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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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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6일 22시 16분 등록

섬진강 구담마을 가는 길

- 이광모의 <아름다운 시절>, 1998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다가왔다. 누군가 우물의 덮개를 치우자,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 여기야 여기. 이 눔의 빨갱이 새끼, 여기 숨었구만.”

별안간 사람들이 몰려들어, 우물 가장자리는 여남은 개의 얼굴들로 빼곡히 찼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거친 목소리들이 뒤섞여 좁은 우물 안은 삽시간에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는 손가락질을 해대고, 어떤 목소리는 욕부터 퍼부어대기도 했다. 성질 급한 사내 하나가 마디진 밧줄을 늘어뜨리고, 미끄러운 우물 안벽을 타고 내려왔다.

 

장면이 바뀌면 초가집들이 늘어선 동네 한길이다. 방금 전 우물에서 건져낸 빨갱이가 들것에 실려 오고, 아까부터 악을 쓰며 따라붙던 여자는 거의 실신 직전이다. 한 사내가 “어르신들의 한이라도 풀어드려야지”라며, 젊은 여자에게 낫을 쥐어주지만, 주저하던 여자는 끝내 오열하며 등을 보이고 뛰어갔다. 그 사이에도 들것에 뉘인 빨갱이는 발길에 채이고, 멱살을 잡히기도 하며 겁에 질린 버러지처럼 잔뜩 오그라들었다. 선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잠시 말리는 눈치였지만, 도리어 화를 당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미친 세상을 탓하며 자리를 피하는 남자의 뒤통수를 거친 욕지거리가 따라붙었다. 흥분한 사내들이 빨갱이를 끌고 길 끝으로 멀어지자, 하나 둘씩 사람들도 흩어졌다. 흘깃흘깃 뒤를 돌아보던 성민의 어깨 위에는 지금 아버지의 손이 얹혀있다. 그때까지도 카메라의 시선은 낯선 이방인처럼 먼 걸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사라져 가는 빈자리에 ‘고향의 봄’을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풍금소리에 맞춰 들려온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제법 골이 깊고 산이 높았다. 그러나 다리 건너 구미마을로 들어가는 이곳에서 산자락들은 잠시 멀찌감치 물러앉으며 하늘을 들여 맞았다. 익숙하게 넉넉한 풍경이다. 강가에서 마을로 야트막하게 올라붙은 들판에서는 날을 세운 벼 잎들과 그 아래서 영글어가는 나락들의 무게가 뒤섞여 먼 풍경에는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가을볕 아래서는 바람마저 온순해져, 잠시잠깐 스쳐 지날 뿐 땅에 닿은 뿌리까지 흔들지 못했다. 허수아비조차 하나 없는 들판이었지만, 쪽빛 하늘을 향해 누렇게 익은 침묵은 금새라도 뒤집힐 듯 팽팽한 위태로움을 품고 있었다.

