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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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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일 01시 12분 등록

생당작인걸(生當作人傑) 살아서는 마땅히 세상의 호걸이 되고,

사역위귀웅(死亦爲鬼雄) 죽어서는 또 귀신의 영웅이 되어야지.

지금사항우(至今思項羽) 지금 항우를 생각하는 것은,

불긍과강동(不肯過江東) 강동을 건너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네.*

 

시인은 묻는다. 한때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불리던 항우項羽가 다시 장강을 건너 강동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를 묻는다. 항우는 지금 애첩인 우희虞姬를 곁에 두고 있다. 바로 곁에 사랑하는 우희를 두고서도 기쁘지 않은 그의 사연이 기가 막히다. 곱게 차려입은 우희가 그의 품을 벗어나며 일어섰다. 공손히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검무를 추겠다고 청한다. 짐짓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아 만류하고 싶었지만, 이미 칼을 꺼내든 우희의 표정이 결연하였다.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눈빛에 더는 슬픔도 고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항우의 가슴을 더 후벼 파들었다. 그렇게 우희는 잠시 동안 춤을 추었고, 스러지듯 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더는 바랄 것도 없어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 우희가 항우의 품에서 온기를 잃어갔다.

 

때는 기원전 221년으로 거슬러 간다. 진나라의 시황제인 영정嬴政은 중원의 흩어진 국가들을 통일하고, 마침내 진秦이라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스스로를 삼황오제의 이름을 빌어 황제라 칭하고 절대군주의 자리에 오른 그는 강력한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제국의 힘은 이제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렀고, 서로는 농서, 남으로는 영남, 북으로는 하투, 음산, 요동까지 뻗어갔다. 그렇지만 아직 제국은 불안했다. 북으로는 흉노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민심은 여전히 흉흉했다. 제국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에 태양이 둘 일 수 없듯 땅 위에 왕은 하나뿐이었다. 전쟁은 반드시 승패가 갈리는 법이었고, 패자들에게는 고통이 뒤따랐다. 춘추전국시대 수많은 난세의 영웅호걸들이 칼바람 앞에 쓰러졌다. 중원에는 아직 그들의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했고, 강물에는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시황제의 욕망은 스스로도 그 끝을 알지 못했다. 패전국들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장성을 쌓았고 농사대신 아방궁과 황릉을 지었다. 성벽은 그들의 주검 위에 세워졌으며, 제국의 기초는 그 위에 피로 다져졌다. 책들이 불태워졌고, 유생들은 생매장됐으며 화폐와 도량형의 단위가 하나로 되었다. 세금이 다시 매겨졌고, 강력한 법이 집행되었다. 전장에서 적장의 목을 베던 칼들은 이제 힘없는 백성들의 가녀린 목을 겨누고 있었다. 원성이 하늘에 닿을법했지만, 백성들은 차마 입 밖으로 내어 담지 못했고, 분노는 가슴 속에서만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순행 길에 허망하게 죽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목숨도 더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불로초를 찾아 멀리 동쪽 땅 어디로 떠나보낸 선남선녀들은 여전히 아무소식이 없었다. 순행 길에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졌다. 재상이었던 이사李斯와 환관 조고趙高가 음모를 꾸며, 변방으로 쫓겨난 큰 아들 부소扶蘇는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뜻대로 둘째 아들인 호해胡亥가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폭정은 그칠 줄 몰랐다. 호해가 제위에 오르던 그해 7월 큰 비가 내렸다. 때마침 진나라의 병사로 징집되어 어양으로 향하던 농민들 9백여 명이 도중에 발이 묶였다. 그들은 기일 안에 도착하지 못했고, 당시 엄했던 진나라의 법대로 하면 참수형에 처해질 운명에 놓였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도 그들 무리 중에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막다른 길 앞에 놓인 이들에게 진승과 오광은 하늘의 뜻을 알렸다. 무리들의 식사거리로 시장에서 사온 물고기의 뱃속에서 비단에 적힌 ‘진승왕’이라는 글귀가 나왔다. 해가 진후에는 야영지 가까운 숲 쪽에서 “초나라가 다시 일어나고 진승이 왕이 된다”는 여우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문이 낮에서 밤으로 떠돌았고, 징집되어 끌려가던 병사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발 없는 말은 불안한 민심을 타고 빠르게 번져갔다. 마침내 그들은 인솔을 맡았던 진나라 장교를 죽이고 봉기하였다. 진승과 오광이 봉기하였다는 소식은 금새 천리로 퍼져나갔다.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숨을 죽이고 살던 각 국의 멸문귀족들이 우후죽순처럼 다시 솟아났다. 무신 조헐은 스스로 조나라의 왕에 올랐고, 위구가 위나라 왕에, 전담이 제나라 왕이 되었다. 패현에서는 유방이 봉기를 일으켰고 회계에서는 항우의 숙부인 항량이 들고 일어섰다. 이제 중원에는 또 다시 칼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주군을 잃은 천하는 다시 사분오열되었다. 장강을 건너 멀리 서쪽 하늘에서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항우는 진나라에 무너졌던 초나라의 멸문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항연은 전국시대 말 초나라의 장수로 진과의 전쟁 중에 포위되었다가 자결했다. 어린 항우는 그의 숙부인 항량의 손에서 자랐으며, 항량과 항우는 거처 없이 떠돌다가 회계의 오중에 이르러 정착했다. 항량은 시대의 흐름과 민심을 읽을 줄 알았다. 항량은 대규모 토목공사와 강압적인 폭정의 끝을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었던 항우는 그의 밑에서 병법을 익혔으며, 제법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러던 중 진승과 오광이 봉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중 땅에서 사람들을 규합했다. 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항우가 간단히 군수의 목을 베었고, 항량은 군수의 관인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반기를 들었다. 사람들이 몰렸고, 힘들이 모아졌다. 항량은 회계의 군수에 올랐으며 항우는 부장이 되었고 군사 8천을 얻어 전쟁을 준비했다. 얼마 후 진승이 진나라 장수 장한에게 패하고, 부하 장수에게 배신당하여 죽임을 당하자 항우는 강동의 군사 8천을 이끌고 장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 서쪽 중원이 있는 땅으로 나아갔다.

