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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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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9일 21시 40분 등록

조마이 섬 이야기

- 김정한의 <모래톱이야기>, 1966

 

가파른 오르막이다. 한달음이면 정상인데, 자꾸만 숨이 먼저 차올랐다. 구름에 가린 풍경은 원근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날선 벼랑 끝은 아찔했다. 마침 구덕산 뒤편에서 해가 오르고 있었다. 어둠과 빛의 애매한 틈을 타고 새벽이 아침을 불러오고 있다. 안개 같은 구름들이 산등성이를 타다 능선 너머에서 허공으로 흩어지자 세상은 차츰 장막을 거두었다. 시선은 멀리 금병산까지 뻗어갔다. 너른 평야다. 승학산 바로 밑, 발치 아래로 흐르는 강줄기에서 샛강으로 갈라진 맥도강을 건너고 실핏줄 같은 평강천을 넘어 다시 서낙동강에 이르도록 김해평야는 막힘이 없었다. 욕심나도록 풍요로운 땅이었다. 나지막한 산줄기는 봉화산 아래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다 훌쩍 바다를 건너 가덕도까지 흘러 내렸다. 그 너머, 끝도 없는 바다다. 애매모호한 강과 바다의 밀고 당기는 교접 끝에 켜켜이 쌓인 것은 태고 적부터 흘러왔을 시간들이다. 낙동강 하구의 하루가 되새김질 되고 있었다.

 

강의 끝자락, 제법 커다란 섬이 하나 놓였다. 강물이 오랜 산고로 지친 몸을 뒤틀며 긴 한숨자락을 내려놓자, 제 안에 품었던 핏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태백의 너덜샘에서 시작한 천삼백 리 물길은 굽어 돌며, 깎이고 바스러져 남겨진 상처와 기억들이 응어리졌고, 강과 바다, 풍요와 탐욕, 그리고 물과 뭍의 틈에서 섬은 말이 없다. 여름도 다 지난 계절에 때늦은 수마에도 갈대처럼 뿌리를 내린 섬은 낯선 이의 눈에도 예사롭지 않다. 아마도 평생 동안 곁을 지키던 ‘낙동강 파수꾼’의 눈에는 더할 나위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을 목전에 남겨둔 여인이 낳은 자식, 유언처럼 여인이 남긴 것은 제 기구한 운명을 닮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이었을 테다. 사랑하는 여인의 곁에서 사내는 딱히 근본조차 알지 못하는 그 섬을 데려다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키웠다. 섬의 이름은 주머니를 닮은 제 모양대로 ‘조마이섬’이라 지어 붙였다. 그 작고 보잘 것 없던 섬에 매달려 살던 무리들의 사연들과 함께 낙동강 하구에서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가 태어났다. 1966년 봄이었다.

 

건우는 우리 반 학생이다. 조마이 섬에서 학교가 있는 뭍까지 나릿배로 통학을 하는 중학생 건우는 비가 오는 날이면 맡아 놓고 지각을 하던 단골이었다. 가정방문을 앞두고 건우가 적어낸 작문, ‘섬 얘기’로 건우와 섬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갔다. 마침내 건우를 따라 섬으로 가정방문을 나선 그때는 막 갈대청이 보기 좋게 순을 뽑아 올리고, 보리가 익을 대로 익어서 강바람에 물결처럼 흔들리던 때였다. 점심을 먹고 나선 걸음이었지만, 해가 제법 기울어서야 닿을 만큼 건우가 사는 섬과 내가 머물던 뭍의 거리는 한참 멀었다. 건우 어머니와의 면담 끝에서 오래 전 짧게 스쳐갔던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윤춘삼’, 그는 이름보다 오히려 ‘송아지 뺄갱이’라는 별명으로 더 기억되던 사람이었다. 건우를 따라 섬에 발을 들여 놓았던 그날 이후, 나는 섬에 감춰진 아픈 기억 속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 뜻밖에 우연같이 다시 만난 윤춘삼씨와 건우의 할아버지라는 ‘갈밭새 영감’. 하단 나루터 술집에서 따끈한 정종으로 시작된 영감의 이야기는 그의 어깻죽지 밑에 숨겨졌던 커다란 흉터처럼 드러났다.

