친구를 먼저 보내고 이렇게 가만히 되짚어 보니 저녁에 흔들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나는 소란스러움과는 분명 다른 재미가 있다. 정해진 시간만큼만 허락된 시간이 애매하지도 않고 말이다.

 

무엇보다 친구의 일상 속으로 잠시 들어갔다 온 느낌이 제일 좋다. .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정리 안 된 친구 방을 그대로 본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한번도 본 적 없지만 가장 그 친구다운 모습, 그 친구의 가장 가깝고도 매일같이 반복하는 일상인데 한번도 관심 가져보지 않았던 어떤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친구는 매일 같이 꾸려가는 일상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개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한번도 본 적 없는 그 친구의 점심 시간을 같이 걸었다. 이제는 점심 시간이 되면 친구가 여기쯤을 걷고 있겠구나. 어떤 자세로 동료들과 마주 앉아서 밥을 먹겠구나. 상상할 수도 있다. 술자리의 어둠과 광란이 아니라 일상의 차분함과 진지함 속의 친구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게 됐다. 친구도 나처럼 점심 때는 순대국을 먹는다는 사실에 피식 웃음이 난다. 다들 똑같이 살고 있구나 라는 뻔한 결론이었지만 둘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친구 회사로 찾아가 점심을 먹는 약속은 비교적 쉽게 잡힌다. 직장인에게는 구속일 것 같은 점심시간이 오히려 퇴근 후보다 더 자유롭다. 저녁 시간에는 지난 석 달 동안 우리의 약속이 미뤄질 수 밖에 없던 것처럼 수많은 변수가 있지만, 점심 시간 약속은 착각해서 점심 약속을 두 개 잡지 않는 이상 미뤄질 일이 거의 없다. 친구는 어차피 평소 먹던 대로 점심시간에 나와서 점심을 먹으면 되고, 나는 친구의 회사 근처로 시간 맞춰 가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 된다. 저녁에 따로 시간 내어 만나기 어려운 우리지만 점심시간은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다. 내가 마음을 내고 시간만 내어 점심시간에 찾아 간다면 언제든지 친구는 기꺼이 두 팔 벌려 기다린다.

 

저녁 술자리는 왠지 축제가 끝난 자리의 뒷풀이 같은 느낌이다. 친구를 온전히 본다기 보다는 감정에 휩쓸려 다니기 바쁘다. 싫은 사람들을 광분하면서 십 원짜리 욕으로 죽이고, 알코올의 기운을 빌어 좀 더 과장되게 상황을 해석한다. 하지만 점심의 만남은 그런 느낌이 모두 거두어지고 있는 그대로 보인다. 친구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일상 속의 번잡함과 소소함이 내 눈 앞에 고스란히 펼쳐진다. 말이 필요하지 않고 그저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를 느끼게 된다. 저녁에 만나 목소리 높여 눈물 흘리며 나눴으면 궁상이 됐을 일도 화창한 햇볕 아래서 나누고 보니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서로의 고민에 진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감정을 덜어내고 담백한 현실을 볼 수 있게 된다. 딱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이렇게 살고 있다는 서로의 토닥거림이 더 따뜻하게 전달된다.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시간을 나란히 걸어보는 경험은 중요하다. 그 친구가 생활하는 공간과 시간 속으로 잠깐 들어가서 걸어가 보면 매일 같은 일들이 펼쳐질 것만 같은 관계에도 신선함이 공급된다. 이것은 친구와 여행을 떠나고 저녁에 만나 박수 치면서 농담을 나누는 일과는 분명 다르다.

 

하루 휴가가 중요할까 친구가 중요할까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친구지!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 친구와 잠시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휴식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모두 잘 안다. 그런데 내가 친구 만나러 간다고 휴가를 받았다고 하니 미쳤다고 하거나 의아해 하는 사람 또한 많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친구를 만나는 일은 너무도 쉽게 여러 가지 일들에 밀리기 일쑤다. 이제는 친구와의 약속이 세 번 네 번 미뤄지는데도 아무렇지 않다. 그렇게 친구와의 약속을 꼬박꼬박 지키며 앉아 있기에는 내 인생에 사건 사고가 너무 많다는 핑계가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친구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는 대단한 착각에 빠져있다.

 

친구와 점심 밥 한끼를 먹으러 가는 약속이 우리 인생에서 소홀해 질 수는 없다.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을 때,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 흐를 때,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 같지 않을 때, 외롭다는 생각이 하루 세 번 이상 드는 날이면, 하루 휴가를 내고 친구의 회사 앞으로 가자. 무엇보다 친구와의 약속이 한 달 이상 미뤄지고 있다면 친구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이야기 해 보자. 일년에 한번쯤은 친구를 만나는 일을 우선순위 0번으로 두는 날을 만들자.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친구의 일상을 나란히 걷는 느낌을 맛보자.

 

친구와 따뜻한 밥 한끼 먹어 본 것이 언제던가. 우리의 하루가 팍팍한 것은 일년을 살면서도 가장 가까운 친구의 얼굴을 밝은 햇살 아래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항상 어두운 불빛 아래서만 볼 수 있었던 친구의 얼굴. 알코올의 기운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음 속의 솔직함을 꺼내 놓을 수 없었던 시간들. 다 털어놓고 나서도 어딘가 개운한 맛이 없는 우리의 이야기들. 친구와 화창한 햇살 아래서 나누는 점심 한끼로 이 모든 돌덩이들을 말끔히 거둬내자.

 

친구와의 점심 한끼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친구와의 약속을 내 하루 휴가보다도 더 철저히 챙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친구와의 점심 식사,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나의 휴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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