강물은 하늘과 다투지 않았다. 가을로 접어들수록 강물은 하늘보다 더 푸른빛으로 깊어갔다. 강폭은 넓지 않아도, 바위를 끼고 도는 웅덩이에서 물빛은 짙은 암청색이다. 세월에 드러난 암반위에서 미끄러지듯 빠르다가도 드문드문 구르다 멈춰선 바위를 만나면 갈라졌던 물길은 소용돌이치며 몸을 섞었다. 강물이 그렇게 여울과 소를 반복해가며 산줄기와 산자락의 갈라진 틈새를 타고 흐르는 사이, 길 가장자리 매화나무들은 벌써 초라했다. 지난 봄, 한 시절의 풍경을 화려하게 연출하며 오감을 잡아끌던 주연들은 일찌감치 자리를 내어놓고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면 배역들도 달라진다. 지금 이 강가의 주인공은 억새다. 한참 하얗게 부풀어 오르는 꽃들 사이에서 섬진강은 눈이 부셨다. 장구목을 거쳐 구담마을로 들어가는 길, 걸음은 섬진강을 거슬러 나란히 이어졌다.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1998년)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우물에 숨은 빨갱이를 잡아내던 첫 장면은 낙안읍성에서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경남 의령의 한우산寒雨山에서 찍었지만, 대부분 장면은 이곳 임실군 덕치면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은 전쟁이 끝나가던 때였다. 구체적으로는 1952년 여름부터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미군이 일부 철수를 하던 1953년 겨울까지다. 세상 밖은 아직 전쟁 중이라지만, 마을에서는 국군이나 인민군이 총질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씩 학교와 마을에서는 ‘빨갱이 퇴치’를 위한 반공강연회나 결의대회가 열리곤 했지만,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은 만국기가 걸린 가을운동회를 거르지 않았다. 주민들은 미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지냈다. 성민의 누나는 미군장교와 연애 중이었고, 누나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미군부대에 일자리를 얻었다. 아버지의 소개로 성민이네 집에 세를 들어 살던 창희네 어머니는 미군들의 속옷 빨래 일을 맡을 수 있었다. 마을에서 떨어져 버려진 방앗간은 미군과 동네처녀 사이에 그렇고 그런 거래들이 있는 곳이었고, 간혹 미군들의 짚차가 나타나면 아이들은 흙먼지를 쫓아가며 땅바닥에 던져진 초콜렛을 주우려고 앞을 다투곤 했다.

 

서로를 ‘개똥이’와 ‘짱구’라고 부르는 성민이와 창희는 단짝친구다. 창희네는 아버지가 의용군에 끌려간 탓에 옷가지를 내어다 팔정도로 가난했고, 늘 보리쌀을 꿔서 먹고 사는 처지였지만 그건 어른들의 일이었다. 성민은 창희와 도시락을 나눠 먹었고, 창희는 성민에게 자신만의 보물창고를 보여줄 정도로 친했다. 친구들은 가끔씩 나쁜 일도 함께 했다. 미군의 ‘뺑코 망원경’이나 훔칠까하고 방앗간에 어슬렁거리던 그날도 그랬다. 그런데 둘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무너진 흙담 구멍으로 그들이 들여다 본 것은 미군과 창희네 어머니였다. 그리고 밖에서 망을 보던 남자는 성민의 아버지였다. 빨래를 도둑맞은 일을 핑계로 그 미군이 창희네 어머니를 요구했고, 성민의 아버지가 자리를 주선했던 것이다. 창희는 그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성민이도 더는 아버지의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장구목이다. 요강바위가 있는 강가에는 널찍한 바위들이 듬성듬성 강물을 차지하고 앉았다. 이곳에서 동네 아낙들은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멱을 감고 놀았었다. 지금은 여름 한철을 보고 민박과 식사를 내던 집들도 문을 닫아 인적이 드물다. 더러 산을 넘던 구름이나 길을 잃은 바람이 기웃거릴 만큼 오지다. 이정표 앞에서 갈린 길이 더러 용골산龍骨山을 타고 오르기도 하지만 구담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물길을 따라가는 외길이다. 회룡마을 앞에서 강물이 산자락을 끼고 몸을 뒤틀었다. 금새 걸음이 싸리재를 넘어서자 길은 감나무들 사이에서 좁은 내리막이다. 구담마을은 강 건너 산중턱에 다소곳이 앉았다. 십여 채 정도 되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가을볕을 받고 있었다.

 

마을 앞에서 길은 또 갈라졌다. 섬진강 자전거 종주길이 나면서 차량 한 대가 겨우 건널 만큼 좁고 낮은 콘크리트 다리가 놓였지만, 구담마을로 오르려면 다랑이 논길 옆으로 샛길을 따라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계절이 깊어가면서 강물은 하늘을 담고 있었지만, 물빛은 하늘보다 더한 그리움을 품었다. 바다만큼이나 푸른 빛깔이다. 강물에 반쯤 잠긴 징검돌 사이에서 물살은 바짝 서둘러 빠져나갔지만, 강변의 억새풀은 가을볕에 한 시절 느긋했다. 억새 위에서 부서지기 시작한 볕은 언제까지라도 강물 위로 쏟아질 것 같았다. 그 위에서 잠자리들이 어지럽게 맴을 돌아 시간은 자꾸만 거꾸로 흘러갈 것만 같았다.