 

“그까진 국회의원이 다 뭔교? 돈만 있음 ×라도 다 되는 기고, 되문 나라땅이나 훑이고 팔아묵고 그런 놈들이 안 많던기요? 왜, 내 말이 어데 틀맀십니꺼?”

갈밭새 영감은 말이 차츰 엇나가기 시작했다. 자기로선 취중 진담일지 모르나 듣기만 해도 섬뜩한 소리를 함부로 뇌까렸다. ……

“와 빤히 보능기요? 내 안주(아직) 술 안 취했음데이. 염려마이소.” ……

건우 할아버지와 윤춘삼씨가 들려준 조마이섬 이야기는 언젠가 건우가 써냈던 ‘섬 얘기’에 몇 가지 기막히는 일화가 붙은 것이었다. …… 건우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개탄조로 나왔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 자기들 것이라고 믿어오던 땅이 자기들이 겨우 철들락 말락 할 무렵에 별안간 왜놈의 동척(東拓) 명의로 둔갑을 했더란 것이었다.

“이완용이란 놈이 ‘을사보호조약’이란 걸 맨드러낸 뒤라 카더만!”

윤춘삼씨의 퉁방울 같은 눈에도 증오의 빛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1)

 

조마이 섬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육이오 때 그러니까 한창 그 무슨 청년단인가 하는 패거리들이 마구 설칠 무렵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송아지를 잡아먹은 일 때문에 화풀이를 하다 옥살이까지 하게 됐던 송아지 뺄갱이, 윤춘삼씨의 입에서 섬사람들의 투쟁사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 해던가 관청에서 나온 사람들이 문둥이들을 몇 배 가득 실어다가 섬에 풀어놓았다. 아무리 불쌍한 문둥이들이라지만, 동포애를 앞세워 섬사람들을 쫓아내려는 관청의 속셈이 화를 불렀다. 하지만 정작 싸움이 벌어진 것은 문둥이들과 섬사람들이었다. 갈밭새 영감의 어깻죽지 흉터도 그때 생긴 것이었다. 사람들이 줄줄이 경찰서로 붙들려갔지만, 소문의 여파를 걱정했던지 관청에서는 문둥이들을 도로 실어 나갔고 사태는 유야무야 덮여졌다. 

 

뱃길은 끊겨지고 없었다. 눈앞에서 곧장 섬으로 질러 들어가는 하굿둑 길을 두고 주춤거리던 발길은 예전 술집이 있었다던 나루터를 먼저 찾아 헤맸다. 강변을 따라 삥 둘러 솟은 아파트 틈바구니에 자리한 하단 나루터에서 섬은 코앞에 지척이었지만, 섬을 오가던 뱃길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바람에 비린내가 풍기는 몸을 부비던 돛단배도, 널찍한 어깨마냥 넉살좋던 사공의 모습도, 섬으로 똥을 실어 날랐다던 똥배들의 흔적도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자그마한 조각배들이 삼삼오오 모여 강변대로 밑으로 연결된 작은 물길을 통해 오갈 뿐이었다. 강을 건너 통학을 하던 건우의 나릿배도 여기로 닿았을 것이고, 건우의 담임이었던 ‘내’가 가정방문을 하러 배를 탔던 곳, 그리고 갈밭새 영감과 따뜻한 정종을 나눠 마시며 깊은 속이야기를 꺼내던 술집이 있던 곳, ‘하단 나루터’라고 했다. 낙동강변에서 이십 년이 넘도록 절필했던 소설 속의 ‘나’, 김정한으로 하여금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던 이야기. ‘마치 무슨 고발장이라도 접수한 양, 책상 서랍 속에 감춰두었다’던 현실과 소설은 여기 하단 나루터에서 뭍과 섬 사이를 넘나들곤 했다.