 

그 무렵 진의 장수 장한은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진군하였다. 사방각지에서 들고 일어선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그의 다음 상대는 조왕을 자처하고 일어선 조헐이었다. 위기에 몰린 조헐이 원군을 요청했으며, 항우는 장강을 건너 그를 도우러갔다. 길을 나서며 항우는 군사들에게 사흘 동안의 식량만을 챙기고 밥을 짓던 솥단지를 버리도록 했다. 강을 건너며 항우는 병사들이 타고 건넜던 배를 부수어 가라앉혀버렸다. 이제 그들에게 돌아갈 길은 없었다. 장한과의 전투가 사실상 중원의 승패를 가를 결전이었다. 아홉 차례를 밀고 밀리는 접전이 수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장한이 항복했고, 제후들은 항우를 상장군으로 추대했다. 그의 군대는 이제 60만 대군으로 커졌고, 항우는 명실공이 반진항쟁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호령 한 마디면 당장이라도 천하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것처럼 보였다. 이제 곧 수도인 함양 땅이었다. 그러나 한 발 늦고 말았다.

 

그가 거록 땅에서 장한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유방의 군대는 그보다 한 발 앞서 함양을 점령하고 진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있었다. 항우가 함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지키는 군사들은 진나라 군사들이 아니었다. 이미 유방의 군사들로 바뀐지 한참이었다. 누구든 관중 땅 함양에 먼저 이른 자에게 천하가 주어질 것이라는 제후들간의 맹세가 있었다. 진 왕조는 멸망하였지만 중원의 패권은 항우의 손에 들어있지 않았다. 한때 유방은 항우와 함께 진에 맞서 싸우기도 했고, 의형제를 맺은 사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 항우와 유방은 천하를 두고 서로가 경쟁해야 했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뿐이듯 땅위에 황제가 둘 일수는 없었다. 항우와 유방의 초한쟁패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207년의 일이었다.