 

방앗간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창희가 사라진 다음날이었다. 때마침 그 안에서 일을 벌이던 미군 하나가 죽었다. 헌병들이 마을을 뒤졌고, 학교로도 들이닥쳤다. 그들은 현장에서 발견된 고무신 한 짝을 들고 아이들을 줄 세웠다. 신발 크기에 맞았던 몇몇 아이들이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사건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쯤 지나 방앗간에서 조금 떨어진 늪에서 미군 밧줄에 묶인 아이의 시체 하나가 발견됐다. 마을사람들은 다시 술렁거렸다. 이미 부패 된지 오래여서 죽은 아이가 누구라는 아무 정황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더러 창희일거라고 쑥덕대기도 했다. 아무튼 아이들은 장례식을 준비했다.

 

좁은 길이다. 멀리서 만장을 앞세운 상여하나가 다가왔다. 소리를 메기는 요령소리도 없이 초라하다. 꽃이라야 들꽃 몇 무더기를 얹어 볼품은 없었지만, 제법 휘장까지 두른 꽃상여다. 그런데 행색을 갖추지 못한 이 행렬이 눈길을 끄는 것은 상두꾼도 만장을 든 이도 그리고 상여 뒤를 따르는 상객들 모두가 동네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창희의 장례식이었다. 시신을 싣지 못한 상여였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진지했고, 더러 울음을 참지 못하는 계집아이들도 있었다. 돌연 장례행렬을 한가운데로 군용 짚차 한 대가 뛰어 들었다. 뿌연 흙먼지가 일었다. 뒤를 따르던 아이들 중 몇몇은 습관처럼 흙먼지에 섞여 짚차를 쫓아갔다. 그러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무덤은 창희가 비밀스러운 것들을 숨겨두던 느티나무 언덕 옆에 마련됐다. 그저 아이들 주먹만한 돌맹이들로 테를 두르고, 맨 흙으로 쌓은 작은 봉분이었다.

 

느티나무 고목들은 길 끝에 매달린 마을에서도 한쪽 끝, 산중턱이 도드라진 자리에 매달려 있다. 마을로 오르는 오솔길 옆으로 겨우 코딱지만한 텃밭에 김장배추가 열을 지었지만, 가까이 서너 채 집들은 이미 빈집이다. 무너진 흙담 사이에서 외양간 지붕으로 해성한 하늘이 드러났고, 주인 없는 감나무에도 가을은 찾아들고 있었다. 느티나무 언덕자리는 바람이 지나는 길목이었다. 고목들 사이에서 펑퍼짐한 가운데, 창희의 무덤대신 ‘아름다운 시절 촬영장소’ 기념비가 놓여 있다. 「영화의 고향, 전라북도 임실군 덕치면」한국영상자료원이 세운 비문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강은 마을 앞에서 크게 굽이치며 산을 감고 돌았다. 발치 아래로 강물을 쫓아가던 눈길이 초점을 잃었다. 회문산을 에둘러 임실, 강진 땅을 거쳐 온 물길이 순창과 곡성을 지나 지리산을 싸안고 멀리 구례와 하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동학군과 빨치산들의 아픔을 간직한 산들이다. 섬진강은 그 깊은 골짜기마다 흘러온 슬픔들이 차고 또 넘치면서 흘렀다.

