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뫼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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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아요, 그대
- 최윤, <회색 눈사람>
이 단편소설을 만난 것은 1992년 겨울입니다.
참고서를 주로 팔던 동네 서점 진열대에 놓여 있던 이 책을, 모퉁이에 서서 단숨에 읽어 내려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고보니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그 당시 저는 대학입시 시험을 막 치르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와 친하게 지내던 동창들 중 몇 명은 이미 재수를 결심하고는 입시종합학원을 알아보았고, 저는 죽어도 재수는 못하겠다, 혹시나 떨어지면 대학을 안가겠다, 라고 나름 단호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다시는 입시 준비와 같은 비생산적인 행위에 제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 초조함을 잊기 위해 결과를 기다리는 약 2-3주 동안 읽지 못했던 소설들을 집중적으로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오르지 않은 성적이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문학 작품을 마음대로 읽지 못하는 ‘여유 없음’에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국문과나 문예 창작과를 꿈꾸지도 않았습니다. 소설은 제가 감히 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만난 소설들은 어쩌면 그리도 달콤했던지요. 지금 읽으면 유치하기 그지없는 소설들도 그 당시에는 어찌나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았는지 모릅니다. 한참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인 고등학생 시절에 ‘입시’라는 그물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던 그 암울한 시기. 그 시절을 견뎌낸 모든 친구들에게 지금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런 입시에 찌든 메마른 감성을 지닌 그때, 이 소설 <회색 눈사람>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이 단편소설을 우리나라 단편 소설 중 단연 백미로 꼽고 싶습니다. 소설을 읽자마자 저는 스프링 달린 대학생 노트를 하나 사서 이 소설을 필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필사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 소설의 문체에 반했고, 주인공의 독립성에 매료되었으며, 나아가 가슴 시린 감동을 제 가슴속에 더 남기고 싶어서 한 글자, 한 글자, 노트에 주워 담았습니다. 마치 주인공인 강하원이 이해도 못하는 독일어를 아무런 댓가없이 번역했던 것 처럼말입니다. 대학 시절을 거치며, 제 가슴속에는 늘 강하원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으로 머물더라도 내 자신만은 지켜내자, 라는 소박한 마음. 이 칼럼을 쓰기 위해 20년 전, 그 소설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는데, 아- 그때와는 또 다른 멋과 매력을 지닌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의 20년 전의 그 시기가 조명 속의 무대처럼 환하게 떠올랐다. 그 시기를 연상할 때면 내 머릿속에는 온통 청록색으로 뒤덮인 어두운 구도가 잡힌다. 그렇지만 어두운 구도의 한쪽에 쳐진 창문의 저쪽에서 새어 들어오는 따뜻한 빛이 있는 것도 같다. 그것은 혼란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픔이었다.
딱, 지금의 저에게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접한 것이 위의 인용과 같은 “거의 20년 전의 그 시기”였기 때문이죠. <회색 눈사람>은 과거의 한 시기에 대한 아픔의 기억이자 한 사건과 관련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가슴 시리지만 덤덤한 기록입니다. 모든 회상은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인가요? 이 회상체의 소설은 모두가 춥고 가난했던 시절, 특히 자기 자신밖에 믿을 만 한 사람이 없던 한 여대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시절, 그 시기를 이 주인공인 강하원은 위의 인용과 같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두운 구도의 한쪽에 쳐진 창문의 저쪽에서 새어 들어오는 따뜻한 빛이 있는 것도 같다”고. 이 이야기는 고학으로 고생스러운 대학생활을 하던 ‘젊은이의 초상’이기도 하고, 70년대 암울한 정치 하에서 자유를 찾아 자기 자신을 희생하던 ‘운동권 학생의 후일담’ 이기도 하며,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사랑의 대상에게 연민을 느낀 깨어진 ‘사랑의 파편조각’ 이기도 합니다.
이모의 돈을 훔쳐 대학에 진학하고 어렵게 학교를 다니는 주인공 강하원이 아르바이트로 구한 직장이 바로 인쇄소입니다. 그 인쇄소에서 운동권의 출판물을 만드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동지의식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였으며, 그들이 검거된 후에 자신의 여권을 운동권 동지 중 한명에게 주어 미국으로 가게 만듭니다. 자기 이름으로 도미한 여인의 죽음에 관한 짧은 기사에서 떠올린 그 짧은 삽화는 강하원에게 “일생을 두고 영향을 미치는” 시기가 됩니다.
이 소설이 90년대 우리나라 문학에서 한때 유행했던 ‘운동권 후일담’을 다룬 ‘사상 문학’과 다른, 슬프고 아름다우며, 현실적이면서도 잔잔한 울림을 주는 ‘그 시절’의 이야기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황이나 에피소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난 뒤에 마음을 울리게 만드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잔잔하게 사건을 이야기하고, 덤덤하게 상황을 그려내고, 간명한 단문체로 과장된 독백을 생략한 ‘절제의 미학’이 이 소설이 지닌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덤덤하지만, 강렬한 은유는 제목인 “회색 눈사람”을 묘사하는데서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그런 응달에서 볼이 튼 어린아이들이 재와 흙으로 범벅이 된 회색 는으로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거의 마지막 손질 단계에 있는 우리의 인쇄 책자를 생각했다. 주초에는 그 책에도 눈이 붙여지고 코가 붙여질 것이다. 이상한 흥분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아무 일이나 그리운 것이 아니라, 비록 외곽에서의 잡일이기는 하지만 몇 달 전부터 내가 하기 시작한 바로 그 일을. 바로 그 인쇄소에서,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들과 일하는 것을. 아이들이 눈사람을 다 끝내고 쉰 목소리로 만족의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내 목을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 멋진 나무젓가락 콧수염을 단 회색의 눈사람의 목에 감아주었다. 조개탄을 아껴 써야 했던 어느 저녁, 안이 오버 주머니에서 꺼내 목에 둘러주었던 목도리였다. 다시 한번 터지는 아이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나는 단숨에 언덕을 뛰어올랐다.
흰색 눈사람이 아닌, 회색 눈사람인 것은 바로 연탄재로 더럽고 가난한 ‘산동네의 색깔’이고, 희망도, 그렇다고 절망도 아닌 ‘담담한 마음의 색조’이며, 눈발이 날린 ‘불안한 날들의 암울한 분위기’를 상징합니다. 그런 은유적인 색감인 ‘회색’을 지닌 눈사람에게 주인공인 강하원은 목도리를 벗어줍니다. 이 행동은 한 젊음의 암울한 시대를 벗어나기 위한 통과 의례이면서 동시에 그 시기를 기리는 하나의 ‘제의’와도 같습니다. 작가 최윤은 이 소설을 통해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 가난함 때문에 정서적인 풍요로움을 만끽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한바탕 풀어 놓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이 짧은 소설이 주는 감동, 20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 회색의 정서가 더 분명해 지는 이 소설을 다시 읽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20년전의 그 감동을 가슴에 안은 저는, 다시 한번 스프링 달린 대학생 노트를 꺼냅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한번 필사를 해 봅니다. 이제서야 저는 주인공인 강하원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으로 머물더라도 내 자신만은 지켜낸 그대, 이젠 아무 걱정 말아요, 라고. 주인공이 씌워주었던 따뜻한 목도리의 기온이 고스란히 저에게 전달되는 것 같은 이 느낌. 여러분께도 드리고 싶습니다.
* 이 단편소설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한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 실린 8편의 단편소설 중, 두 번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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