    

낙동강이 낳은 섬, 을숙도. 소설 속 조마이 섬의 실제 공간이 되었던 을숙도는 아련한 기억처럼 아직도 흐릿한 윤곽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하굿둑은 하단역에서 강 건너 명지벌까지 반듯하게 뻗어나갔다. 발길은 하굿둑을 따라 섬을 가로질러 들었다.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오르던 물고기가 작살에라도 걸린 냥 둑은 섬의 아가미를 꿰뚫고 지났다. 일웅도와 을숙도, 원래 따로 떠 있던 섬들은 87년 11월에 완공된 하굿둑 공사 때 하나의 섬으로 합쳐졌다. 83년 4월에 있었던 기공식에는 군인 출신의 대통령도 참석했다. 그가 시공 발파 단추를 누르자, 낙동강 한가운데에서 폭발음과 함께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섬의 동쪽 어깨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철새들의 낙원’이라 불리던 섬의 이름은 지나간 한 때의 일이었다. 천연기념물들과 희귀한 조류들의 도래지라는 이유로 설정되었던 ‘문화재 보호구역’은 허울뿐이었고, ‘문화재 보호법’은 새들의 영토를 지켜내지 못했다. 당시 문화공보부는 하굿둑 공사를 추진하던 ‘산업기지개발공사’로부터 문화재 해제신청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어쩌면 섬과 섬에 살던 철새들의 운명은 이미 예고된 일일지 몰랐다. 70년대 말, 대형건설업체들이 중동에서 철수하던 바로 그 무렵부터 낙동강 하구지역에 거대한 산업단지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굿둑은 강과 바다의 경계를 직선으로 갈랐다. 밀물이 되어도 바다는 더 이상 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했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며 강과 바다가 뒤섞이면서 일궈내던 낙동강 하구의 기수역은 풍요를 상실했다. 먹이터를 잃은 철새들은 알아보게 줄어들었지만, 마실 물을 낙동강 본류에서 구해야 하는 부산 사람들의 사정보다 급하지 못했다. 개발은 사람들의 욕망으로 명분을 얻었고, 보존의 목소리는 곧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강에서 퍼 올린 모래로 매립된 명지 일대 사람들의 땅은 넓어졌지만, 철새들의 낙원은 줄었다. 문화재보전지구는 아홉 차례나 구역을 변경했고, 뒤이어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고층의 아파트들이 지금도 들어서고 있다. 욕망은 지칠 줄 몰랐다. ‘동북아시대 세계적인 해양수도’를 꿈꾸는 부산의 서진西進을 막아서기에 ‘새가 못살면 사람도 못 산다’는 시인들의 경고는 무력했다. 허기진 배는 심장을 지닌 가슴보다 늘 우선하게 마련이었다. 철새들에게 낙원일지 몰라도 욕망으로 가득 찬 눈에 비친 을숙도는 그저 부산 사람들의 배설물이나 처리하던 천한 존재일 따름일지 몰랐다. 어두운 과거가 비록 자신의 탓이 아닐지 몰라도 약한 존재들의 시련은 늘 그러하게 마련이었다. 

