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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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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일 07시 44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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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www.yes24.com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움직이지만...... 인생이란 참으로 지랄맞게 난잡한 이야기이다.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대화가 오갈 때마다 흉한 꼴을 당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고상하고 인간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있을까? 현실을 소설처럼 깔끔하게 장으로 나누기라도 하란 말인가?

- 스티븐 킹 <미저리> 중

 

 

주말에 도서관에 갔다. 요즘은 공공기관이 전력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25도 이하로 내리지 않은 탓에 내부도 무척이나 더웠다. 책을 고르는 책장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온기가 흐믈거렸다. 문득 이렇게 더운 여름에 서스펜스 작품을 하나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책장 앞에 서 있던 한 여인 때문이었다. 영미문학 책장 앞에서 있었는데, 스티븐 킹 작품 전집 앞에 서 있다가 도통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무례했다. 스티븐 킹 전집에서 그의 작품을 고르려고 하는 것을 알고서도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안되겠다 싶어 사서에게 스티븐 킹 소설 중 하나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고른 책은 <미저리>. 날씨도 더운데 책장 앞을 전세 낸 듯 버티고 있는 모습이 미저리의 애니 윌크스를 닮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모임에서 비슷하게 무례한 경우를 당해서 비슷한 류의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미저리’ 같은 경우를 도서관에서 당하니 기분이 묘했다.

 

소설은 자동차 사고로 의식을 잃었다가 산골 외딴 집에서 깨어난 소설가 폴이 자신을 구해준 전직 간호사 애니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집으로 가는 길에 폭설에 미끄러진 자동차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이 <미저리>의 작가 폴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전직 간호사인 애니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감금한다. 사고 때 다친 다리로 움직이지 못하는 폴에게 어떤 치료도 해주지 않고 노브릴이라는 진통제만을 준다.

 

그녀의 집착은 그녀는 폴이 사고를 당하기 직전, 2년 동안 공을 들여 완성한 소설 <과속차량>을 그 앞에서 직접 태우도록 요구하는데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그가 통속소설에서 벗어나고자 공들여 쓴 작품이었던 것이다. 주인공 폴 셸던은 지은이 스티븐 킹의 분신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쓴 통속 소설 <미저리>시리즈를 써서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지만, 평론가들의 악평에 괴로워하며 문학상이 주는 권위에 집착한다.

 

스티븐 킹 자신도 한때 싸구려 공포소설 작가로 치부 당했던 것에 괴로워했던 모습을 그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고백한 적이 있다. 폴은 애니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끔찍히도 벗어나고 싶어 했던 <미저리>의 이야기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그녀는 N자가 빠진 고물 타자기를 사주며 소설 속에서 죽은 미저리를 살려내라고 ‘요구’한다. 그녀는 폴에게 ‘작가들은 알지도 못하는 헛소리만 지껄이며 글을 애매하게 쓴다.’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는 그녀를 위한 <돌아온 미저리>를 완성해 나간다.

 

그는 <돌아온 미저리> 속에서 죽여 버린 미저리를 되살리면서 이제껏 혐오했던 대중 소설의 재미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독자를 사로잡는 소설은 모두 '알고 싶어 좀이 쑤시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진정 재미있는 소설은 ‘낮 동안 일에 시달리며 집에 가서 편히 드러누울 생각’만 하던 독자마저도 ‘뒷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싶은 마음에 밤을 지새우게 만드는’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공포감을 주는 애니가 두렵기도 하지만, 그녀를 통해 글 쓰는 재미와 감동을 주는 느낌을 서서히 알게 되는 것이다. 그는 왜 자동차 사고가 나기 이전에는 왜 이런 즐거움을 몰랐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평단의 악평과 권위있는 상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 ‘독자의 즐거움’을 아는 순간, 독자는 스티븐 킹이 보여주는 작가적 고민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책 후반부에서 그녀는 때로는 지성적으로, 또 기분에 따라서 일괄한 패턴이 없는 잔혹한 광녀로 돌변한다. 애니 윌크스의 다중적이고 도발적인 행동과 심리를 스티븐 킹은 병리학 박사와 간호사들을 통해 리서치 했음을 책 초반에 밝히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쥐 심장 뛰는 것이 이렇게 처절해!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이렇게 처절해! 이게 우리 모습이야. 우리는 스스로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쥐덫에 걸린 쥐만큼이나 아는 게 없어.”

