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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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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7일 22시 14분 등록

풋풋한 첫사랑의 추억

- 황순원 원작, 고영남의 <소나기>, 1978

 

잠결에 언뜻 목소리가 들렸다. 마을에 갔던 아버지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주머니 속에는 아직 호두알이 만져졌다. 소녀가 이사를 가기 전에 건네주려 따놓은 호두였다. 한숨소리에 어머니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아버지가 품어내는 담배연기가 여간 심란스럽지 않다. 아무래도 윤초시 댁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말이 아니어. 그 많든 전답을 다 팔아 버리구, 대대루 살아오든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드니, 또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이라곤 기집애 그 애 하나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애 둘 있든 건 어려서 잃구…….”

“어쩌믄 그렇게 자식 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두 변변히 못 써 봤다드군. 지금 같애서는 윤 초시네두 대가 끊긴 셈이지.……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은 옷을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 달라구…….”1)

 

벌써 삼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석이’, 그리고 윤초시네 증손녀인 소녀는 ‘연이’였다. 영화 <소나기>는 1978년에 제작됐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고영남이 감독을 맡고, 아역배우인 이영수와 조윤숙이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영화는 이듬해 9월 춘천의 소양극장에서 개봉됐는데,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 소설만큼이나 꾸준히 관심을 끌면서, 마치 사춘기 시절의 일기장을 뒤적거리듯 지금 사오십 대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자리하게 되었다. 원작에서 그지없이 순박하던 소년과 잔망스럽던 소녀와 달리 영화 속 석이와 연이는 70년대의 분위기에 맞게 조금씩 각색되었다. 연이는 단발머리 대신 양 갈래로 땋아 내리거나 긴 생머리를 했고, 서울에서 갓 전학 온 아이답게 세련된 옷차림이다. 석이도 그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제법 호기도 부릴 줄 아는 사내아이다. 짧고 간결한 대화와 서정적 묘사 속에 풋풋한 원작 <소나기>는 성인 영화를 주로 찍어왔던 감독의 곰살궂은 관능이 더해져 색다른 느낌을 준다. 필름에는 비단처럼 맑은 금강을 끼고 충북 영동군 양산면 일대의 풍경이 함께 담겨있다.

 

금산에서 영동으로 길을 잡았다. 68번 지방도는 천내강이 금강과 합류하는 천내나루 즈음에서 다리를 건넜다. 천내습지를 끼고 흐르는 강은 제법 솔찬하게 폭이 넓었다.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다시 충남에서 충북으로 물길은 도계를 괘념 않고 넘나들었다. 양산면으로 뻗어가는 길은 줄곧 왼편에 강을 두고 흐른다. 강줄기는 천태산과 갈기산 자락 사이를 굽어 돌며 천내리, 가선리, 수두리 그리고 송호리나 봉곡리 같은 마을들을 차례로 품었다. 하늘과 선녀, 솔숲과 봉황 같은 전설들이 숨겨져 있음직한 지명들이다. 하늘보다 더 파란 치마폭, 숨이 다 멎을 것 같다. 강물 위에서 투명한 빛들은 자갈자갈 부서진다. 등에 업힌 햇살이 은근히 따사롭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삼킬 듯한 웃음소리, 여울은 맑은 달음질을 쳤다. 바람이 뒤를 쫓는다.

 

면소재지가 있는 양산읍, 가곡삼거리에서 양산초등학교를 만났다. 백년도 넘게 오래된 학교는 얼마 전 본관 건물을 보수하고, 뒤편에 부속건물을 신축하면서 한결 산뜻해진 모습이다. 아이들의 등하교 길을 지켜보던 이승복 어린이 동상도 한참 전에 철거되고, 사루비아 꽃밭이었던 자리는 차량 진입로를 넓히면서 사라졌다. 대신 교정과 운동장 사이에 감나무들이 제법 한몫을 할 정도로 자라있다. 조회 때마다 옮겨놓던 이동식 철제 연단은 햇빛 가리개까지 갖춘 콘크리트 연단으로 운동장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고, 농협 창고가 보이는 맞은 편 놀이시설들도 모두 새 것들이다. 다만 교문을 나서면 바로 코앞에서 쭈쭈바를 팔던 구멍가게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폐가로 변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때처럼 코스모스가 한창일 계절인데도, 곧게 뻗은 포장도로 위로는 바람의 흔적도 느낄 수 없었다. ‘송호관광지’라는 이정표를 따라 강으로 향하던 걸음을 재촉했다.

