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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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7일 09시 1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구본형은 1954년 충남 공주 출생이다. 1991년 한국 IBM에서 경영혁신 팀장으로 IBM 본사의 제안에 응해 아시아 태평양 조직의 경영 진단과 평가를 수행하는 심사관으로 심사팀에 합류했다가 ‘단순한 직장인에서 진정한 직업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를 가졌다. 그 때를 계기로 변화와 혁신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면서, 한 회사의 팀장에서 한국 최고의 ‘변화경영전문가’라는 비전을 가지고, 변화경영 혁신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 후 1998년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출간됨으로써 ‘변화경연전문가’라는 새로운 직업인으로서 타이들을 갖는다. 이 책이 나온 3년 째 되던 해인 2000년 마흔 여섯의 나이로 퇴사하여 1인 기업, ‘구본형 변화경영 연구소’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 곳 연구소에서는 지금까지 60여명의 연구원을 배출하고,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통해 매년 30명 정도의 꿈벗을 배출해 내고 있다.

구본형은 본인 스스로를 인문학과 경영학을 접목시켜 새로운 경영비전을 제시하는 ‘변화경영 사상가’로 불리기를 원한다. 그는 지금껏 13년 동안 17권의 책을 썼다.

‘책을 쓰고 있으니 작가이며, 강연을 하고 있으니 강사,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니 소장’이라 불려질 수 있는 그는 스스로 ‘사람들에게 철학을 주며 선동을 하니, 혁명가요, 사상가로 칭할 수 있지 않겠나!’ 한다. 실제로 그의 많은 저서들은 사람들을 각성하게 하고 선동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 평가

 

구본형의 책들 모두를 읽어 보지는 못했다. 특히나 회사생활과 경영에 관련된 책들은 나의 흥미 밖이라 전혀 읽지 않았다. 그러나 17권의 책 중에 지금은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로 개정 출간된 『나 -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낯선 곳에서의 아침』 ,『 익숙한 것과의 결별』, 『떠남과 만남』, 『사자같이 젊은 놈들』, 을 읽었다. 특히나 그의 책 『떠남과 만남』은 여행기인데, 여행기를 한 번 써보고 싶은 나로서는 관심 있게 읽은 책 중에 하나다.

또한 『나 -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는 내 나이 마흔에 끔찍한 ‘마흔앓이’ 속에 읽었던 책이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두 시간 이상씩 글을 쓴다고 한다. 그는 평범함 속에서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노력으로 지금의 작가의 반열에 올랐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의 최근작 『깊은 인생』이 그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았다. 이 책은 나를 선동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간디가 되었다가, 춤꾼, 마사 그레이엄이 되었다가, 캠벨이 되었다가 구본형이 되었다. 나는 전에는 구본형이 그렇게 나랑 같은 성향인 사람인 줄 몰랐다. 나는 워낙 문학지향적인 사람이라 그랬을 것이다. 구본형은 자기계발서의 대가라는 편견이 나한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서야 그가 나에게 온 것이다. 그전에도 그의 책을 읽었었건만 왜 그때는 그의 철학과 감성이 나에게 오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그의 전작들을 다시 읽어봤다. 첫 책부터 정말 놀라울만한 글발에 인문학적 감성으로 넘쳐나는 글이었는데…… 왜 이제야 그것이 보였을까!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구본형의 첫 번째 책이다. 초판 29쇄라는 엄청난 판매부수를 이룬 이 책은 구본형이 혁명을 할 수 있게 해준 책이라고 한다. 나는 처음 구본형의 책들을 읽게 된 것이 몇 해 전이었으니 명성만 알고 그의 첫 책은 읽지 못했었다. 이번 기회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구본형의 주장대로라면 그는 평범한 사람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첫 책을 읽고 보니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겸손한 표현으로 첫 책이 대박난 것을 그는 운이 좋았다 표현하는데, 첫 책이 이렇게 대박이 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그만큼의 재능이었다. 감히 후배된 자로서, 또한 무지한 자로서 평가를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지만,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그의 첫 책은 평범한 내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그간의 자기계발서류의 책들과는 달리 그가 가지고 있는 인문학적 지식이 넘쳐나는 ‘욕망과 변화’에 대한 주장은 감동적이다. ‘가장 확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법은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구본형은 이미 미래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를 바꾸는 7일간의 여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낯선 곳에서의 아침』은 ‘변화를 주제로 하여 쓰여진 에세이적 자기개혁 입문서’이다. 변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탁월한 에세이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변화는 ‘언제나 현재적이며 바로 지금 일어나야 하는 새로운 균형을 향한 역동적인 조율’이라는 구본형은 ‘살아있는 모든 것은 변화 한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욕망을 되찾는 작업’이 바로 변화의 시작점이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변화의 마지막 목표는 ‘행복한 일상적 삶’이다. 그에게 있어서 개인혁명의 두 가지 목표는 세상에게 원래의 색깔을 돌려주는 것. 즉, 내면의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며, 자발성이다. 이 책은 1999년에 초판되었다.

나는 구본형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가 쓴 몇 권의 책을 나열하는 것은 그의 책들이 그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최고의 선동가, 구본형. 그의 책은 그를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게 만든다.

 

2. 내가 저자라면 

 

ㄱ. 이 책의 목차와 전체적 뼈대

 

‘평범한 삶이 아주 특별한 삶으로 바뀌는 7가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깊은 인생』은 7명의 위인들을 통하여 나를 돌아보는, 나를 반추해 보는 구성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첫 번째는 깨우침이라는 주제로 간디와 마사 그레이엄의 이야기가 나오고, 두 번째 견딤의 주제로는 윈스턴 처칠과 조지프 캠벨, 그리고 바뤼흐 스피노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넘어섬의 주제로는 조주와 아니타 로딕의 이야기이다.

위인의 이야기를 쓰고 그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 그리고 나의 이야기, 이런 삼단 구조를 가지고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깨우침, 견딤, 넘어섬. 이 책을 간단히 말하면 이 세 단어에서 모든 것을 담아 말할 수 있다. 깊은 인생을 살려면 이 세 가지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달리 이 책의 목차와 뼈대에 대해서 논할 것이 뭐가 있을까 싶다.

 

ㄴ. 감동적이었던 장절

7편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단연코 간디 이야기였으며 그 다음은 마사 그레이엄의 이야기였다. 우연이 운명이 되는 이야기.

준비된 자만이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간디의 이야기가 가장 감동적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던가?’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는 평범함 속에서 영웅이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사건이 사람을 이끌고 우연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어떤 우연도 위대한 각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제자가 준비되면 위대한 스승이 나타나듯, 사람이 준비되면 위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 자체로 위대한 스승이나 사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운명이 바뀌기 때문에 그 만남이 위대해지는 것이다. 우연의 얼굴을 가진 필연, 그 사람 자체가 바로 운명임을 홀연 깨닫게 해주는 위대한 떨림은 이렇게 맺어진다.

그 이후 그들은 평범함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이미 하나의 세계를 지나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각성을 거쳤기 때문이다. 한번 고양된 정신은 낮아지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지 않을 때 맞서 싸우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이 만들어주는 대로 사는 평범함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다. 위대함이 평범함 속에서 발아한 것이다. 소명이 그때부터 그들을 이끌기 시작한다. 그들은 크든 작든 하나의 영웅이 되어간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아름다운 별이 된다.(37)

그러나 전체에서 꼽자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가장 좋았다. 모든 작가들이 어느 한 문장에 마음을 쓰지 않을까 싶지만, 책의 첫 문장과 끝 문장이 그래도 가장 마음에 걸릴 것이다. 그렇다고 봤을 때 이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성공적이다.

“시처럼 살고 싶다. 나도 깊은 인생을 살고 싶다.”(11) 는 첫 문장은 가슴을 내려 앉히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대, 이제 가면 한 장 두께의 얕은 복제 인생을 걷어버리고, 모든 잠재력이 스스로의 강물로 흐르는 깊고 푸른 인생을 살자.”(224)는 마지막 문장은 내 가슴을 뛰게 하고 선동했다.

 

ㄷ. 보완점

나의 출처에 대한 호기심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다. 이 책 또한 7편의 위인들의 이야기 출처들이 있을 것인데 그 출처가 밝혀있지 않다. 물론 많은 독자들은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독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간디의 마리츠버그역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간디의 자서전을 보고 요약 각색을 한 것일까? 집에 있는 한길사에서 나온 함석헌 번역의『간디자서전』을 뒤졌다. 예전에 간디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왜 마리츠버그역에 대해 작가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못했을까 생각을 하면서. 내가 읽은 함석헌의 번역서에는 그 사건과 관련하여 “그때 나는 자신의 미래에만 민감한 한 젊고 어설픈 변호사에서 인도인의 권리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생각이 한 차원 도약한 것이다.”(30)와 같은 표현은 없었다.

