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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gum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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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8일 09시 30분 등록

가을 추수

 

지독히도 뜨겁고 한없이 지속될 것 같았던 여름날이 가고 있다. 새벽녘 열대야를 쫓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가는 팬 소리대신 귀뚜라미부터 시작해서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소리가 요란하다. 이 새벽녘 잠의 긴 나락에서 날 깨우는 커피한잔은 계절이 지나도 변함이 없지만 그 뜨거운 목넘김이 이제는 뜨겁기보다는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느새 차가움보다 뜨거움이 더 잘 어울리는 시기가 돌아왔다. 나에게 가을은 커피에서 시작된다. 청량감을 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다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찾을 때부터 말이다. 그래 이젠 가을이다. 가을은 독서와 사색의 계절이다. 이 연구원 과정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 아닐까 싶다.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그 봄에 시작된 연구원과정을 겨울 서리 속에 핀 매화꽃처럼 결연한 의지와 독기어린 기세로 시작하였으나, 나 역시 한낱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유난히 뜨거운 이 여름에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나가 떨어지듯이 내 마음에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던 서릿발 같은 칼같은 기세도 보기 좋게 약해지고 있었다. 그 뜨거운 여름에는 저항을 하면 안된다. 오히려 더위에 지쳐 내가 먼저 나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짝 엎드려 이 또한 지나가리를 마음속에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버티고 버티어냈다. 이 가을을 너무나 기다렸고 가을이 오니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다.

 

흔히들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이라고 한다. 농부는 형형색색의 색깔을 수확한다. 그럼 나는 이 가을 어떤 추수와 수확이 있을까. 풍성한 과일처럼 정말 탐스럽고 풍요로운 수확이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한 움큼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모래알을 잡은 것처럼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간다. 공허함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조금 더 확장을 시켜 무형의 수확물은 무엇이 있을까. 일단 7명의 동기를 만난 것이다. 동기라는 말은 나에게 각별하다. 사관학교에서 200명의 동기들을 만났다. 그들과 4년간 피땀을 같이 흘렸다. 그렇게 동기라는 말은 나에게 깊게 각인되어 있다. 각자의 인생에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우리 동기들.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는 그들이지만 파우스트와 같이 좀 더 높고 좀 더 나은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이 과정을 택했고 우리는 만났다. 누구에게도 끄집어내지 않았던 장면들을 얘기하고 공유했다. 그것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서로의 행복과 아픔을 공유함으로서 우리는 관계를 맺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를 마주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누구는 이 관계도 이 과정이 끝남과 동시에 흐지부지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맞을 수도 있다. 경험이 있으니까. 그러나 이 소중한 관계를 1~2년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어째 마음이 좋지 않고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또 무엇이 있을까? 사물과 감정의 재발견이다. 사물을 바라보거나 감정이 생길 때 예전에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보다도 사물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순간순간 왔다가는 나의 감정들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지긋이 눈을 감고 감정을 확산시켜보곤 한다.

 

30여권의 책을 읽었고, 칼럼들을 써왔다. 글의 가치를 따지자면 올리기조차 부끄럽지만 그것을 떠나 우선 나는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할 수 있을까?’의 물음표에서 할 수 있겠구나!’의 느낌표로 변화되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내 몸속에 쌓이는 지방만큼 몸무게가 무거워지듯 내 온 몸 구석구석에 차츰차츰 축적되고 체화되고 있는 감정들과 지식들에 의해 생각의 무게 역시 무거워지고 있다.

 

내 나이 마흔 셋. 계절로 치면 늦여름이나 가을의 초입이다. 남들은 이제 뿌린 것을 한창 거두고 있거나 거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수확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뿌려진 봄들의 씨앗들로 인해 여름날 많은 비바람과 태양아래 흔들리고 씻겨 내려가고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뿌리가 활착이 되지 않다보니 이러저리 참 많이도 왔다갔다를 반복하고 흔들렸다.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된 땅을 만나 이제야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 자리가 아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하고 여기서 정착을 하지 못하면 내 인생을 꽃 피울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매번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가을 낙엽들이 쓸모없는 쓰레기가 아니라 나무들을 더 크게, 튼튼하게 하는 거름역할을 하듯이 나의 이 지난날의 후회와 회한, 그리고 불안감들이 쌓이고 쌓여서 나를 성장시킬수 있는 촉진제가 될 것임을 안다.

 

생각해보니 올 가을은 손에 잡히는 뚜렷한 수확물이 없는 빈약한 추수로 인해 마음이 공허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가을날의 사색으로 인해 내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난다. 내년 가을쯤에는 올해보다는 더 풍성하고 풍요로운 수확을 기대해본다. 이제 무엇을 뿌려야 하는지도 무엇을 수확해야 하는지도 명확해진다.

IP *.106.204.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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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8 11:33:18 *.18.187.152

도입부 문체가 선비스럽기도 하고 장군스럽기도 한 것이 김유신같기도 하고 이순신 같기도 하여 신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기상체'가 확립되려나 봅니다.  매화꽃같은 결연한 의지와 독기어린 기세 덕에 저도 여까지 무사하게 온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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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8 12:43:59 *.226.22.184

왜 수확이 없어? 익어가는 우리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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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8 14:12:35 *.75.253.245
1.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를 마주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2. 사물과 감정의 재발견이다.  

두 문장 얻고 갑니다^^ 잘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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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00:04:35 *.222.255.24

아직까지 낮에는 더워서 여름이라 우기고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우리 동네 길거리에서 똥 냄새가 나는 걸 보니까 진짜 가을인가봐요.


언제부턴가 내게 가을은 냄새와 함께 오는 듯...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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