 

여름은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낙동강물이 불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는 사이에도 섬의 갈대는 사람 키를 훨씬 넘게 자라 우거졌다. 강단지게 땅바닥을 움켜쥐고 바람을 견뎌내는 갈대밭 속에서 이따금씩 개개비의 울음소리가 튀어 나왔다. 이름 그대로 ‘새가 많고 물이 맑은 섬, 을숙도乙淑島’였다. 여름철에는 도요새들과 물떼새들이 다녀가고, 겨울에는 천연기념물인 큰고니를 비롯해서 재두루미, 흑두루미, 저어새, 노랑부리저어새…… 이름처럼 희귀한 나그네새들이 찾아오던 낙원이었다. 멀리 뉴질랜드에서 그리고 시베리아와 알라스카까지. 날아온 새들은 을숙도 주변의 맹금머리, 백합등, 도요등 같은 모래톱에서 여름을 지내고, 겨울을 나기도 했다. ‘습지와 새들의 친구’라는 이름처럼 섬을 지키려는 갈밭새 영감의 후예들이 있어 새들의 형편이 전보다는 나아진 모양이다. 강의 우안을 따라 섬의 가장자리로 낙동강하구에코센터나 야생동물치료센터 같은 시설들도 눈에 띄었다. ‘핵심보전지구’로 지정된 그 안쪽에는 최근 습지와 갈대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보전지구로 향하는 길은 막혀 있었지만, 활시위처럼 당겨진 다리의 교각들은 성큼성큼 섬을 건너 짚어가고 있었다. 지난 2009년에 개통된 을숙도대교(명지대교)2)였다. 개발공시가 나고도 완공까지 무려 17년이나 걸린 시간이 말해주듯 부산시와 시민환경단체들의 밀고 밀리던 싸움은 치열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싸움일 따름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다리 위에서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굉음이 덮쳐들었다. 위태로운 공존, 그 불안한 미래 위로 커다란 철새 한 마리가 내려앉고 있었다. 소리는 한참을 이어지다가 섬이 거슬러 가려던 물길을 따라 멀리 김해 쪽으로 날아갔다. 긴 꼬리를 물고 환청이 들렸다.

 

“우리 조마이섬 사람들은 지 땅이 없는 사람들이요. 와 처음부터 없기싸 없었겠소마는 죄다 뺏기고 말았지요. 옛적부터 이 고장 사람들이 젖줄같이 믿어오는 낙동강 물이 맨들어준 우리 조마이섬은…… 복숭아꽃도, 살구꽃도, 아기진달래도 피지 않는 조마이섬은…… 일제 때는 억울하게도 일본 사람의 소유가 되어 있다가 해방 후부터는 어떤 국회의원 명의로 둔갑이 되었는가 하면, 그 뒤는 또 그 조마이섬 앞강의 매립허가를 얻은 어떤 다른 유력자의 앞으로 넘어가…… 쥑일 놈들.”3)

 

그 후로 나는 섬에 두 번 걸음을 할 수 없었다. 수박을 먹으러 오라던 건우 어머니와의 약속도 지킬 수 없었다. 처서處暑 즈음해서 그저 팔고 남은 수박정도를 맛보려고 미루던 약속은 때마침 내린 폭우로 쓸려가고 말았다. 섬을 통째로 삼키려고 덤벼드는 홍수 앞에 섬에 매달렸던 삶들은 쉽게 허물어지고 말았다. 부랴부랴 버스를 집어타고 내달려갔지만, 성난 물길 속에 납작 엎드린 섬은 이미 보이질 않았고. 하단 나루터 주막에서 물에 젖은 채 다시 만난 송아지 뺄갱이로부터 전해들은 갈밭새 영감의 소식은 더욱 절망스러웠다. 매립허가를 받아낸 어느 유력자가 헐겁게 쌓은 둑 때문에 섬에 살던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자, 영감이 나서서 사람들과 함께 둑을 허물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일을 방해하던 유력자의 하수인 하나를 내팽겨 친 것이 잘못되어 영감은 살인죄로 경찰에 끌려가고, 주민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약 없는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허망한 이야기의 결말과 함께 폭풍우가 지난 뒤끝은 한참동안 황폐했다. 가을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도 건우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다만 조마이 섬에 군인들이 정지작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

 

 

 

1)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중에서

2) 명지대교는 개통을 얼마 앞두고, 이름 공모를 통해 ‘을숙도대교’로 수정됐다.

3)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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