 

전쟁이 끝나가고 있었다. 새 집으로 이사 가던 날, 아버지의 라디오에서 휴전협정 소식이 들렸다. 포로수용소에 잡혔던 창희 아버지가 돌아왔다. 창희 아버지는 방앗간의 화재와 미군 밧줄에 묶인 어린아이의 시신 그리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 떠돌던 창희에 얽힌 소문들을 쫓아 다녔지만, 정작 성민으로부터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 짚차가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 쓴 성민의 아버지를 내려놓고 갔다. 미군부대에서 물건을 빼돌려 온 것들이 들통 나고 말았던 것이다. 불안한 뭔가를 캐물으며 다가드는 창희 아버지를 더는 따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성민 아버지는 또 다시 이삿짐을 꾸렸다. 창희의 무덤에서 이별을 하고, 돌아온 밤 성민의 꿈에 창희가 다녀갔다. 다음날 아침, 이삿짐을 실은 소달구지 하나가 굽이굽이 굽어진 산길을 내려간다. 임신을 했지만 미군장교에게 버림받은 누나와 성민이가 달구지 뒤에 실렸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뒤를 따랐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한 걸음 떨어져 카메라는 산 능선 먼발치에서 눈 쌓인 비탈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담마을을 빠져 나오며, 강진에 사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막걸리 생각보다 그 억센 사투리가 듣고 싶어졌던 탓이었을까. 스산한 바람 끝에서 장터는 스산했다. 지명으로 따지면 ‘강진장’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갈담장’이라 불렀다. ‘갈담葛潭’은 길목이었다. 갈담을 지나야 길은 비로소 동계로 순창으로 숨이 트이고, 남원으로 빠질 수도 있었다. 예전에는 멀리 장흥, 벌교, 순천에서 서울로 가려면 이 길을 거쳐야만 했다. 회문산과 백련산이 빚은 깊은 골짜기들을 따라 이름도 모를 물길들이 섬진강으로 흘러들 듯, 장날이면 세상 구경을 나온 발걸음들이 모여들었다. 운암과 청웅, 임실과 덕치, 옥정, 정읍의 산내까지 장터에 걸린 간판마냥 사람들은 고향의 흔적들을 묻혀왔다. 섬진강 댐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산외와 칠보에서도 연락이 닿았지만, 물길에 길이 막히면서 소식이 끊긴지 이미 오래였다.

 

굳이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국밥집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막걸리 한 사발에 국수 한 그릇씩을 비웠다. 주머니를 다 털어내도 아깝지 않을 인심들이지만, 이따금씩 국밥집 솥단지의 국물이 닳아지고, 막걸리 사발이 비워지는 파장 즈음이면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이 일기도 한다고 한다. 빌려간 돈을 갚지 않았다거나, 나이대접을 허투루 한 탓도 아니고, 대개는 해묵은 과거지사 때문이었다. 오래 전 이곳까지 미쳤던 세상의 험한 파도가 한 우물을 길어다 먹던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낮과 밤의 주인이 달라, 누구는 산사람의 자식이었고, 아무개는 국방군을 도왔다. 그 피붙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이념도, 역사도 아니었다. 전쟁이 끝났어도 끝나지 않은 원수와 복수는 한 골짜기 안에서 사무쳤고, 해마다 돌아오는 제삿날 술주정 끝이면 대가리를 처들 곤했다. 고통과 아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뼛속 깊이 새겨졌다. 아무 정황 모르는 이라도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상처라고 선배는 귀뜸을 했다. 그 상처에서 흐른 아픔들이 흘렀던 섬진강이었고, 강물은 또 한 시절을 흘러갈 것이다.

 

죽기 전에는 잊지 못할 기억들, 끝나지 않을 고통. 그 슬픔을 덮어 두고서 어찌 섬진강이 아름답다고만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세월이 흘러야 할까. 누군가의 눈에 눈부시던 풍경마저도 슬프다면 마음에 가득 찬 아픔 때문일까. 이광모 감독은 이런 말로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마무리 한다.

 

“고난과 절망의 시대에도

늘 희망의 불씨를 간직하고 사셨던

할아버님과 아버님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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