『깊은 인생』의 마리츠버그역 사건에 대한 간디의 의식전환은 훨씬 극적이다. 간결한 사건의 전개 속에 간디의 의식 변화가 잘 표현되어 있다. 다른 위인들의 에피소드도 마찬가지였다. 작가의 이야기 전개 방식의 탁월함이겠지만, 짧은 이야기 속에 7명의 위인들의 삶이 평범함 속에 어떻게 빛을 내게 되었는지 감명 깊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한 감동을 작가가 어디서 느꼈는지 작가가 읽었던 책들을 공유하고, 같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주나 부록으로, 읽었던 위인들의 책을 밝혀 주었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깊은 인생

 

내가 사하라 사막을 여행할 때였다. 천지가 모래였다. 그때 거대한 캐러밴들이 수백 마리의 낙타 떼 위에 짐을 실고 가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일시에 내 여행의 모든 목적이 충족되는 듯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수십 마리 혹은 수백 마리씩 10킬로나 길게 이어져 나타나는 낙타 떼와 캐러밴은 더 이상 볼거리가 되지 못했다. 경이로움은 평범함으로 바뀌었다. 시시해졌다. 그때 사막의 아름다운 모래 굴곡 사이로 황금빛 사자 한 마리가 보였다. 사자는 조용히 않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한 마리로 족했다. 나는 지칠 줄 모르고 그 사자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름다운 석양이 찾아왔고, 그 사자는 꼬리를 가볍게 철렁이며 지는 해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4)

 

 

|시작하며

 

꽃봉오리가 열리고 보잘것없는 것으로부터 위대한 것이 태어나는 인생의 정점에서, 하나는 둘이 된다. 늘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이 위대한 모습은 대각성을 촉구하며 지금까지의 내게 정면으로 떨쳐 일어난다. -카를 구스타프 융 (5)

 

|프롤로그 시(詩)처럼 산다

 

시처럼 살고 싶다. 나도 깊은 인생을 살고 싶다. 무겁고 진지한 삶이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롭고, 그 바람결 위의 새처럼 가벼운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 내면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깊은 기쁨, 그것으로 충만한 자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울지, 어느 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사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문득 의미를 발견하여 말할 수 없는 헌신으로 열중하고, 평범한 한 여인이 문득 하던 일을 중단하고 내면의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하는 느닷없는 전환은 아름답다. 그것이 삶을 시처럼 사는 것이다.(11)

 

춤을 출 때 나는 어떤 힘이, 그래, 영적인 어떤 힘이 내 안으로 깃드는 것을 느낀다. 그 순간 내 영혼은 더할 나위 없이 고양된다. 나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 별이 되고 달이 된다.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가 하면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 승리자가 되는가 하면 무언가에 정복당한 존재가 된다. 노래하는 존재이자 그가 부르는 노래 자체가 된다. 이해하는 사람이면서 이해받는 자가 되곤 하는 것이다. -- 마이클 잭슨(13)

 

우연이 운명이 되는 이야기는 그동안 문학이 다루어온 흔하고도 멋진 만남의 방식이었듯이, 우리 역시 현실 속에서 운명적 우연을 겪게 된다. 그 우연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 세상에서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홀연 깨닫게 된다. 이런 우연은 거듭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점점 더 높이 뛰어오르게 된다. 우연이 그저 우연으로 끝나고 마는 무수한 버림의 과정을 지나 우연이 운명이 될 때의 조건은 단 하나, ‘바로 때가 무르익어 감이 떨어지듯’ 필연이 되는 것이다.(14)

 

깨우침 깊은 인생으로 들어서는 첫 번째 문

 

깨우침 하나, 우연은 운명을 이끌고

 

마리츠버그 역, 기적의 정차 - 간디

 

처음에는 마리츠버그의 추운 하룻밤이 그저 우연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는 우연이고, 당하면 얼른 잊어야 하는 불쾌한 사건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우연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30)

내가 준비가 되었을 때, 우연은 비로소 필연적 운명이 될 수 있었다.(31)

 

삶의 문턱에서 홀연 각성하라

 

 

모든 우연이 다 필연이 되지는 못한다. 우연은 우연으로 흘러 잊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오직 특별한 우연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주와 공명하고 있다는 일대 각성에 이르게 한다. 그 우연은 이내 우리의 소명이 된다. 우연은 운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연을 해석할 중요한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그 우연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 다시 말해서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멈추어 선다. 마리츠버그 사건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이 강한 일개 사건이었다. 그런 일이 간디에게만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그곳에서는 유색인종이라면 누구나 일등실에 타게 되면 겪어야 할 수모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간디만 그 일을 결코 잊지 못했던 것일까?(33)

 

사건이 사람을 이끌고 우연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어떤 우연도 위대한 각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제자가 준비되면 위대한 스승이 나타나듯, 사람이 준비되면 위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 자체로 위대한 스승이나 사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운명이 바뀌기 때문에 그 만남이 위대해지는 것이다. 우연의 얼굴을 가진 필연, 그 사람 자체가 바로 운명임을 홀연 깨닫게 해주는 위대한 떨림은 이렇게 맺어진다.

그 이후 그들은 평범함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이미 하나의 세계를 지나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각성을 거쳤기 때문이다. 한번 고양된 정신은 낮아지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지 않을 때 맞서 싸우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이 만들어주는 대로 사는 평범함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다. 위대함이 평범함 속에서 발아한 것이다. 소명이 그때부터 그들을 이끌기 시작한다. 그들은 크든 작든 하나의 영웅이 되어간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아름다운 별이 된다.(37)

 

 

누구의 길이 옳은지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어떤 계기로 자신 만의 길을 찾아들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알고 싶은 것이다.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 사람만의 다르마(Dharma), 즉 운명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서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다르마는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우연한 순간을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던 지식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순간 우리는 체험하게 되고, 느끼게 되고,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막연한 지식이 자신 안에서 구체적 체험으로 전환될 때, 우리는 각성하게 된다.(41)

 

 

그늘 체험, 단명한 직장인이 평생의 소명을 찾다

 

 

인생 전체에 걸친 경력의 큰 그림이 그려지다 현업이 전체 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그것은 전체 경력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지 조망해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현업은 시대를 앞서 꿈꾸는 내가 되기 위해서 지금의 나를 모두 바쳐야 하는 수련 과정으로 여겨졌다. 현장에서 관련 업무를 매일 연마할 때 잠재적 능력이 계발되는 것을 실감했다. 운동선수나 연주자가 염격한 수련 계획에 따라 연습하고 콘테스트를 통해 그동안 이룬 성과를 겨루어보듯이, 나도 스스로의 자율적인 수련 계획에 따라 현장에서 매일 나를 실험해보았다. 이것이야말로 ‘훈련을 실전처럼, 실전을 훈련처럼’ 치러내는 힘을 키워냈다.(46)

 

 

깨우침 둘 야생의 재능이 나를 부를 때

 

춤추는 여신과의 마주침 - 마사 그레이엄

 

 

그날은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다. 그날은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내 몸이 그 찰나에 반응했고,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마치 신이 내 몸에 내린 듯했다. 그 순간이 나를 그 손아귀에 꼭 움켜쥐었다.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아, 두 개의 눈동자가 도중에서 딱 마주친 것 같은 전율, 순식간에 마법에 빠져 어쩔 수 없는 상황, 내게 그 순간은 바로 그러했다.(51)

 

그 순간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 열일곱의 나이에 나는 내가 평생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이 얼마나 분명하고 명료한 순간이었는지 너무도 확연하게 알고 있다. 온 우주가 공명하듯 내게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번개처럼 분명한 섬광이고,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계시였다. 그동안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 춤을 보는 순간 내 속에 감추어져 있던 가장 나다운 것들이 요동을 쳤다.(52-53)

 

 

내 분야를 이렇게 빨리 터득할 수 있고, 이것을 하면 지칠 줄 모르고, 누구보다 열심히 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춤꾼이라는 것을 입중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나는 빛났다. 그리고 기회가 내게 몰려들었다.(55)

 

피할 수 없는 나의 길을 걸어라

 

꿈은 현재라는 점이 하나의 선으로 일렁이며 미래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화폭을 모험이라는 위대한 긴장의 울림으로 가득하게 만든다. 천복에 이르는 없을 찾을 때는 재능을 나침반으로 삼아야 한다.(58)

 

리더십이란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사람을 통솔하거나 다루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타고난 재능이 적절한 사회 문화적 조건 속에서 연습되고 다듬어진 훈련된 능력’이다(61)

 

“예술가의 천재성이란 의지로 되찾은 유년기, 이제는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어른의 육체적 능력을 갖춘 유년기, 그리고 무의 지적으로 축적된 경험의 총합에 질서를 부여하는 분석적인 능력을 갖춘 유년기.”(62)

 

보들레르는 아이를 예술가로 본 것이 아니라 아이의 눈을 가진 어른이 예술가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니 천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천재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63)

 

성공은 재능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태어났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카드 게임과 같다. 패는 주어지는 것이다. 좋은 패도 있고 나쁜 패도 있다.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카드 게임에 참가한 플레이어로 주어진 패를 가지고 이기기 위해서, 혹은 즐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재능은 주어진 대로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그러나 받은 재능을 다 쓰고 가야 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그리고 위대함이란 받은 탤런트의 크기가 얼마나 되었든 받은 만큼 다 쓰고 갚 때 찾아온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는 이것을 아주 멋지게 표현했다.

