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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9일 02시 20분 등록

범해 좋은 사람들 5.

책과 밤을 함께주신 신의 아이러니

 

 

  보르헤스는 1899824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이름은 길다. 호르헤 프란시스꼬 이시도르 루이스 보르헤스 아세베도이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의 작가>. 스스로 나는 작가로서보다는 독자로서 더 우수했다.” 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도서관에서 영어책을 읽으며 자랐고 잦은 이사와 여행으로 아버지의 책이 흩어지자 국립도서관을 애용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가 40대에 실명하자 가계를 이끌기 위해 시립도서관 사서로 취직을 한다. 페론이 정권을 잡은 후, 동물검역직원으로 발령이 나자 사직한다. 6대째 이어져오는 부계의 유전병으로 30대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갔고 58세에는 완전히 실명하고 만다.

 

 보르헤스 문학은 어려우면서도 묘한 매력이 있다. 그를 포스트모던의 선구자라고 하지만 보르헤스의 작품은 이전에는 일반 대중보다는 작가들이 주로 읽었다. 그는 시와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썼다. 그의 문체는 간결하다. 몇 페이지 되지 않는 텍스트 속에 어마어마한 사상적 암시를 시적으로 압축해 놓았다. 표현의 경제학이 그의 문장의 매력이다. 1955년 페론이 물러난 후 그는 국립 도서관장이 된다. 반정부 지식인으로 낙인찍혀 항상 형사들의 감시를 받던 보르헤스는 기뻤다. 도서관의 작가가 조국의 국립도서관장이 된 것은 훈장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는 이미 시력이 매우 약해져 있었다. 그는 혼자서는 읽고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책을 읽고 싶을 땐 어머니나 친구들에게 읽어 달라고 했고, 글을 쓰고 싶을 땐 구술하여 받아 적게했다.

 

 그의 실명은 태어날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호머와 밀턴이 장님이었고 그는 눈이 먼 세 번째 국립 도서관장이라고 했다. 그가 더 이상 검은 색을 볼 수 없게 되자 눈에 남은 유일한 색이자 그가 사랑한 호랑이와 장미의 색인 노란색을 좋아했다. 워낙 노란색을 좋아했기 때문에 친구들은 생일마다 요란스러울 정도로 샛노란 넥타이를 선물했다. 그는 실명과 노년이 저마다 혼자가 되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누가 옆에서 구술할 수 있을 때까지 머릿속으로 한 줄 한줄 글을 써 나갔다. 보르헤스의 어머니는 예전에 남편을 돕던 것처럼 아들을 돌봤다. 그녀가 아흔 넘어 책을 읽어주고 글을 받아쓰는 것이 힘들어지자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16세 소년이 서점에서 처음 그를 만나 그에게 책을 읽어주던 4년의 시간을 회상하는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이라는 책을 썼다. 인상적인 한 구절을 옮겨본다.

 

가끔은 그가 직접 선반에서 책을 고르기도 한다. 물론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서, 어김없이 그곳으로 간다. 예를 들어 외국에 갔다가 책방에 들를 때가 있는데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 보르헤스는 모형지도의 울퉁불퉁한 표면을 훑듯이 책등을 어루만진다. 그곳의 지형을 알지는 못해도 살갗으로 지리를 읽는 것 같다.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는 책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 뭐랄까, 장인의 직관 같은 것이 지금 만지는 책의 내용을 알려주는지, 분명히 눈으로 읽을 수 없는 그 책의 제목과 이름을 판독해 낸다. 이 늙은 사서와 그의 책 사이에는 생리학의 법칙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어떤 관계가 존재한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보르헤스에게 가는길, 35)

 

 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알맹이였다. 그는 모든 걸 기억했다. 그러니 자기가 쓴 책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 엄청난 기억력 때문에 그에게 모든 읽기는 다시읽기였다. 그는 입술을 움직여 말을 뱉어낸다. 수십 년 전에 외운 구절을 소리 내어 읊는다. 그러나 한때 그는 심각한 불면으로 고통을 받았다. 지독히 예민한 성격 때문에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이 악몽같은 밤에 치통까지 더해져 그의 고통은 끝을 몰랐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의 주를 이루는 환상문학의 기초가 되었다. 한밤중 잠들지 못하는 자에게 시간은 멈추고 ,순간은 불멸로 이어진다. 1944년 에 출간된 <기억의 명수, 푸네스>의 서문에 그의 단편은 바로  불면증의 메타포라고 했다.

 

 그는 불면의 밤에도 책을 손에 들고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를 생각했다.

 

 

          축복의 시 ㅡ보르헤스

어느 누구도 탄식이나 비난쯤으로 폄하하지 않기를.
기막힌 아이러니로 내게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오묘함에 대한 나의 소회를.

신은 빛을 잃은 이 눈을.
꿈들의 도서관에서 여명이 그 열정에 굴복해
건네는 분별없는 구절들밖에 읽을 수 없는 이 눈을
책의 도시의 주인으로 만드셨네.

낮은 헛되이 무한한 책들을
두 눈 가득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스러져간
필사본들처럼 읽기 힘든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한 왕이
샘과 정원 사이에서 갈증과 배고픔으로 죽었지
나는 이 높고 깊은 눈먼 도서관의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떠도네

벽들은 백과사전, 지도, 동양과 서양, 세기, 왕조
상징, 우주와 우주기원론을
건네지만 모두 부질없다네
도서관을 낙원으로 꿈꾸던 나는

그림자에 싸여 천천히.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텅 빈 어스름을 탐사하네
우연이라는 말로는 정확하게 명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것들을 주재하네
다른 누군가가 안개 자욱한 어느 오후에
이미 많은 책과 어둠을 건네받았네
느릿한 복도를 배회할 때

나는 늘 성스러운 막연한 두려움으로
똑같은 날들에 똑같은 걸음을
옮겼을 이미 죽고 없는 타자임을 느끼네
여럿인 나와 유일한 하나의 그림자

둘 중에서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어차피 저주의 말이 쪼개질 수 없는 하나라면
내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무슨 상관이랴?
내가 그루삭이든 보르헤스이든

나는 이 소중한 세상이
일그러져 꿈과 망각을 닮은 창백하고
막연한 재로 사위어가는 것을 바라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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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2 13:04:25 *.33.19.23

독자로서 우수한 거 행복한 삶인 듯 해요.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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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6 13:56:34 *.201.99.195

제주에서 책 한권 펴보지 않고 며칠을 지냈더니... 그 인생이 더 편한 것 같더군요,  아아 책, 오오 책.....

책 스트레스 없는 곳에서 살고 싶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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