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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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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4일 20시 59분 등록

2.

부르군트Burgund 사람들은 그들의 위대한 왕국을 라인 강변에 세웠다. 게르만족의 일파로 알려진 그들은 원래 도나우 강 근처에 살았으나 서기 375년경 중앙아시아에서 일어선 훈족에 밀려 이곳 라인 강까지 쫓겨 오게 됐다. 역사는 이 사건을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이전부터 라인 강을 끼고 살고 있던 원주민 켈트족을 몰아내고, 로마제국의 변방에 머물기 시작했다. 게르만 족의 다른 분파였던 서고트족은 로마인들과 잦은 갈등을 일으키다가 410년에는 서로마제국의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까지 들어가 약탈을 일삼기도 했다. 이때 서로마제국은 이미 과거의 로마제국이 아니었다. 지중해를 건너 아프리카 쪽에서 쳐들어 온 반달족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며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다 마침내 게르만족의 용병대장이었던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서기 476년에 멸망하였다. 이로써 게르만 민족은 유럽의 역사의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게르만 민족들은 수적인 열세와 문화적 열등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숱한 이야기 중 하나가 여전히 라인 강가에 전해지고 있다. 비극적인 부르군트 왕국의 이야기는 약 700년간 사람들의 입을 통해 떠돌다가 1200년경에 이르러서야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부르군트 왕국에 소문난 대장장이 레겐이 살았다. 그는 라인 강가에 살았다. 비록 마을 사람들과 떨어져 살았지만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훤하였다. 대장장이의 일이 그러하듯 남들보다 먼저 세상을 읽어야 했고, 다가오지 않은 앞날을 미리 알아야 했다. 강물 끝에 얼음을 녹이는 바람이 불어오기도 전에 사람들이 땅을 일굴 농기구들을 만들었고, 칼과 창을 만들어야 하는 겨울을 지내고나면 얼마 후에 들판 저쪽 끝에서 반드시 피바람이 불어왔다. 쇠는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곳에 항상 필요했고, 힘을 가지려는 자들은 쇠를 먼저 차지해야했다. 쇠는 힘이었고, 권력이었다. 그러면서도 쇠는 인간의 흥망성쇠와는 무관한 듯 돌고 돌았다. 싸움이 끝나고 나면 버려진 쇠들은 녹여져 삽과 괭이로 만들어졌고, 부러진 삽과 괭이들이 모여져 다시 칼과 창이 되었다. 쇠가 부족해지면 깊은 땅 속의 감춰진 쇠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는 라인 강변 구석구석 어느 땅이 무슨 쇠를 품고 있는지를 잘 알았다. 땅 속에는 검은 쇠만 감춰져 있지 않았다. 더러는 황금 부스러기를 찾기도 했지만, 황금으로는 괭이나 칼을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도 황금은 또 다른 힘이었다. 때때로 그것은 쇠보다도 더 큰 힘을 지녔고, 사람들은 쇠 앞에 무릎을 꿇듯 황금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파프너 숲의 가장 깊은 어느 동굴에 무서운 용이 지키는 무지막지한 황금이 있다고 했다. 그 동굴이 어디쯤인지 레겐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아직껏 그곳을 찾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그가 주워다 기르는 지크프리트라면 그 일을 대신해 줄 수 있을지 몰랐다. 근본조차 알지 못하는 아이였지만, 어엿하게 자란 지크프리트는 힘이 장사였다. 숲속의 대장간에서만 자랐기에 세상일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두려움이 무엇인지, 배신과 죽음이 또한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 무서운 용을 상대할 자는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했다. 지크프리트라면 용을 대적할 수 있을 것이고, 비천한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이었다. 레겐은 때릴수록 단단해지는 쇠를 구해 온갖 심혈을 기울여 칼을 만들었다. 자신의 욕망보다 더 뜨겁게 달구고, 얼음처럼 차갑게 식혔다. 용의 단단한 뱃가죽을 뚫고 심장으로 파고들어가 뜨거운 피에도 녹지 않을 칼이 있어야 했다. 칼이 완성되었을 때 그 칼을 쥐고, 휘둘러보던 지크프리트는 지금껏 칼을 벼려왔던 모루를 두동강이 내버렸다. 이제 때가 되었고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그는 알았다. 레겐은 지크프리트를 앞세우고 말로만 들어왔던 동굴의 입구로 향했다. 아직 지크프리트는 자신이 왜 보물을 지키는 용과 맞서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의붓아버지인 레겐은 버려진 자신을 거두어 키워준 은인이었고, 그의 부탁이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레겐의 관심사가 보물이라면, 지크프리트는 용의 모습이 궁금했다. 자신보다 더 힘이 센 그 무엇인가와 부딪쳐보고 싶었다. 의붓아버지는 동굴 밖에 남고 그는 혼자서 마치 용의 아가리처럼 생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지크프리트는 용의 심장을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쇠를 녹이던 용광로 같을 것이고, 용의 핏물은 쇳물처럼 빨갛고 또한 뜨거울 것이라고 짐작했다. 풀무질을 할 때마다 화덕의 아궁이에서 토해져 나오던 열기처럼 용의 입에서도 불이 품어져 나온다고 했다. 그런 일들이라면 이미 대장간에서 숱하게 견뎌내야 했던 일들이었다. 동굴 안쪽에서 거친 바람이 ‘휙’하고 몰려오더니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게 들리던 소리는 점점 더 천천히 그가 서 있는 곳으로 조여들었다.