“성공한 사람은 천재가 아니다. 평범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평범함을 비범하게 발전시킨 사람이다.”

평범함이란 없다. 그것은 아직 속에 있는 것이 개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것이 터져 나올 때 누구나 비범함으로 도약할 수 있다.(63-64)

 

두 번째 인생, 다시 일어나 글을 쓰다

 

단테의 《신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의 중반에서

나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었네.(65)

큰 소리로 읽어본다. 낯선 언어가 어눌하게 입 안에서 맴돌다 띄엄띄엄 쏟아진다. 나는 여러 번 읽어본다. 점점 익숙해진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국적 풍취 속에서 단테가 살아난다. 나는 이탈리아어를 모른다. 그러나 그 억양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이다. 그리하여 단테의 《신곡》첫 행은 내 인생 최초의 이탈리아어가 되었다.(66)

 

인생의 갈림길에서 나는 늘 차선책을 선택했다. 밥이라는 절체절명 앞에서 나는 늘 현실을 선택했던 것 같다. 한 달의 단식, 그것은 밥에 매이지 않고 세상을 한번 마음먹은 대로 살아보고 싶어 시작한 나의 성전이었다. 포도만 먹는 단식이 일주일째로 접어들었다. 그날 새벽 4시에 나는 눈을 떴다. 왜 그 때 눈이 떠졌을까? 아마 배가 고파서였을 것이다.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여름 새벽을 아무 생각 없이 뒤척였다. 여름 태양이 떠오르고 내가 누운 방 안으로 햇살이 기어들었다. 점점 방 안으로 들어와 내가 누운 곳을 비추고 이윽고 나를 넘어 지나갔다. 그때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이 빛나는 난 내게는 오늘을 마음대로 할 자유가 주어졌으나 나는 오늘을 보낼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나의 하루가 속절없이 흘러가겠구나, 그렇게 내 인생도 가뭇없이 사라지련만 나는 인생의 절반 지점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이렇게 환한 낮이 밝아오는데 시체처럼 밤 안에 누워만 있구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 때 마음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글을 써라. 너는 글을 써보고 싶지 않았느냐?’ 내 속에서 무언가가 소리쳤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일어나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가 마흔세 살이었다. 그전까지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언젠가 변화에 대한 책을 꼭 한권 쓰고 싶다는 바람이 여러 해 동안 있었으나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6개월이 지나서 나는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 책이 바로《익숙한 것과의 결별》 이다. 그 책은 운이 좋았다. 그 책 덕에 나는 1990년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날 그 아침이 내 인생의 분기점이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날이 바로 내게는 마사 그레이엄이 루스 세인트 데니스의 포스터를 본 날이고, 그녀의 춤을 격정 속에서 관람한 날이기도 하다. 그때 내 마음속에 깊이 감추어져 한 번도 훈련받지 못한 야생의 재능이 온 힘을 다해 외치고 있었고, 다행이 나의 의식이 그 외침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날이 단테에게는 《신곡》의 첫 문장을 시작한 날이었을 것이다. 본인에게는 너무도 확실하고 너무도 분명한 인생의 분기점에서, 나는 재능이 내게 보낸 메시지를 정확히 수신했다. 그 여름의 그 햇빛, 그 눈물, 그 기쁨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느끼고 들을 수 있다. 내게는 너무도 선명한 기억이므로, 감춰져 있고, 한 번도 제대로 쓰인 적이 없는 그 평범한 재능이 세상에 외친 그날 새벽,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67-68)

 

나는 새벽에 글을 쓴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새벽은 혼자 있기 좋은 시간이다. 새벽은 명징하지만 나는 새벽에 늘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그것을 믿는 훈련을 한다. 글은 그런 사고의 표현들이다. 글과 나 사이는 종이와 펜 같은 관계다. 종이는 펜이 흘러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글도 내가 흘러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글도 내가 흘러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내게 글은 강과 같다. 나는 새벽에 작은 보트 하나로 그 강을 따라 내려간다. 아무도 없다. 혼자이기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다. 나는 두려워진다. 동시에 세속에서 배웠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는 새로워지는 경험을 한다.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다. 이때 나는 혼자이기에 내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꼭 옆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혼자이기에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소리를 들으려 한다. 의식이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동안 온갖 것을 창조해낸다. 새로운 것들이 강물 속에서나 강가의 나무와 풀숲에서 두 눈을 반짝이고, 물고기가 한 마리 물 위로 튀어 오르기도 한다. 이때 나는 내 무의식과 만난다.(69)

 

견딤 깊은 인생으로 들어서는 두 번째 문

 

 

견딤 하나 끈질기게 삶에 달라붙다

 

사라진 영웅, 다시 살아나다 - 윈스턴 처칠

 

나는 세상을 감동시키고 싶었다. 그것이 삶의 단 한 가지 목표였다. ‘나라는 사람, 나의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표현하는 나’는 삼위일체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나는 서사시처럼 살았고, 그래서 나의 업적만큼이나 나의 실수와 약점도 그만큼 크다. 그들은 쩨쩨하고 이기적인 내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 전쟁으로 얼룩진 나의 삶, 나는 어떤 경우에도 삶에서 물러난 적이 없다. 삶에 대한 뱃심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사자나 불도그로 묘사했다. 내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패배하리라는 생각을 버렸다.(77)

 

미래는 보는 예지력의 소유자들은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래된 것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동료의 압력이나 다수의 의견에 굴복하지 않는다. 마음이 미리 본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지력 하나만 가지고는 힘을 쓸수 없다. 진실이되 누구도 듣지 않는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비극적인 것이 또 있겠는가! 예지력이 제대로 된 힘으로 작동하려면 미리 본 것을 지켜갈 수 있는 불굴의 용기와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포기하는 순간 예지력은 무력해진다.(81)

 

 

냉소는 결코 업적을 남길 수 없다

 

위대함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미래의 경영에 성공하는 것이다. 예지력은 현재나 미래를 마치 지나간 과거처럼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를 잘 볼 수 있는 자는 과거를 잘 아는 자다. 선견지명에 이르는 그 신비의 원천은 신의 선물이라 보기보다는 오히려 근면과 노력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예지력이 뛰어난 인물들은 현재를 이해하기 전에 과거를 연구했고,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사건들의 본질을 파악했다. 그들은 현재를 바꿀 방법을 강구하기 전에 그들이 처한 현재의 상황과 여기까지 이른 경로를 면밀히 탐구하여 알고 있었다. 미래를 꿰둟어본다면 그것을 천재적 통찰이라고 부르고 싶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천재의 징표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좀 더 보편적이다. 쉽게 보이지 않는 패턴과 동기, 그럴 수밖에 없는 필요성, 기회와 전조가 되는 사건과 행동들을 파악하기 위한 힘겨운 탐구의 결과가 바로 예지력의 정체인 것이다.(88)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면 발명의 아버지는 고집이다. 적당히 단념하고 손쉽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보다 불리한 역경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진보의 역설적 진리다. 혹독한 추위와 이변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울창한 숲이 말라죽은 상태가 되었을 때 ‘달아난 원시인들’은 자연의 지배를 가장 심하게 받았을 뿐 아니라 자연을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난관을 뚫고 인간이 된 것은 이미 그 밑에 앉을 나무조차 없어진 그 자리에 버티고 있던 무리들이며, 나무 열매가 익지 않자 짐승을 잡아 고기를 먹은 무리들이며, 나무 열매가 익지 않자 짐승을 잡아 고기를 먹을 무리들이며, 햇볕을 쫒아 이동하는 대신 불과 의복을 만든 무리들이며, 거처의 방이 벽을 국축하고 아이들을 훈련시켜 세계의 비합리성에 합리성을 입증한 무리들이었다.(89)

