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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21일 18시 33분 등록
차이의 존중, 조나던 색스, 말.글빛냄 출판사, 2007년 8월 , 월간중앙

한 유엔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중 65%는 전화를 걸어 본 적이 없다. 40%의 인류는 전기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인류의 1/3인 20억명은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 가장 부유한 세 사람의 부자가 가지고 있는 부는 빈곤국에 사는 6억명의 재산을 합친 것 보다 많다. 최고 부자 358명의 재산을 합치면 인류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의 재산을 다 모은 것 보다 많다. 부는 세계적으로 편중되어 있다. 새로운 경제는 소수에게만 혜택을 몰아주고 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변변한 일자리조차 마련해 주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강한 자는 더욱 강하게 되었고 약한 자는 더욱 약하게 되었다. 약한 자들의 빈곤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비유하기도 한다. 빈곤을 한 쪽에 두고 그 반대쪽에 다른 모든 고통들을 모은 다음 대저울을 단다고 하더라도 빈곤은 다른 모든 고통을 합한 것 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저자인 조너던 색스가 제기하고 있는 부의 불균형과 관련된 이런 논란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이테크의 경제는 굳이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진보의 어두운 국면까지도 수용할 것이라고 결심한 사람은 없다. 시장경제와 기업은 성장에는 관심이 있지만 분배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류의 성장을 낙관적으로 보아 온 시선이 있었다. 아마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담 스미스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는 지상의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이기심과 잔인함과 탐욕과 야망이라는 악덕들을 주조하여 인류의 행복과 번영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눈부신 통찰을 제공함으로써 이기심과 이타주의의 갈등을 해소해 왔다. 마침내 20세기 말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몰아내고 민주적인 자본주의가 홀로 승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런 극단의 딜레마의 한 복판에 이르게 되었다.

저자는 이제 ‘보이지 않는 손’의 은총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존 폰 노이만의 게임이론 중 가장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 시나리오를 그 상징적 이유의 하나로 들었다. 경찰이 심각한 범죄 용의자 두 명을 체포했지만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다. 경찰은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범죄 사실을 털어 놓게 해야만 한다. 경찰은 두 명의 용의자를 다른 방에 격리 수용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거래를 제안했다. 한 명이 밀고하고 한 명이 침묵하면 밀고자는 자유를 얻고 다른 한명은 10년 형을 받는다. 둘 다 밀고하면 둘 다 5년 형을 받는다. 둘 다 침묵하면 경미한 범죄로 처리되어 1년만 감옥에서 보낸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 두 죄수는 서로 밀고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물론 둘 다 침묵하면 1년 만에 석방이 되겠지만 그들은 서로 상대를 믿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상업주의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건강한 경제적 균형을 만들어 낼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신뢰를 소비하는 메카니즘이지 신뢰를 만들어 내는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인 신뢰를 만들어 내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의무 그리고 합리적 계산보다는 관습과 전통에 기초한 덕목들이다. 결국 이타주의와 도덕성은 철지나 폐기해야할 진부한 유산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살아남기 위해 갖추어야할 필수적인 미덕인 것이다.

다행스럽게 종교는 바로 인간을 상업적 가격으로 보지 않고 그것과는 별개의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보는 시선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종교가 우리를 구해주려면 조건이 있다. 관용을 가지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건 말이다. 종교가 나만이 유일한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생각, 급기야는 나에 동의하지 않으면 틀렸다는 오만에서 벗어 날 때 구원이 된다는 주장이다. 역사를 통틀어 종교적 정체성이 위험한 잔인성으로 분출되어 신의 이름으로 피의 온상이 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문명은 충돌하고, 테러리스트들은 가장 현대적 무기와 방식으로 무장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낡은 배타적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인물들이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강할수록 이방인에 대한 감정은 더 폭력적이고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폭력없이 강력한 소속감을 표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집단이나 ‘국가가 그를 위해 희생을 할 이유를 주는 것은 곧 살인할 이유는 주는 것’과 같다. 당장 한국인들이 탈레반에 납치되었고, 누구도 이런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쉬운 대답은 없고 어려운 짐만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희망이란 단순히 우리가 더 좋은 상황을 기다린다는 낙관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 ‘좋은 상황을 스스로 창조해 낼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말하는 것이다. 희망의 첫 발자국은 우리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른 문화라고 버릴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는 인간 지혜의 총체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현명한 사람인가 ? 바로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는 사람이다. 진리를 모두 아는 사람은 없고 ‘우리 모두가 각자 진리의 일부’이다. 차이를 통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얻게 되고,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서 우리는 함께 완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차이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대신 자신이 더 커지는 법을 배워야’한다. 이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영국의 랍비 학교인 유대인 대학의 총장인 저자는 이 책의 반 이상을 유대교의 교리와 해석에 연결하고 있다. 유대교에 대한 지루한 설명을 참고 읽을 수 있다면 부의 불균형에 대한 종교적 시선을 이해하기에 좋은 책이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 나로서는 온 힘을 다 해 쓴 책’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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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진
2007.08.24 07:41:33 *.138.45.103
차이로 부터 위협을 느끼는 대신 자신이 더 커지는 법을 배워야한다. 오늘 아침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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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9 12:09:36 *.212.217.154

유대교의 교리에 대해 많이 알고있지는 못하지만,

지금 팔래스타인지방에서 벌어지고있는 분쟁의 원인이

이스라엘 건국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요.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이 작가가 이야기하는 차이와 존중의 정신을 진정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서로간의 진정한 이해와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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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8 13:19:52 *.143.63.210

차이의 존중과

보편성의 이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그 차이 안에서 공감대를 찾아낼 때,

우리는 서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겠지요.


바로 남과 북이

오랜 시간을 넘어

서로에게 손 내밀듯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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