 

용과의 싸움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끝나버렸다. 좁은 동굴 안에서 덩치 큰 용은 자유롭지 못했고, 작은 지크프리트에게는 그의 심장을 노릴 기회가 많았다. 동굴 밑바닥에 파인 웅덩이에 숨은 지크프리트를 용은 보지 못했고, 날카롭고 단단한 그의 칼은 제 운명을 만났듯 용의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파프너는 서너 차례 몸부림을 치다 체념한 듯 마지막 숨을 고르며 자신을 무찌른 자를 바라보았다. 점점 욕망의 불길이 사그러들던 파프너의 눈빛은 편안해 보였다. 용이 말을 건넸다. 그는 자신을 이곳에 보낸 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물었다. 죽어가는 자의 저주를 받기 싫어 지크프리트는 레겐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용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가 누구이던 간에 황금에 눈이 먼 자는 친구를 배반 할 것이라고 했다. 한때는 파프너 자신도 자기보다 더 강한 자를 알지 못하였고, 더 강해지기 위해 보물을 차지하였지만, 결국 자신의 오늘이 지크프리트의 내일이 될 것이며, 보물에 숨겨진 비밀이 그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눈을 감았다. 손잡이 끝까지 깊게 박혔던 칼을 뽑아내자 용의 심장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뜨거운 용의 피로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입술고랑을 타고 흘러들었다. 용의 피 맛을 본 지크프리트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니 몸만 뜨거워진 것이 아니라 그의 피부가 용의 껍질처럼 단단해졌고, 그의 눈이 새로 열리고 귀가 뚫렸다. 동굴 바닥을 기는 벌레들의 소리가 들렸고, 천장에 매달린 박쥐들이 주고받는 말들이 들려왔다. 그는 동굴 안쪽의 깊은 어둠 속에서 감춰둔 보물을 한 눈에 찾아냈다. 보물은 작은 언덕처럼 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보물들의 한 가운데 놓인 작은 반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반지는 지크프리트의 손가락에 맞춘 듯 끼어들었다.

 

동굴 밖으로 나온 그는 가까운 샘물을 찾아 몸을 씻었다. 등에 묻었던 보리수 나뭇잎 한 장이 떨어져 나갔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뭇잎 때문에 용의 피가 닿지 않았던 곳만을 빼고 그의 몸 전체가 갑옷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샘물 주변에서 재잘대는 새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그냥 지저귀는 소리가 아니었다. 새들은 지크프리트에게 말하고 있었다.

“레겐이 그를 죽일거야...”

“지크프리트는 왜 바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지?”

“반지를 탐낸 레겐이 그를 죽이고 반지를 빼앗고 말거야.”

“지크프리트가 용을 죽였으니, 반지도 투구도 이제 그의 것이 맞아.”

“불쌍한 지크프리트... 그가 반지에 내린 저주를 알까?”

“몰라도 어쩔 수 없지. 그는 이미 파프너를 죽였고, 반지를 차지했으니...”

새들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무언가 검은 그림자가 가까운 덤불 속에서 그의 뒤로 덮쳐들었다. 방심한 틈을 노린듯했다. 그림자의 칼끝을 간신히 피한 그는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 위험을 받아쳐내며 상대방의 급소를 찔렀다. 그림자가 쓰러지면서 짧은 비명을 토했다. 쓰러진 자의 얼굴을 본 지크프리트는 아연질색 하였다. 새들의 말은 환청이 아니었다.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레겐이었다. 바로 자신을 거두어다 길러 준 의붓아버지였다. 자신의 손으로 의붓아버지를 죽이다니... 그는 무서웠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정당방위였다지만, 눈앞에 사실들을 믿을 수 없었다. 지크프리트는 고향 마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길로 그는 난생 처음 그가 자랐던 숲을 떠나게 되었다. 어두운 숲 사이로 이어진 길을 따라 어딘지조차 모를 세상 밖으로 내달음치고 말았다.

 

몇 달 후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라인 강변, 부르군트 왕의 성이 있는 보름스였다. 말로만 들었던 도시는 그가 살아왔던 숲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성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고, 시장에는 온갖 것들이 다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숨기가 좋았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세상일에 어두워 바보처럼 앞뒤 가리지 못하는 그는 사람들 속에서 쉽게 눈에 띄었다. 더구나 힘이 장사인 그에 관한 소문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퍼졌다. 고작 자신의 보따리를 노리던 부랑배들 몇과 붙어 그들을 내동댕이쳤을 뿐이었지만,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일에 필요이상으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입소문이 사람의 귀에 들어가고 또 다른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부풀려졌다. 그들은 어쩌면 풍문으로 들리던 ‘파프너를 무찌른 사내’가 바로 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소문은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름스의 영주이자 부르군트의 왕인 군터가 그를 불러들였다. 군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실인지를 물었다. 굳이 숨겨야 할 이야기도 아니다 싶어 지크프리트는 사실대로 말하였다. 레겐을 죽인 이야기를 빼고 용의 동굴에 찾아간 이야기부터 용을 무찌르고 피를 뒤집어 쓴 이야기며 숨겨진 보물들과 투구이야기까지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군터 왕도 그의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보고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군터의 눈앞에 있는 그는 힘이 장사였다. 군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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