 

위대한 업적은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기 전에 한 사람의 정신 속에 하나의 생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신은 언제나 먼저 본다. 업적은 정신이 먼저 본 것을 불굴의 의지로 실천할 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정신이 본 것을 비웃는 냉소는 결코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90)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하고 싶은 일을 나의 방식으로 펼쳐가면서 일이 취미이며 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93)

 

나는 늘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내게 적용해보았고, 내게 적용하여 성공한 프로그램만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했다 나는 내 생각의 실험장이었고, 내가 만든 백신의 최초 접종자였다.(96)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웃음과 유머 감각이 우리를 생활고에서 구해준다. 고생은 앞으로 언젠가의 영광을 빛내주는 어두운 배경이고, 빈곤은 내가 물질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이 커져가도록 만들었다.(104)

 

우드스턱 시절의 일들은 잊히지 않는다. 나는 괴테의 걸작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시대》를 읽으며 삶의 이런저런 일들과 맞닥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삶에는 고정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그 무엇도 당연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우연히 내 눈에 띄었다. 놀라운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한 예로 내가 카멜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손을 뻗어 책을 한권 골랐는데, 그 책이 내 인생을 바꾸게 되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어떻게 그런 우연이 생겨난단 말인가? 내 방랑은 코를 끙끙거리며 내가 정착하여 뿌리 내릴 곳을 냄새 맡으려는 시도였다.(104-105)

 

 

방랑과 침묵의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이와 비슷한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라고만 말해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관심사여야 한다. 진짜다.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그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말로 ‘그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영웅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바꾸려고 하기 전에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임무를 실행해야 한다. 그러니 스스로 계획해두었던 삶을 기꺼이 내팽개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변화를 원하는 마음의 근저에는 편함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끝과 화해할 수 있는 사람이 영웅이다. 무덤을 두려워하면 진정한 영웅이 아니다. 그렇게 보면 승리는 좋은 것이다. 그러니 패배도 나쁠 것이 없다. 모두 끝이 있고 그 끝에서 변화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다가오듯 모든 끝은 끝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다가오듯 모든 끝은 끝에서 만나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뚝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삶을 체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을 모두 경험하는 것이다. 의미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여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삶의 체험, 그 떨림만이 살아 있음의 증거다. 그러니 이 세상, 삶이 이루어지는 이곳이야말로 내가 있을 곳이다. 단명한 삶의 비극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자세인 것이다. 이 세상이야말로 우리의 짝이며, 우리 역시 이 세상의 짝이다.(105-106)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들은 방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대책 없는 기이한 삶이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랑을 하는 동안 나는 신비할 만큼 유기적인 우연을 즐기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았다. 나뭇가지 하나가 어느 날 한쪽에서 삐죽이 나오고, 다음에는 다른 쪽에서 나와 자라게 된다. 제멋대로 내버려두어도 나무는 훌륭하고 아름답게 자란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살다 보면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된다. 자신의 에너지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빠져들어 지낼 일이다.(107)

 

이제 우리는 천재성과 통찰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천재들의 활동으로 알려진 위대한 성과의 비밀은 타고난 천재성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의 10년이라는 땀의 계곡을 행진해온 결과인 것이다. 모차르트나 타이거 우즈 모두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은 특별 수혜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라는 우연에 의해 특별한 분야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계속되는 훈련을 견뎌냈다. 우리는 보통 이것을 ‘침묵의 10’년이라고 부른다. 적어도 이 정도의 긴 기간 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땀의 시간을 보내야 그럴듯한 창조적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다. 최근에 이것은 ‘1만 시간의 법칙’으로 불리고 있다. 1만 시간을 채우기 위해 매일 좀 더 많은 시간을 훈련에 쏟는다면 10년이 채 걸리지 않아서도 전문가로 우뚝 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아졌다. 캠벨의 사례에서도 그의 방황은 우드스틱 5년으로 채워졌지만, 그는 5년 동안 1만 시간 이상의 땀을 집중적으로 쏟았기 때문에 ‘모든 기초 작업’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침묵의 10년이든, 1만 시간의 법칙이든 메시지는 분명하다. 긴 시간 정교한 훈련 계획을 따라 연습하고 연습하라는 뜻이다. 천재성과 비범한 통찰력은 이 긴 시간 동안 한 분야에 쌓인 방대한 지식이라는 토양 위에서만 작동한다.(111-112)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오케스트라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세상이 안다.”(114)

 

평범함에서 위대함으로의 도약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실천적 비법을 꼽으라면 그것은 매일하는 훈련이다. 김연아는 한 인터뷰에서 “동작 하나를 익히기 위해 1만 번을 연습한다.”라고 말한다. 그것이 김연아만의 대답이겠는가? 매일 할 때 그 기술이 늘어 기예가 되고, 어느덧 그 사람과 떨어질 수 없는 한 몸, 한 영혼이 된다. 이때 ‘춤추는 사람은 사라지고 춤만 남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화가는 사라지고 그림만 남고, 글쓰는 작가는 사라지고 글만 남는 경지는 매일의 훈련이 주는 기막힌 선물이다.

그러므로 훈련의 첫째 요소는 반복이다. 반복, 반복, 오직 반복, 대가가 되는 유일한 실천의 비법이다. 매일 훈련한다는 것은 결정적이 과정이지만, 그 훈련이 억지로 강압적으로 노예처럼 하는 것은 아니다. 깊어질수록 스스로 즐거움이 된다. 재능과 잘 일치된 훈련은 다른 것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몰입과 황홀함을 동반하게 되어 있다. 훈련은 땀이므로 노력이 수반되지만, 매일 하는 습관이므로 고통이 아니라 일상이다.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만이 느끼는 천복을 쫒는 숙명의 기쁨이 있다. 그것은 처음에는 강제된 훈련이지만 점차 육화되고 기예가 되고, 이윽고 행위자는 사라지고 그 행위만 남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때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삶의 정체성을 이루게 된다.(114-115)

 

 

훈련의 두 번째 요소는 창조성이다. 반복하되 단순히 반복하지 않는다. 훈련 역시 창의적 진화를 하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불현듯 무엇을 어떻게 반복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115)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도약을 위해 수천 번의 도약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 무용수들이다. 어떤 분야가 되었든 그 분야의 대가가 되려면 자연스러움과 간결함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 바로 이 경지에 다다르려면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세월을 견디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고통에 기쁘게 다가서려는 마음만이 이 길을 걷게 한다.(117)

 

과거와 싸우지 마라. 먼저 과거의 유산을 상속받으라. 부끄러움 없이 훔쳐 모방하고 반복하여 먼저 과거의 정점에 서도록 해라. 미래의 풍경은 그 산 너머에 있다. 그러니 매일 걸어라. 매일의 힘만이 꿈으로 인도하는 단 하나의 믿음직한 주술이다. 명심하라. 평범한 자가 비범한 자를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 분야를 정하고 들이파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도 그 분야에 대해서는 너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니. 침묵의 10년을 보내라. 고독한 10년. 궁핍한 10년을 보내라. 누구든 우드스턱의 시대를 거쳐야 한다.(121)

 

미움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단점과 두려움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미움을 사랑으로 쫒아버리려고 애썼다. 그러자 기쁨과 확신이 찾아왔다. 정신은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너그러움에 의해 정복된다. 나는 언덕 위의 빛 속에 서 있는 듯했다.(128)

 

신의 관점에서 보면 미래란 과거와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미래에 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나게 마련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반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128)

 

미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변경되지 않도록 이미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과 공포는 둘 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생각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지혜의 결핍에 의해 생겨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희망에 속지 말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자유로운 인간은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을 통해 지혜를 얻어야 한다.(129)

 

“비록 내가 자연적 오성으로 수집한 결과가 진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불만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게는 그 자체가 유쾌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나날은 탄식과 슬픔 속에서가 아니라 평화와 밝음과 환희 속에서 지나가고 있다.”(130)

 

차라투스트라는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고향과 고향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10년 동안 산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정신세계와 고독을 즐기느라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변화가 왔다. 붉게 물든 동녘 하늘을 보며 일어난 어느 날 아침, 그는 태양을 보며 말했다.