 

스티븐 킹은 그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사랑하는 것은 죽여야 옳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독자이지 작가가 아닌것'이라고 하면서 많은 세세한 묘사들이 작가와 독자와의 유대를 해친다고 했다. 분위기의 묘사는 중시해도 좋지만 인물에 대한 너무 세세한 묘사는 독자가 떠 올릴 수 있는 주위의 인물에 대한 상상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덕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스티븐 킹은 애니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정신이상 병력이나 살인에 대한 계기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녀를 더욱더 사악한 살인마로 만든다. 눈 속의 외딴집, 움직일 수 없는 다리, 그리고 살인마가 있는 눈 덮인 폐쇄된 공간이 소설의 두려움과 공포를 극대화 시킨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인물들의 성격만으로 내면의 공포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역시 소설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다시 더운 도서관 앞이다. 사서가 책장으로 갔을 때도 그녀는 스티븐 킹 전집 앞에 여전히 서 있었다. 사서가 그녀에게 잠시 비켜달라고 이야기했는데도,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서는 좀 더 크게 이야기했다. “잠.시.만.요.” 그녀는 이제야 무언가를 느낀 듯 움직였다. 사서는 이미 그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도서관의 몇몇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이동할 것을 권유했다. 순간 아차 싶었다. 그녀는 약간의 병증이 있었던 것이다. 병증이 있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나는 사서에게서 책을 건네 받은 후 바로 옆 자리에서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처음에 ‘미저리’같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더 이상 ‘애니’로 인해 보이지 않았다. 책은 그런 것이다. 잠시나마 내 삶에서 자리를 벗어나 상상으로 나 자신을 감출 수 있는 것.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책속에 내 자신을 잠시 가두어 두고 다시 나오면 세상이 조금은 달라 보이는 것. 이 책으로 인해 대리만족을 조금이나마 느꼈다면,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와의 조우를 이룬 것이 아닐까.

 

“폴? 뭐하는 거야?”

”소설을 다 완성했어. 정말 훌륭한 작품이야. 애니. 네 말이 옳았어. 미저리 시리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고 잡종이든 아니든 간에 아마도 내가 이제까지 쓴 모든 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일 거야. 이제 나는 이 작품으로 살짝 장난을 쳐볼 생각이야. 아주 재미있는 장난 이지. 다 너한테서 배운거야.”

“폴. 안 돼!”

애니가 소리 질렀다. 목소리는 고통과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애니가 손을 앞으로 뻗자 기댈 곳 없는 샴페인 병이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 충돌한 병이 어뢰처럼 폭발했다. 거품 묻은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축하 케이크에 촛볼 켜니까 소원 빌고 싶니, 애니? 이 염병할 괴물 년아. 소원 빌고 싶어?”

“오 하느님. 오, 폴, 너 지금 무슨 짓이야?”

미저리는 안 돼! 네가 감히 미저리를 불태울 수는 없어. 이 더러운 개새끼야. 너 따위가 감히 미저리를 불태울 수는 없다고!

애니가 몸을 구르며 무릎을 세워 일어나려고 발버둥쳤다. 원고 용지는 이미 대부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여전히 타고 있는 것도 있고 샴페인에 빠져 찌지직거리며 식어가는 것도 있었다. 깨진 샴페인 병의 날카로운 녹색 파편들이 팔뚝에 박혀있었다.

“죽여 버릴 테다. 이 거시기나 빨아먹을 거짓말쟁이 새끼!”

애니가 불타는 종이 더미 위로 쓰러져 내렸다. 엎어진 몸이 종이를 태우던 불을 꺼 버렸다. 바닥 한가운데의 종이 더미는 연기를 피워 올리는 검은 덩어리로 바뀌었다. 방 안에 흩어져서 타던 종이들은 대부분 바닥에 흘러넘치는 샴페인 때문에 불이 꺼졌다.

- 스티븐 킹 <미저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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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10:16:08 *.50.21.20

크 진짜 구제할 길 없이 골때린다. 재밌겠어요. 도서관 갈 때 찾아봐야겠어요. 재미있는 소설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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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12:48:21 *.216.38.13

번역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 여름에 <납량특집>으로 읽기에 딱 좋은 소설이랍니다~^^. 

약 500페이지 되는 책이 후다다닥~ 어느새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요. 역시 스티븐 킹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책을 그리 빨리 읽는 편이 못되는데도, 전 그 후덥지근한 도서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답니다.

정말 더운 여름 날, 읽기를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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