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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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5일 09시 54분 등록

아버지, 장마가 끝나고 불볕 더위가 시작된다고 하는데 건강은 어떠신지요? 소천하신 스승께서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책을 읽다 보니 스승께서 당신의 아버지께 편지를 드리는 내용이 나오더군요. 문득 저도 아버지께 긴 편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스승 말씀이 마음에 어떤 생각이 찾아오면 생각대로 실천해보는 것이 인생을 즐기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한 통을 씁니다.

 

고백하건대 제 인생의 전반기는 아버지와의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까지는 말 잘 듣는 아이였지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어길 것도 없었지요.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하는 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대학 진학부터 아버지와 저는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왜 서울로 대학을 가려 했는지 아세요? 저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청주에서 대학을 다녔다면 저는 새장 속 새의 삶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억나세요? 대학 시절 어느 겨울 방학, 저는 사진반 선배들과 설악산으로 출사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지요. 아버지는 지도 교수가 동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저는 몰래 편지를 써놓고 나와 버렸지요. 돌아와서 아버지께 얼마나 혼이 났는지요. ‘이제 머리 컸다고 애비 뜻을 거스르려 하느냐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미국에 어학연수를 간다 했을 때는 어땠나요? 아버지는 서울 유학까지 보내줬으니 되었다며 펄펄 뛰며 반대하셨죠. 결국 미국에 사시는 친구분 댁에 저를 맡기면서도 아버지께서 얼마나 전전긍긍하셨는지 지금도 생생히 그려집니다. 하지만 최고의 투쟁은 역시 결혼이었지요. 그 시절 저는 아버지가 참으로 야속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맞선 자리에 나가 앉아있으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습니다. (아버지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면 심할수록 이 세상엔 그와 저, 단 둘만 남아 있는 듯 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반대가 우리를 더 단단히 묶어 주었습니다.

 

아버지와의 투쟁의 역사가 이해의 그것으로 변모한 시점은 결혼을 하고 나서였습니다. 사실 저는 결혼 전까지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고지식한 아버지는 집안 식구들 모두를 자신의 틀 속에 가두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의 불 같은 성격에 어머니는 매일 살얼음판을 걷듯이 살아야 했고 저에게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알았습니다. 아버지만큼 훌륭한 아버지가 흔치 않다는 사실을요.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자신의 기쁨만을 위해 사시던 분이셨습니다. 집에 쌀이 있는지,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지 도통 관심이 없는 분이셨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여읜 남편은 하느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여 어머니 대신 아버지를 데려갔다고 생각했답니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그리워할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지인의 아버지는 아픈 어머니를 버리고 젊은 여자를 들여 버젓이 살림을 차리고 살았다고 합니다. 아직도 그리 사시면서도 자식들에게는 효도를 하지 않는다 호통을 치신다고 합니다. 스승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느라 평생 분주하셨지만 가족들은 항상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학교에 내야 할 등록금이 밀려 집으로 쫓겨온 적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아버지는 얼마나 성실한 분이셨는지요. 저는 아버지 슬하에서 살면서 단 한 번도 돈 걱정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학시절 방학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고 여관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아버지가 얼마나 충실히 가장의 책임을 다하신 분이셨는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은 아니셨지요. 하지만 그 누구보다 뜨거운 교육열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영어 공부를 시작할 때 아버지께서 손수 알파벳을 가르쳐 주시던 장면은 아직도 떠오릅니다. 제가 고3이었을 때 기억하세요? 아버지의 양복 주머니에는 여러 번 접힌 큰 종이 한 장이 항상 들어있었습니다. 바로 학력고사 점수에 따른 대학진학표였지요. 아버지는 제 모의고사 점수가 나올 때마다 그걸 들여다 보면서 어느 대학, 무슨 과에 진학하면 좋을지 고심하셨습니다. 3때 친구가 가져온 원서 때문에 그 친구와 같은 대학을 가게 되었다는 남편의 말을 들으며 아버지 같은 분이 내 아버지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저는 아직도 아버지가 결혼을 허락하던 날 저의 부부에게 했던 말을 잊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남편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하라 하셨지요. 첫째, 절대 남의 보증을 서주지 말아라. (지금 생각하니 정말 중요한 사안이었듯 합니다.) 둘째, 너는 아버지가 없으니 집안에 큰 일이 생기면 나와 상의해라. 그리고 덧붙이셨지요. 너희 둘이 자전거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을 올라 가려 하면 내가 뒤에서 밀어줄 것이다.  하지만 산에 오르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내 도움은 기대하지 말아라. 결혼 후 13년 동안 살면서 아버지는 저희 부부가 어려울 때 마다 큰 힘을 보태주셨습니다. 이제 작은 봉우리는 넘어선 듯 합니다. 아버지 덕분입니다.

 

사실 저는 아버지에게 서운한 마음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삼남매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큰 딸인 저는 교사가, 둘째 딸은 의사가, 막내인 아들은 판사가 되길 바라셨죠.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납니다. 얼마나 이상적인 조합입니까? 그 어느 바램도 현실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기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여동생은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할 만큼 공부를 잘했으니 부모로써 그런 기대를 할 법하지요. 아들은 유일한 아들이니 어찌 판사로 만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교사라는 옷이 초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들에 비해 저에 대한 소박한 기대를 가진 아버지가 야속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아등바등 살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필사적으로 취업했고 회사에서 인정받고 승진하려 물불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내 말대로 선생님이 되었으면 오죽 좋았겠는가?’라는 말을 듣기 싫었고 내가 월급 줄 테니 집에서 살림하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교사보다 사회적으로 더 성공하여, 집에서 살림하기는 아까운 딸이 되어, 저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그 마음은 그대로였습니다. 아버지의 바램을 거스르는 결혼을 했기에 더욱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저는 바보였습니다. 아버지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니요? 그리 하여 무슨 소용이 있다구요. 저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지키느라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보기에 여자에게는 교사가 최고의 직업이었고 남편 잘 만나 큰 고생하지 않고 사는 딸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딸 둘을 키워보니 이제야 알겠습니다. 왜 깨달음은 이리 뒤늦게 오는 것일까요?