“위대한 태양이여,…… 매일 당신을 기다렸고, 당신에게서 넘쳐나는 것을 받았고, 감사와 축복을 보냈다. 나는 나의 넘치는 지혜에 싫증이 났다.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처럼. 이젠 도움을 달라는 손길이 필요하다. 나의 모든 지혜를 나누고 싶다. …… 그리하여 나는 저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136)

 

언젠가 많은 것을 가르쳐야 할 이는 많은 것을 가슴속에 말없이 쌓아둔다. 언젠가 번개에 불을 켜야 할 사람은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아야 한다.(137)

 

과거는 더는 내게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 나 자신을 베낄 바에야 차라리 다른 사람을 모방하겠다. 그러면 적어도 새로운 면을 추가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난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화가란 결국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소장품에서 본 그림을 그려서 자신의 소장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수집가 아니겠는가? 시작은 이렇게 하더라도 여기서 색다른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140)

 

세상의 생각 대신 자신의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고독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외로움이란 바로 자신의 생각에 빠져들고 세상에 이미 알려진 상식적 삶에 질문을 퍼붓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은 고독을 만들고, 고독은 철학을 가짐으로써 위대한 생각으로 나아간다. 사람들은 늘 투덜거린다. 철학자가 쓴 책처럼 어이없는 것은 없고, 쓸데없는 기우로 가득하고, 만족을 모르는 생각은 극단까지 가려 하고, 무지처럼 모호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과학은 늘 전진하는 것처럼 보이고, 철학은 언제나 쇠퇴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의 탓이 아니다. 철학은 여전히 과학으로 대답할 수 없는 것들, 즉 질서와 자유, 선과 악, 삶과 죽음, 사람과 미움 같은 것들을 잔뜩 껴안고 ‘숭고한 불만과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에서 발을 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아 일상의 필요와 성공으로부터 무수히 얻어터지지만 굴복하지 않는 정신으로 빛난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알게 된다. 철학에서 멀어지면 삶은 먹고 과시하는 저잣거리의 인생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철학이 없으면 우리는 삶이라는 위대함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윌리엄 듀랜트는 《철학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존의 조잡한 필요에 의해 사상의 언덕에서 경제적 투쟁과 획득의 시장으로 질질 끌려 내려올 때까지’ 철학은 얼마나 매력이었는가!

철학이 없는 뛰어난 인물은 없다. 왜냐하면 철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어느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카를 야스퍼스의 말은 옳다. ‘철학이란 도중에 있는 것이며, 질문은 대답보다 중요하며, 모든 대답은 새로운 질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생활 속에 있다. 그러므로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철학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철학을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내적인 대화이기 때문에 플라톤과 헤겔의 책을 뒤적이지 않아도 좋다. 세상은 질문을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삶은 질문 없이는 살 수 없다. 철학은 바로 삶에 대한 질문이다. 철학이 삶에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세속적으로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가야 할 길 앞에서 멈추어 서게 하거나, 편하고 검증된 길을 마다하고 길 없는 벌판을 헤매게 하기도 한다. 초인은 안전제일을 미워하며, 먼 여행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위험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을 싫어하며, 평범한 군중의 일부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한 세기에서 2년이 모자라는 생애를 샅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자서전에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고 썼다.

어느 날 새로운 생각이 스며들고, 어는 순간 그들은 그 생각을 옹호하고 따르고 실천한다. 새로운 생각은 생전에 세상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행운을 얻기도 하지만, 죽을 때까지 배척받다가 의로운 죽음 이후에 그 위대함을 인정받기도 한다. 세상의 중심을 벗어나 그 시대의 경계를 넓히는 생각, 세상 너머에 있는 생각, 표면의 내부에 존재하는 심연의 생각은 종종 광기로 인식되었고, 그들은 정상적인 논리로 자신들의 광기 어린 생각을 변호하기도 했다. 위대함의 결정적 증거는 ‘새로운 생각의 힘’이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었다. 그것은 단순한 아이디어를 넘어 하나의 믿음의 체계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철학이라 부른다.

생각이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그러나 생각이 우리를 위대하게 한다. 이 세상에 성공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철학이 없으면 결코 위대해질 수 없다. 성공했으나 천박한 자는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평범함을 넘어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따른 사람들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볼 수 있는 제 세상 하나를 가진 자, 그들이 바로 평범함을 넘어 자신을 창조한 인물이다.(142-145)

 

나는 변화경영사상가다. 글을 쓰니 작가고, 강연을 하니 강연가지만, 이것에 굳이 직업적 의미를 두면 혁명가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잠재력의 운무 속에 잔뜩 가려진 위대한 자신을 발견하라고 선동하기 때문이다. 살고 싶은 대로 사랑보라고 외쳐대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장 큰 죄는 인생을 낭비한 죄라고 압박하기 때문이다. 혁명가는 본질적으로 선동가일 수밖에 없다.

혁명가는 가슴에 불가능한 것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나 역시 매일 꿈꾸는 법을 훈련한다. 불가능한 꿈을 꿀수록, 매일 그 불가능을 믿는 훈련을 통해 정신 근육은 단련된다. 불가능한 일을 믿을 수 없다고?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대한 일 중 어느 하나도 한때 불가능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누군가 꿈을 꾸고 목표를 정하는 순간 그것은 현실의 세계로 이끌려 왔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자. 매일 꿈꾸는 연습을 하자. 아침밥을 먹기 전 불가능한 일 하나씩을 믿어보자.’ 이것이 내가 매일 새벽에 하는 일이다. 이것은 곧바로 내가 글을 쓰는 행위로 이어진다.

나는 새벽에 꾼 꿈들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아마 70퍼센트 정도는 미쳐 있는 상태에서 하루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의 태양이 떠오르는 동안 잠재력이라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새벽 강을 따라 흐르며 꿈꾸었던 것들은 정체를 드러낸다. 현실의 빛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는 환영들을 본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거대한 성채 하나가 여전히 있다. 나는 안도한다. ‘저것이 나의 제국이다.’ 매일 같은 꿈을 꾸고 또 새로운 꿈을 더 해갔기에 이 반복된 축조의 노력에 의해 햇빛 속에서도 내 상상의 산물은 여전히 굳건하다. 매일 조금씩 명료한 실루엣을 가지기 시작한다.

새벽의 축조물인 나의 책들은 현실로 탄생하지만, 그 속의 내용들은 꿈들이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꿈들. 나는 그것이 또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는 알게 되었다. 믿음의 체계가 곧 현실인 것이다. 가슴속 깊은 곳의 믿음을 바꾸는 순간 나의 인생도 바뀌었다. 인생은 믿음이 자신을 구현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완성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 그 자체가 삶의 목표다. 그러므로 멈추어 서는 순간 더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늘 살아 있음. 이것이 삶을 시처럼 사는 것이다. 시는 황홀로 쓰이는 것이니, 이때 마음속에서 신을 만나게 된다. 나는 늘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나는 나를 혁명한다.’라는 선동이 오랫동안 내 안에서 조금씩 자라 나무가 되었다. 이 나무는 점점 더 자라 울창해졌고, 그 안에 아름다운 것들을 품게 되었다. 풍성한 잎사귀들 틈으로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품어내고, 붉은 열매를 맺고, 황홀한 단풍으로 물들기도 한다. 내 안에 키운 내 나무,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

‘나를 혁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름답게 묘사한 글이 있다. 헬가 쾨니히스도르프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작가의 동화 속에 <어린 왕자와 나무 빛깔 눈을 가진 소녀>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는데, 나는 이 아름다운 장면을 내 심상의 하나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늘 반복하여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다. 눈을 감고 이 영상을 느껴보라.

어린 왕자는 기쁘지 않으면 장미까지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풀밭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는 거미줄에 둘러싸인 나뭇잎 속에 매달려 있는 번데기를 보았다. 무언가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번데기에 금이 가고 조그만 다리 하나가 나왔다 그리고 검은 머리가 보였다. 비틀거리며 나비 한 마리가 바깥으로 몸을 내밀었다. 아직은 형편없이 구겨진 모습이었다.

“안녕” 어린 왕자가 말했다

“잠깐만” 자신의 흉한 모습이 드러나자 고통스러워하며 나비가 대답했다.

나비는 태양을 행해 버둥대며 앞발로 날개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날개를 천천히 펼쳤다. 그 날개는 붉은 띠 하나와 하얀 반점들이 군데군데 찍혀 있는 검은 벨벳 같았다. 나비는 여유롭게 몸을 닦고 윤을 냈다. 그리고 날개를 수평으로 내리기도 하고 태양을 행해 세우기도 했다.

“안녕.” 마침내 정신을 차린 나비가 말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 어린 왕자가 소리쳤다. “그 우중충한 껍질 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 들어 있다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누구나 자신을 개발해야 행.” 나비는 이렇게 속삭이며 기울고 있는 석양빛 속으로 나풀거리며 날아들어 갔다.

이것이 내가 이루려는 혁명이다. 나는 이 장면을 마음속에 품어두었다. 나의 내면에도 방기되고 마비된 많은 것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흉하고 초라한 것 속에 구겨져 있는 나비, 때가 되어 껍데기를 벗으리라. 나의 혁명에 성공하리라. 그리고 파란 하늘을 날게 되리라. 이것은 얼마나 멋진 푸른 혁명이냐!

