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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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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8일 00시 31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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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자는 내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숨소리를 들어보고 맥박까지 확인했다. 그러고는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더니 우물로 끌고 와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미 돌에 맞아 깨져있던 내 머리는 우물 바닥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고, 얼굴과 이마, 볼도 뭉개져 형태를 분간할 수 없다. 뼈들도 부서졌고 입 안엔 피가 가득하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 나흘째다. 아내와 아이들이 날 찾고 있을게 분명하다. 울다울다 지친 딸애는 넋을 잃은 채 대문만 쳐다 보고 있을 테고, 다른 식구들도 모두 목을 빼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나를 기다리고들 있을까? 어쩌면 벌써 나의 부재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르지. 빌어먹을! 여기 이렇게 누워있으니 내가 두고 온 삶이 아무 일도 없는 듯 계속되고 있으리라는 생각마저 든 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무한한 시간이 있었고, 내가 죽은 뒤에도 시간은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무궁한 암흑과 암흑 사이에서, 잠시 빛을 발하며 살았을 뿐이다.

나는 행복했다. 아니, 지금에서야 내가 행복했던 줄을 알겠다. 나는 술탄의 화원에 속한 화가들 가운데 가장 멋지게 그림을 장식했다. 그림 장식에서 나를 따를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술탄의 화원에서 일하는 것 말고 바깥에서도 일을 해 매달 900악체씩이나 벌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여기 이렇게 죽어 누워있는 것이 더욱 분통하다.

-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우리 연구소에서는 매년 새로운 연구원들이 들어오면 첫 번째 수업이 정해져 있다. 일명 죽음 수업이라고 하는데, 수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죽었다죽음이 문을 열고 나를 받아들인다나에게는 꼭 10분이 남아 있다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내 장례식에 와 있다. 나는 이들에게 내 삶의 이야기를 10분 안에 이야기 한다내 인생의 마지막 소통!"

 

이 수업은 여러모로 나를 돌아보게 한다. 2006년에 처음 이 수업을 했을 때, 나는 참여할 수가 없었다. 나의 장례식을 내 스스로가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구토를 일으키는 행위였다. 죽음을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죽음은 그저, 내가 맞이해야하는 숙명이라기보다는 내 존재를 부정해야만 가능한 사실을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든 삶의 끈을 가지고 동아줄이라도 잡아서 연명해야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질긴 생명력으로 어떻게든 연장하면 죽음만은 면할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종교적 믿음을 통해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생명을 이어나가리라 믿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가, 다른 연구원들의 ‘아름다운 죽음들을 바라보며, 나는 서서히 나의 죽음도 서서히 받아 들일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나의 죽음 또한 비록 먼 발치에서나마 오롯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최근에는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뜻의 웰 다잉 well-dying’ 붐이 불면서 웰 다잉 칼럼리스트도 생기고, 복지관이나 여러 기관들에서도 죽음 준비 학교를 열기도 하는 것 같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죽음을 미리 경험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이해가 삶을 바꾼다는 측면에서 죽음을 '인식론적'으로, 그리고 '현상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죽음에 가까운 이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일종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개척하려는 죽을 권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사후 세계에 대해서 한번 고민해 보는 자세, 특히 이러한 임종체험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삶에 더욱 충실히 사는지를 반성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죽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접한 죽음은 전혀 슬프거나 두려움 없는 죽음이었다. 이러한 죽음을 접하며 죽음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나에게 조용히 속삭여주었다.

나는 올해 죽음 수업에 비로소 참여하게 되었다. 죽음 수업을 참관한 지 7년이 지난 시점에서였다. 나 자신에 대한 후회와 한탄은 물론이고,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들이 고스란히 10분간의 스피치에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의 벗들에게 이야기했다.

 

"끝으로 나의 벗들에게 말합니다. 나의 벗들이여. 그대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까. 나의 게으르고 어리석은 판단에 혹시나 상처를 입었다면, 나의 죽음이 그대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히 대신하고자 합니다. 감히 죽음으로 그것이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나 또한 너무나도 잘 알지만,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마지막 1분밖에 없습니다. 나의 마지막 남은 소중한 1분을 나의 벗들에게 드립니다. 그대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천국에서 만날 때를 기약하며, 그대들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다들 천국에서 만나요."

 

나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나는 나의 삶의 태도가 바뀌지는 않았을까 조심스레 떠올려본다. 죽음을 접해 본 것은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게 되는 경건함을 부여해주었다. 죽음은 신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발명품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죽음을 통해 삶은 더욱더 빛나게 되리라. 삶과 죽음은 바로 하나일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에 더욱더 충실하게 된다.

 

나는 내 마지막 날을 매우 유쾌하게 상상한다. 나는 그날이 축제이기를 바란다. 가장 유쾌하고 가장 시적이고 가장 많은 음악이 흐르고 내일을 위한 아무 걱정도 없는 축제를 떠올린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것은 단명한 것들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 그럴 것이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 피워내는 몰입, 그리고 이내 사라지는 안타까움,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를 빛나게 한다. 언젠가 나는 내 명함에 '변화경영의 시인' 이라고 적어두려고 한다. 언제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 이름은 내 묘비명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내 삶이 무수한 공명과 울림을 가진 한 편의 시이기를 바란다.

- 구본형, <신화읽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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