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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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써야, 글을 쓰는 것 같다'
김훈 작가는, 연필로 글 씁니다. 지우개 가루가 눈처럼 소복히 쌓인다고 합니다. 지우개 가루를 청소하는 것으로 집필을 마칩니다. 김훈 작가는 컴맹이지만, 연필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몸으로 글을 밀고 나갈때의 그 질감' 이 없으면 한글자도 쓸 수 없습니다.
저는 노트북 컴퓨터가 3대 있습니다. 얼마전 맥북에어를 구입했습니다. 지름신이 강림한 이유도 있지만, 커피숖에서 맥북에어로 글을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맥북에어로 글을 쓰는 내 모습이 좋아보였습니다. 구입후, 며칠은 커피숖에서 '나도 이제 사과 남자'라며 즐겼습니다. 그런데, 얄상한 맥북에어지만 꽤 무겁더군요. 무리하게 들고다닌 나머지 변에 피가 나왔습니다. 이후로 휴대하지 않습니다.
드로잉을 하면서, 손글씨를 써보았습니다. 의외로 맛이 있더군요. 정성껏 손글씨로 노트를 채우자, 충만함을 느꼈습니다. 컴퓨터 글쓰기는 빠릅니다. 하지만, 그 빠름 속에는 날림의 느낌이 있습니다. 글쓰기는 시간이 들어가는 노동인데, 컴퓨터로 글을 쓰면 순식간에 해치워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그렇게 쓰여진 글은 자신과 독자에게 정직하지 못합니다. '복사'와 '붙이기'를 남발하다보니, 대학에서는 손글씨로 레포트를 제출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어느 작가는 글쓸때, 컴퓨터 두대를 씁니다. 한 컴퓨터에는 인터넷 창을 띄어놓고 다른 컴퓨터에 가져다 붙인다고 하더군요. 컴퓨터 글쓰기는, 시간을 들여 사유의 정수를 빚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기성 콘텐츠를 편집, 재조립하는 작업으로 바꾸었습니다.
'의란성 쌍둥이'란 의사 손에 의해 만들어진 쌍둥이 자매라는 뜻입니다. 콘텐츠도 '가져다 붙이기' 덕분에 고만고만한 이야기들만 넘칩니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지겹습니다. 손으로 쓰면, 속도가 느립니다. 느리지만, 정직합니다. 손으로 쓰면, 글쓰기란 짜집기가 아니라, 시간을 들여 하나씩 채워가는 지리멸렬한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겹지만, 그 작품은 오리지널입니다.
초고는 손으로 씁니다. 초고가 기초이며, 정성이 들어간 초고는 망쳐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초고는 걸레' 혹은, '초고는 최대한 빨리'라는 글쓰기 강론을 폅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걸레는 걸레고, 아무리 고쳐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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