사람은 자신이 꿈꿔내지 못한 것을 이루어낼 수 없다. 나비 혁명이 가능하려면 내 안에 이미 가지고 있는 내면의 힘을 응시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탐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세상이 요구하는 함성에 귀 기울인다. 세상이 돈 돈 돈 하면 돈을 따르고, 모두 명품을 찾으면 명품이 자신을 대신하는 정체성이 되고 만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함께 원하여 가지게 되더라도 그것이 ‘나의 나비’가 되는 법은 결코 없다.

나는 작가라는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불가능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 혁명을 이루게 하는 것은 실천이기 때문이다. 실천은 곧 시간이 누적적으로 쌓인 것이다. 나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쓴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매년 한 권의 책을 낼 수 있는 힘은 여기에 있다. 매일이 모여 인생이 되고, 나는 수십권의 책을 쓴 작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루의 경영에 실패하면, 화가가 손을 뗀 그리다 만 그림처럼 꿈은 초라해진다. 한 줄기 무상의 바람이 불고 이내 꿈은 추억이 된다. 꿈은 흔적만 남아 미련이 되고 몸은 하루의 밥벌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불행하다. 그리고 그 불행은 페스트처럼 직장을 휩쓴다. 나를 혁명하자. 어떤 나이든 그 나이는 혁명하기 더 없이 좋은 나이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외롭다. 자신의 꿈을 세상에 외치기 때문이다. 나는 경영인도 아니고 경영학자도 아니다. 나는 그들의 무리에 끼지 않는다. 나는 문인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다, 그렇다고 철학자도 아니다. 나는 어디에도 분류되어 끼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골목길을 발견했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곳, 그 길이 아무리 좁아도 내 길이라는 것, 고독이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경쟁하지 않는다. 싸움이 내 장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쟁은 없지만 수요는 많은 곳을 나의 촉수는 감지한다. 나는 늘 푸른 바다를 찾아 나섰고, 그래서 나의 항해는 늘 혼자였다.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그래도 내가 약간 지나치게 진지해 보이거나 비장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도, 1인 기업가도 태생적으로 외로운 존재 방식이다. 1인 기업가이며 작가가 되어 살기 시작할 때 나는 이 고독을 견딜 수 있도록 세 가지 행동철학을 세워두었다. 10년째 나는 이 철학에 의지해 내 길을 걸어왔다. 첫째는 이제 더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오직 나의 명령에 따라 산다. 나는 작더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제국을 원한다. 두 번째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의 양을 늘리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을 늘림으로써 자유의 양을 늘리는 것이다. 자유의 양이 많아질 때만 진정한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 번째는 본업을 통해 세상의 밝음에 기여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응원하는 일을 한다. 이것이 나의 기쁨이 되었다.

결국 나의 철학은 자유를 옹호한다. 내 인생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야겠다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비위를 맞추고 사느니 차라리 내 마음대로 사는 고독을 택해도 좋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나 스스로 가족이 먹을 것을 벌고, 스스로 선택한 천직으로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드는 일에 기쁘게 참여하는 것,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146-152)

 

 

넘어섬 하나, 천둥 같은 스승을 얻다.

 

문틈으로 건네진 열쇠- 조주

“도가 무엇입니까?”

“평상심이다. 그것이 도다.”

“어떤 방법으로 거기에 이를 수 있습니까?”

“그곳에 이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빗나가는 것이다.”

“그곳에 가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어떻게 그곳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도라는 것은 알고 모르는 문제가 아니다. 안다는 것은 그저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고, 모른다는 것은 그저 혼란일 뿐이다. 네가 아무 의심도 없이 도를 깨쳐 안다면 너의 눈은 높은 하늘과 같아 한계와 장애를 벗어나 일체를 보게 될 것이다.”

스승은 어떻게 도에 이르는지는 설명하지 않으셨다 다만 도에 이른 다음의 경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말을 나를 깨우쳤다. 나는 그때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계를 받고 중이 되었다.(160-161)

 

스승은 제자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많은 역할을 수행하지만, 스스로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제자가 스스로 안에서 깨우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163)

 

스승과 나는 늘 과녁을 매끄럽게 비껴갔지만, 우리는 모두 이해하고 박수치고 늘 웃었다. 모든 심각한 자야말로 바보인 것이다. 스승은 도란 ‘평상심’이며, “사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사물을 떠나서는 도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오늘 이 스승이 보고 싶다. 스승이 없었다면 또 오늘 어찌 내가 있으랴.(164)

 

 

같은 밧줄에 몸을 묶고 산을 오르다.

 

예술가에게는 고독의 쓰라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누군가와 그 고독을 나누어 세계의 일원이 되는 친밀한 격려와 이해의 시간도 꼭 필요하다.(170)

 

 

사람은 사람을 통해 성숙한다. 그 관계가 스승과 제자든, 선배와 후배든, 예술가와 후원자든, 아니면 서로를 이해하는 동료든 사람은 사람을 통해 영향을 받게 된다. 때때로 누군가의 인생에 한 사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고 압도적일 때가 있다. 이때 그 사람은 진정한 스승의 역할을 해주게 된다. 중국 명나라 시대의 이탁오라는 학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친구가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그렇다. 사람은 이렇게 서로 연루되고 결합되면서 자신의 삶의 도약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될 수 밖에 없다. 만일 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줄 그 누군가를 얻지 못한다면, 비록 재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고독은 그저 극도의 고독으로 끝나거나, 내부와 외부가 갈등하는 파괴적 불화나 구제 불능의 미숙으로 그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람을 얻어 진정한 관계 속에 놓이게 될 때, 결정적 지지와 도움으로 새로운 세계로 건너뛸 수 있게 된다.(171-172)

 

“보통의 선생은 그저 말을 하고, 좋은 선생은 설명을 해주고, 훌륭한 선생인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영감을 준다.”는 말이 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학자의 모범을 보았고, 어두운 길 위에 뿌려진 달빛 같은 영감을 받았다. 내가 선생님을 만나 것은 행운이었다.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나도 선생님처럼 누군가의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184-185)

 

넘어섬 둘, 나를 넘어 세계에 접속하다.

 

따지고 보면 모든 성공의 요인은 사실 내게 돈이 없었다는 점이다. 돈이 없고 배가 고프면 창의력이 생긴다. 노력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으면 생각하지도 않고 추진력도 생기지 않는다. 다른 성공한 기업가들처럼 궁핍이 나를 생각하게 했다. 나는 아웃사이더였다. 이민자의 노동 윤리를 가진 아웃사이더였기에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일을 할 때 화가나 작가와 같은 열정이 나를 휩싸고 지나갔다. 나는 궁핍으로 인해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믿었으며, 그것을 실현하고 그것으로 먹고 살고 그것으로 이익을 내기를 바랐다. 보디숍은 내 손으로 만든 내 자식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내가 되었다.(194)

 

비즈니스란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기업이 할 일은 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개인의 욕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공익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이익을 내지 못하면 기업은 망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이익을 더 내기 위해 비즈니스를 한다면 그 역시 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더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진정한 글로벌 비전을 가진 기업가라면 지리적 확장과 점령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확장에 더 기여해야 한다. 나는 기업이 제품을 생산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이란 직원이 자신의 잠재력과 인간 정신을 훈련하고 계발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기업은 그 자신과 구성원, 그리고 인류를 위해 완전함에 기여해야 한다. 인생에 영적 차원이 있듯이 비즈니스도 영적인 차원을 가져야 한다. 나는 세계를 다니며 깨달았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통찰이었다.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 나의 존재는 전일성으로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경외심이 나를 가득 채웠다.