 

깨달음은 저에게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제가 대학 신입생 시절, 아버지는 스무 살 딸을 온전히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셨지요. 그래서 조치원 출신인 기숙사 수위 아저씨를 고향 선배로 사귀어 저는 기숙사에 밀어 넣으셨습니다. 10시 기숙사 점호 시간, 사감 선생님께서 네가 수위 김씨의 조카딸이구나.’ 했을 때 제 얼굴이 얼마나 뜨거웠는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제가 밤늦게 기숙사에 돌아올 때면 수위 아저씨가 아버지께서 데모 하고 다니는지 걱정을 많이 하신다. 일찍 다녀라.’ 하실 때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하지만 이제는 알겠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거지요. 그 마음은 제가 남편과 결혼할 때도 그대로셨습니다. 아버지는 경찰 친구들에게 부탁해 남편의 신원조회를 하셨지요.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얼마나 창피하던지 남편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딸 둘을 키우니 이제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습니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생명부지의 남자를 결혼상대자라 데려왔으니 얼마나 불안하셨을까요. 혹시 기혼자는 아닌지, 어마어마한 빚이 있는 것은 아닌지 어찌 알고 싶지 않으셨을까요? 저는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두 딸이 남편감을 데려오면 온갖 인맥을 동원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철저히 알아보고 결혼 승낙을 하기로요.

 

지난 주말,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거울 보기가 싫다. 거울 속에 네 할아버지 모습이 보이는구나. 내가 선의로 했던 행동을 왜곡하고 다른 이에게 엉뚱한 말을 하는 네 할아버지가 정말 밉구나.’ 저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아버지 마음 속에 있는 감옥이 그려졌습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마흔 고개를 넘기며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듯싶습니다. 제가 할아버지 편을 들려는 것은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많은 실수를 하셨습니다.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그리 해서는 안되지요. 하지만 아버지, 생각해보세요. 할아버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자식들을 키우셨을 겁니다. 예전의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지요. 그래서 많은 오해를 사기도 했겠지요. 할아버지는 평생 아픈 할머니 때문에 많은 자식들을 건사하는 일이 큰 부담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셨겠지요. 아들이 최고다 여기는 증조 할머니 손에 자라셨으니 부족한 것 없이 모든 것을 누리며 자라셨을 겁니다. 그러니 남들을 배려할 줄 모르시겠지요. 하지만 아버지, 할아버지에게 연민을 가져 보세요. 할아버지는 하나도 아닌 배우자 둘을 먼저 보내신 분입니다. 그 슬픔과 좌절을 겪어 보지 못한 우리가 그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을까요? 지금은 또 어떠한가요? 홀로 생활하고 계신 할아버지는 얼마나 외로울까요? 저는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불행한 노년을 보내시길 원치 않습니다. 진정으로 할아버지를 용서하고 마음의 짐을 벗으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남들이 뭐라 해도 저는 아버지 편입니다. 아버지, 이제 마음 편히 사세요. 미움과 증오의 옷은 훌훌 벗으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 가듯 사세요. 그렇게 살기에도 짧은 것이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법이 서툴러 가족에게 상처 준 이를 용서하세요. 그것이 아버지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입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싫으면 그렇게 하세요. 싫은 사람을 억지로 보고 살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 감옥에 갇혀 살지는 마세요. 그것은 죄수와 다름 없는 삶입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래오래 제 옆을 지켜주세요. 결혼을 승낙하던 그날, 아버지의 당부를 저희 부부가 오랫동안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가을 바람이 불면 아이들과 함께 찾아 뵐게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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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7 12:51:44 *.193.138.248

글을 읽고 나니 네가 더,   어여뻐 한참 서성이다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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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7 16:34:36 *.252.144.139

아이, 부끄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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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1 18:38:32 *.152.83.4

아 ~ 맞네.

어머니를 보내고 한동안 아버진 홀로 사셨어요.

시골에 함께 계셨던 형님네랑 같이 있으면서도 많은 짜증을 내셨대.

믿었던 큰 아들이 평생 한번도 당신 말씀을 듣지 않으셨으니 오죽 그러셨을까 싶었어요.

그러다 돌아가신 친구분의 아내(우린 그분을 아직도 대구아주머니라 부르면서 연락드리고 있어요)와 친구가 되셨어.

일흔이 넘은 나이에 만난 여자친구.

주말이 되면 대구로 여자친구를 만나러 외출하시는 아버지.

그 후론 별로 짜증을 내지 않으셨대요.

그러다 어느 때인가 아버진 폐암진단을 받았어요.

1년의 투병끝에 아버진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셨어.

장례식에 대구아주머니의 둘째 딸이 조문왔어요.

그 딸은 내 중학교 동창이에요.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한테도 아버진 언제나 따라배우고 싶었던 우상이었던 것 같았어.

한학을 하시고, 두루마기를 즐겨입으셨던 아버지.

막내였던 날 그렇게도 이뻐하셨던 분.

언제 나도 아버지께 긴 편지를 보내고 싶어요.

고마워요.

아버지를 다시 떠올리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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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4 11:55:58 *.73.85.9

그립겠다. 자로선배. 아버진 언제가 모두의 그리움으로 남을 대상인거라는거 자꾸 잊게 되는게 더 슬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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