 

 관중 땅을 코앞에 두고 항우의 진영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항우의 군사역할을 해왔던 범증이 나서서 유방을 지금 쳐서 화근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방이 한때 여색이나 밝히고 재물이나 탐하는 자였으나 관중 땅을 차지하고 나서부터 그리하지 않는 것은 그가 큰 뜻을 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체적인 의견들은 유방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방은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당시 그의 군사가 10만이었고, 항우가 군사가 40만이었다. 아무리 함양에 먼저 닿았고 명분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거느린 군사의 숫자를 보나 제후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도 아직 항우를 대적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더구나 항우 진영에서 쏟아져 나오는 분위기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음도 눈치채고 있었다. 유방은 이번에도 먼저 움직였다. 서둘러 항우의 또 다른 숙부인 항백에게 사람을 보냈다. 유방은 자신이 항우에게 도전할 뜻이 없으며, 관중을 먼저 차지한 것이 아니라 실은 항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고 둘러댔다. 그는 내친김에 항백의 아들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겠다는 약속도 했다. 항백은 유방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홍문연에서는 때 아닌 연회가 열렸다. 유방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항우 앞에 나아가 절하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범증의 애가 탈수록 유방의 처세는 더욱 그럴싸하였다. 모든 것을 내어놓겠다는 유방의 제안을 항우가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유방을 죽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보다 못한 범증이 검무를 추던 장수에게 기회를 틈타 유방의 목을 치라 채근했으나 눈치 빠른 항백이 나서서 번번이 칼끝을 흐려 놓았다. 결국 유방은 그 자리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고, 그는 관중을 떠나 멀리 변방 한중 땅으로 달아났다.

 

 그렇게 항우를 피해 목숨을 구했던 유방이었다. 그런데 지금 항우는 유방의 군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유방이 해하까지 쫓아왔을 때 항우에게 남겨진 군사는 겨우 8백이었다. 한 때 서초패왕으로 불리던 천하의 항우가 고작 한나라의 유방 따위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지만 현실이었다. 그를 따르던 군사들은 매일 아침 줄었고, 한나라 군사들의 포위도 점점 좁혀졌다. 밤이 되면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노래는 칼보다 무서웠다. 한나라 장수 한신이 이미 포로가 된 초나라 병사들을 시켜 노래를 부르게 했다. 무리에 남아 있던 병사들도 자꾸 흔들렸다. 초나라의 옛 땅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다른 길이었다. 병사들도 그것을 잘 알았다. 자신이 사랑하던 애첩 우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회수에 이르렀을 때 겨우 백여 명이었던 군사는 포위망을 뚫고 다시 만났을 때 고작 서른도 되지 못하였다. 쫓기던 일행은 마침내 장강 기슭의 오강진 나루터까지 내몰렸다. 오강의 정장이 강기슭에 배를 대고 항우에게 건널 것을 권하였다. 마지막 남은 배였다. 다른 배들은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았고, 이제 장강을 건너면 유방의 군사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항우는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그 기슭에 서서 한참동안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장강너머 하늘 위로 노을이 붉었다. 하늘이 정해둔 항우의 시간이 점점 다해가고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하늘의 뜻을 받고 바로 저 장강을 건넜었다. 강동의 젊은이 8천을 이끌고 강을 건너 중원으로 향했었다. 이렇게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하늘에게 물었다. 이제 다시 그가 빈 몸이 되어 강 건너 고향 땅에 기댄다 한들 하늘이 다시 기회를 줄 것이며, 민심이 그를 의지할 것인가. 한번 흘러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오강의 정장이 다시 한 번 재촉하였다. 항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타고 왔던 애마 추를 정장에게 건네고,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한나라 군사들을 맞았다. 마지막을 직감한 항우가 다시 한 번 하늘을 우러러 큰 소리를 질렀다. 영웅은 스스로 때를 마감하였다. 그는 끝내 장강을 다시 건너지 않았다.

 

 기원전 202년, 한고조 유방이 등극하였다. 중원의 들녘에 다시 빈 바람이 채워졌고, 풀이 자랐으며, 장강에는 침묵이 흘렀다.

 

 

 

* 청나라 여류시인 이청조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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