바꾸려 하지만 세상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할 때가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할 때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기업은 지난 100년 간 가장 성공적인 조직이었다. 이제 기업가들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위기에 빠진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 기업의 책임이다. 심장과 영혼으로부터 비즈니스의 목표가 만들어질 때 기업은 인류의 행복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다.(197-198)

 

세상과 타자를 위해서 나를 다 쓰지 못해 안달하라

돈을 벌면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모은다는 것은 욕망이고,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정말 훌륭해지기 시작하는 분기점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기 시작할 때부터다. 나눈다는 것은 자기를 넘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좁은 자아에서 벗어나 정신적이고 영적인 확장을 할 수 있게 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와 다른 사람이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며, 나와 우주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야 나올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위대함의 한 자락을 얻게 된다.(204)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삶의 목적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짧은 여행을 하러 온 것이다. 이유도 모른 채 말이다. 어쩌면 신의 섭리가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여기 온 이유 중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모두, 이미 죽었거나 아직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 덕에 살아가고 있음을 절감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받은 만큼 되돌려주려고 그들을 위해 나를 쓰지 못해 안달을 하게 되었다.”(205)

 

재능을 기부하고 사람을 얻다

 

 

나는 쉰 살이 되던 해 아침을 기억한다. 잊지 못할 것이다. 40대의 10년은 내게 집중된 시간이었다. 직장에서 나와 새로운 인생을 어떻게 시작할까에 맞춰진 실험의 기간이었다. 마흔여섯 살에 직장을 나와 나는 4년 동안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데 전력했다.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나를 쓰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키우고 궁핍이 나를 비굴하게 하지 않을 정도를 원했다. 내가 원한 것은 자유였다.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자유, 나의 세계를 하나 갖는 것, 그것이 직업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나는 1인 기업가가 되었다. 스스로를 고용하는 데 성공했다. 먹고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매일 내게 주어진 자유의 축복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쉰 살이 되면서 나는 인생의 의미를 묻게 되었다.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쉰 살은 이 질문에서 물러설 수 없는 분수령이었다.

“자 이제 독립에 성공했으니, 너는 무슨 일로 네 삶이 의미 있음을 증명할 것이냐?”

이 질문 앞에 서서야 비로소 의미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눔과 공헌이 없이는 의미의 문제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재미없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세상에 빚지지 않은 것이 없다. 좋은 것은 물론 나쁜 것까지도 나는 세상에서 배웠고, 사람들에게서 배웠다.

이러한 자각 속에서 쉰 살이 되던 해, ‘그것 때문에 50대 10년이 훌륭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10개의 아름다운 장면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을 내 삶의 ‘아름다운 10대 풍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풍광을 그려갈 때 나는 특별한 장치를 고안해두었다. 미래로 먼저 가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 도치의 방식을 써보았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미래의 회고’라고 불렀다. 2004년, 내 나이는 쉰 살이었다. 나는 10년 뒤인 2014년 아침을 가정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내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가장 아름다웠던 광경을 회고해보는 방식을 썼다. 스스로 미래 여행을 했던 것이다. 이 방식은 단순히 미래를 계획하는 것보다 두 가지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미래로 먼저 가서 과거를 회상하기 때문에 모두 과거 시제를 쓸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과거로 인식한다는 것은 커다란 정신적 전환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 역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나의 내면적 동기는 고양되었다.

나는 이 방법을 스피노자에게서 배웠다. 스피노자는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으니 미래 역시 과거와 마찬가지로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나는 이 생각에 자극받았다. 이 생각은 파울류 코엘류의 《연금술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마크톱’(미래는 이미 쓰여 있다!)이라는 재미있는 단어를 기억하는가? 나 역시 미래를 이미 일어난 과거로 써보면서 그 일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결국 내 인생에서 일어난 멋진 일이 될 것이라는 강한 주술을 걸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미래의 회고’가 주는 두 번째 장점은 10년 앞으로 먼저 가보았기 때문에 웬만한 삶의 도약은 전부 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만일 현재 시점에서 미래를 축조해간다면 너무도 황당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풍광 역시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년이란 거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이다. “10년 뒤로 나를 날려 보내라. 그러면 거의 모든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품을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주술이다.

체 게바라의 말을 기억하는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 모두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자.”

그리하여 나는 10년 풍광을 그리기 시작했고, 50대 10년의 거의 3분의 2가 지나가는 지금 나는 이 꿈들이 놀라운 에너지로 커가고 있음을 매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세상에 기여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려본 다음 두 개의 풍광은 다른 이들에게 내 인생을 나누어 주는 기쁨으로 가득 채워졌다.

첫 번째 풍광 | 우리의 불행은 꿈을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라 꿈조차 없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희미한 것이었고 사라져가는 것이었고,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고, 맞출 수 없는 퍼즐의 한 조각에 불과했다 그 한 조각을 가지고는 전체를 그려보기조차 어려운 작은 편린에 불과했다. 한 예로 거의 모든 사람이 가장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로 여행을 꼽지만, 그것이 어찌 인생을 전부 건 프로젝트가 될 수 있겠는가? 삶을 송두리째 바치게 하는 일생일대의 꿈을 찾아 그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 내 꿈의 첫 페이지’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꿈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은 모두 그것을 찾아 떠났다. 이 여행에 참석하게 되면 우리는 단식한다. 살며 수시로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택의 순간에 밥과 현실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그 순가 우리의 꿈은 얼마나 무력해졌던가! 그리하여 이 여행에서는 밥을 먹어보지 않으리라. 먹지 않음으로써 먹는 것의 절박함을 이해라고 또 그것이 탐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직업이란 결국 밥과 존재를 다룬다. 밥을 벌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포기하면 존재가 울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밥이 되지 않는 이 대립의 딜레마를 화해시킬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다. 사람마다 이 여행에서 얻은 성과는 다르다. 며칠의 여행으로 모두 다 그들의 꿈을 그려내지는 못했다. 어떤 이는 회귀했고, 어떤 이는 더욱 방황이 깊어졌고, 어떤 이는 축복처럼 자신의 길로 들어섰다. 분명한 것은 어떻든 그것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점이다.(206-210)

 

연구원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전 과정에 대한 수업료는 무료다 엄밀하게 말하면 무료가 아니다. 나는 ‘지식의 물물교환’이라는 방식을 시도해보았다. 돈을 거래의 단위로 쓰지 않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거래의 단위로 사용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그들을 지도했고, 그들은 그들의 배움과 숙제를 내 홈페이지에 올려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학업을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의 책으로 세상에 기여하게 했다. 따라서 연구원 수강을 하고도 좋은 책을 써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지식의 교환에서 실패한 것이다. 받기만 하고 주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개념을 좋아한다. 돈이 모든 것인 사회에서 옛날 방식의 따뜻한 대안을 찾고자 했다. 훈장이 가르치고, 아이들은 형편에 맞게 쌀 한 말, 팥 두 되, 콩 반 말을 수업료로 내는 것이 농경 사회에서의 보상 방식이었다면, 지식 사회에서의 거래 방식은 재능과 지식의 물물교환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치의 차이는 내가 훨씬 덜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훨씬 더 많이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만일 이 사람들 속에서 훌륭한 변화경영전문가나 작가들이 나타난다면 나는 훌륭한 제자들로부터 충분히 보상받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빛나게 마련이다. 아버지는 그 자식으로 빛나게 마련이고, 스승은 그 제자로 빛나게 마련이고, 국가는 키워낸 인재로 빛나게 마련이며, 인류는 위대한 인물들로 빛나게 마련인 것이다. 이것이 내 의도였다.(212-213)

 

염소, 호랑이가 되다

 

위대한 사람들은 꼭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반드시 한때 세상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과 고통을 겪는 창조적 부적응자들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을 위해 죽고, 진실을 위해 죽는 세속의 실패자들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에서 성공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평범한 인간 속에 살고 있는 위대함에 대해 말하려 했다.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위대함을 끄집어내 가장 자기다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 평범한 사람들, 스스로 자기 자신의 별이 된 사람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어는 날 나는 조키프 캠벨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내 가슴을 흔드는 이야기꾼이었다 그의 인생의 구루(스승)였던 하인리히 침머가 들려준 인도의 동물 우화 하나가 그날 특히 내 관심을 끌었다. 캠벨은 그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전해주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내 식으로 다시 정리해보았다.

암호랑이가 한 마리 있었다. 새끼를 배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굶주렸다. 어느 날 염소 떼를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어찌나 먹이를 잡기 위해 용을 썼는지 그만 새끼를 낳고 죽어버렸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던 염소들이 돌아와 보니, 어미 호랑이는 죽어 있고 갓 태어난 새끼 호랑이는 울고 있었다. 불쌍히 여긴 염소들은 새끼 호랑이를 대신 키웠다. 호랑이는 ‘매에’하고 염소처럼 우는 법을 배우고, 풀을 먹는 법도 배웠다. 하지만 몸에 맞지 않은 음식을 먹고 자랐으니 그 새끼 호랑이는 참으로 볼품없는 비실이가 되어갔다.

새끼 호랑이가 사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커다란 호랑이가 염소 떼를 덮쳤다. 염소들은 사방팔방으로 도망갔지만 비실이 새끼 호랑이는 도망도 못 가고 멍하니 서 있었다. 큰 호랑이가 새끼 호랑이를 보자 놀라 물었다.

“뭐야 너, 염소들과 사는 거냐?”

“메에에…….” 새끼 호랑이가 대답했다.

큰 호랑이는 기가 막히고 화가 났다. 몇 번 쥐어박았지만 새끼 호랑이는 그저 염소 소리로 울 뿐이었다. 큰 호랑이는 새끼 호랑이를 끌고 잔잔한 호수로 데리고 갔다. 새끼 호랑이는 난생처음 자기의 얼굴을 보았다. 큰 호랑이는 자기 얼굴을 그 옆에 가져다대고 말했다.

“이것 봐. 너와 나는 같지? 넌 염소가 아니라 호랑이다 알았느냐? 네 모습을 마음에 새겨 호랑이가 되어라.”

새끼 호랑이는 이 메시지를 이해했다.

큰 호랑이는 새끼 호랑이를 데리고 동굴로 갔다. 그곳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영양의 고기가 있었다. 큰 호랑이가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너도 먹어라. 마음껏 먹어라.”

그러자 새끼 호랑이가 말했다.

“나는 채식주의자인데요.”

“헛소리 하지 마라.”

그리고 고기 토막 하나를 입에 찔러 넣어주었다. 새끼 호랑이는 숨이 막혀 캑캑댔다.

“씹어라. 호랑이는 도망칠 수 없는 풀을 먹지 않는다. 달려들어 생명을 잡아먹고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새끼 호랑이는 고깃덩어리라는 새로운 깨달음 앞에서 캑캑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그것을 자기의 몸속과 핏속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올바른 먹이였기 때문이다. 새끼 호랑이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최초의 호랑이 울음소리였다. 드디어 호랑이의 몸에서 염소라는 과거가 뚝 하고 떨어져 나갔다.

우리 모두 염소처럼 살아가는 호랑이들이다. 사회 속에서, 조직 속에서 그렇게 길들여졌다. 우리는 어느 때 호랑이로서 자기 얼굴을 인식하게 될까? 그리고 호랑이로서 포효하며 살아가게 될까?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내가 염소를 싫어하고 호랑이를 좋아한다고 말이다. 내가 미워하는 것은 다만 우리 속에 지금의 우리 삶보다 훨씬 더 깊은 인생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는 졸렬한 현재인 것이다.

나는 자신의 이야기, 즉 나의 신화를 하나 갖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문명 이전, 수천 년 전의 인간의 사유 방식으로 풀어놓은 이야기. 그것이 바로 신화다. 잠잘 때의 언어, 감시당하지 않는 무의식의 언어인 꿈은 인류의 원형 이미지인 신화 속에서 그 해석의 실마리를 얻어낸다. 꿈은 개인화된 신화이며, 신화는 보편화된 인류의 꿈이다.

우리에게 꿈은 무엇인가? 자유다. 잠잘 때 무의식이 꾸는 꿈은 사회적 압력을 상징하는 초자아로부터으 자유를 의미하고, 우리가 깨어 있는 낮에 꾸는 꿈은 현재로부터의 자유를 상징한다. 과거의 강물에서 근원한 답답하고 초라한 현재, 방광에 가득한 노폐물, 터질 것 같지만 억제된 욕망의 배뇨의 길, 그것이 꿈이다. 꿈을 꾸지 못하면 현재는 풀려 나갈 곳을 잃게 된다. 춤추듯 화폭을 휘몰아가는 붓이 힘을 잃고 화폭의 구석에 겨우 작은 점 하나를 찍고 정지된 채 스스로 응축되어 갇히게 된다. 현재라는 창살, 벗어날 수 없는 감옥, 낡은 과거의 옷을 걸친 비루한 죄수로 살게 된다. 꿈은 창살을 빠져나오는 바람이 되고, 연기가 되고, 탈옥한 자의 웃음이 된다.

꿈은 무엇인가? 자신을 주도적 인물로 정립하기 위한 정신 작용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대와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축소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만들어지는 대로 사는 삶을 버리고 세상 속에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신의 제국 하나를 만들어내겠다는 자기 선언인 것이다. 모든 평범한 자는 우연한 사건을 만나 영혼을 흔드는 각성을 거쳐 사회가 강요한 꿈이 아닌 자신의 꿈을 꾸게 되는 위대한 모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꿈길, 우리의 모든 걸출한 모험은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시작된다. 꿈은 과거에 대한 미래의 승리인 것이다.

성장과 변화를 다루는 모든 책은 시시한 자기 계발서에서부터 위대한 고전에 이르기까지 꿈을 다룬다. 꿈이야말로 내가 상상하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나의 이야기다.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든, 인생이란 한 번의 시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절반도 살지 않고 벌써 곰팡이 나는 생각과 붕괴된 육체를 갖는다면 후반부 인생은 시작도 못하고 실패한 것이다. 꿈이야말로 단박에 삶에 동경을 불어넣음으로써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월든에서의 생활은 소로가 이 호숫가에서 오두막을 짓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꿈이 꿈을 이루게 하기 때문에 꿈은 주술이다. 그러므로 꿈을 잃었다는 것은 자신을 다른 것으로 재창조해낼 주술의 힘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꿈은 자신을 세상으로 불러줄 힘을 요구한다. 현실의 장벽을 넘어설 구체적인 결심과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확고하고 명료하고 완성된 것이 아니다. 변화해가는 것이다. 인간은 시도이고 예감이며 미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현실을 숭배하거나 존경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때 달라지는 것이다.”

이 말은 훌륭한 통찰이다. 분명한 것은 현실이 꿈과 미래를 장악하게 되면 내 마음대로 해볼 만한 나만의 세상을 창조해낼 힘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늘 결정적 순간을 노리고는 있지만, 그때가 오면 슬그머니 발을 빼는 슬픈 패배를 되풀이하게 된다. 자신의 미래를 현실로부터 지켜낼 힘을 잃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복종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사라지고 그들이 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다.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인물들은 자신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는 것을 최우선적 가치로 삼는다. 그것을 위해 현실의 위협에 대항한다. 뻔한 인생을 거부할 권리, 과거의 나를 죽일 수 있는 용기,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는 무모함이야말로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들인 것이다. 그때 그들은 삶을 재창조해 내는 데 성공한다. 인생의 터님포인트에서 분명한 도약을 통해 얕은 인생을 건너 깊은 인생으로 들어서게 된다.

“내게는 꿈이 있다.”라는 말은 나의 신화를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어느 날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각성에 이르고, 드디어 주인공이 되어 신들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괴물을 쳐 없애 고난 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그들의 영웅이 되는, 위대한 서사시 한 편이 나를 위해 쓰인다는 뜻이다. (215-221)

 

신화는 인생의 대본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읽는 방식이며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것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가 어떤 배우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흥미진진한 것은 그 역할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인물은 알고 있다. 결코 대중과 군중이 되어 지나가는 거리의 행인으로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을 가지고 위대한 이야기를 쓰지 못한다면 누구도 자신의 무대를 가질 수 없다. 역할이 없는 배우, 인생에게 통렬한 똥침을 날리는 대화 한 마디 할 수 없는 벙어리, 어는 한 사람하고도 목숨을 건 사랑과 우정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졸렬한 인생, 밥을 찾아 스스로 목에 먹이 사슬을 거는 개. 만일 우리 스스로 자신을 위한 신화 한 편을 쓰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이 열연해야 할 인생이라는 무대는 없다. 꿈을 꾼다는 것은 어둠 속의 관객, 얼굴이 없는 반편, 박수 기계로 남지 않겠다는 정신적 각성이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자신만의 무대가 설치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일곱 개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정신적 각성이 가져다준 일곱 개의 비밀들을 내게 적용해보았다. ‘내게도 이런 일들이 생겼을까? 그 일은 언제 발생했을까?’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작은 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아주 작은 별이지만 스스로 빛나는 소우주이며 고유한 이야기를 가진 행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수한 우리의 별들, 그중 가장 작은 별 하나가 나라는 것을 확신하는 과정이 이 책을 쓰면서 얻은 기쁨이었다.

그러므로 묻는다. 당신의 신화는 무엇인가? 당신은 인생이라는 모험에 어떤 모습으로 깊이 참여하고 있는가? 단명한 삶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자. 그 단명함이야말로 영생하는 신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참으로 슬픈 아름다움이기에. 그리하여 그대, 이제 가면 한 장 두께의 얕은 복제 인생을 걷어버리고, 모든 잠재력이 스스로의 강물로 흐르는 깊고 푸른 인생을 살자.(22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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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9 17:31:14 *.114.49.161

마흔앓이를 끝내셨어요? 저는 지금 하고 있어요.

첫문장과 끝문장이 그런 거였군요.

아, 이야기의 출처가 중요하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군요.

같은 책을 읽고 다른 것을 생각하다니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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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3 02:05:17 *.123.71.120

ㅎㅎㅎㅎ또 다른 앓이는 하고 있지만, 마흔은 지났으니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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