 

토요일이었다. 개울가에 이르니 며칠째 보이지 않던 소녀가 건너편 가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체 징검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얼마 전 소녀 앞에서 한 번 실수를 했을 뿐, 여태 큰 길 가듯이 건너던 징검다리를 오늘은 조심성스럽게 건넌다.

“얘.”

못 들은 체했다. 둑 위로 올라섰다.

“얘, 이게 무슨 조개지?”

자기도 모르게 돌아섰다. 소년의 맑고 검은 눈과 마주쳤다. 얼른 소녀의 손바닥으로 눈을 떨구었다.

“비단조개.”

“이름도 참 곱다.”

갈림길에 왔다. 여기서 소녀는 아래대로 한 삼 마장쯤, 소년은 우대로 한 십 리 가까이 길을 가야 한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며,

“너 저 산 너머에 가 본 일 있니?”

벌 끝을 가리켰다.2)

 

앞서거니 뒷서거니 석이와 연이는 들판을 내달렸다. 가을은 한발 앞서 깊어가고 있었다. 누런 논에서 허수아비는 우쭐거리며 춤을 추었고, 메뚜기 암놈은 수놈을 등에 업고 익어가는 벼 포기 사이로 숨었다. 논이 끝난 곳에서 도랑을 넘었고, 거기서부터 산 밑까지는 밭이었다. 하얀 메밀꽃은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렸고, 무거워진 수수의 머리는 아이들의 껑충 뜀질에도 손이 닿았다. 밑이 덜든 무맛은 차라리 아렸고, 쪽빛 하늘에 눈이 시렸다. 원두막을 지나 야트막한 산자락은 온통 가을 들꽃 차지다. 들국화, 싸리꽃, 도라지꽃 그리고 양산 머리를 닮은 마타리도 한창이다. 연보라, 빨강, 흰색과 진청 그리고 노란색 꽃들이 석이와 연이의 손에서 무더기로 어우러졌다. 색깔과 향기 그리고 연이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석이는 어지럽다. 그 틈에서도 제법 가파른 비탈 끝에 매달린 칡꽃 향기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향내를 따라가던 연이가 바위에서 미끄러지며 무릎이 까졌다. 핏방울이 맺혔다. 생채기의 피를 빨아내던 석이가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송진을 구해다가 상처 위에 발라주었다. 지게를 짊어진 농부가 나타난 것은 그 때였다. 멀리서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다. 오히려 어제 내린 비로 산은 말끔하고, 강물은 불어 있었다. 물은 여전히 맑았다. 이끼가 낀 잔자갈 틈에서 놀란 물고기들이 용바위 쪽으로 몰려갔다. 바위가 바라보이는 소나무 숲 제방 한 켠에서 기념비를 찾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마련한 ‘소나기 촬영장소’ 기념비다. 비문에는 ‘소나기’를 1970년대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영화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던 연이가 ‘낮에 나온 반달’을 부르며 이곳을 지난다. 모래가 깔린 강가를 연이는 맨발로 걷는다. 연이의 뒤로 선녀가 목욕하러 내려왔다던 강선대와 선녀를 훔쳐보느라 승천하지 못한 용이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을 품은 강물이 흘렀다. 얼핏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 사람들도 비쳤다. 소나무 숲 언저리 미류나무 근처였다. 연이를 괴롭히던 동네 녀석들과 석이가 한판 붙었다가 코피를 쏟았던 바로 그 숲이었다. 소나무 숲 그늘 사이사이에서 알록달록한 텐트들이 듬성듬성 했다.

 

400년도 더 되었다는 송호리 솔숲을 빠져나왔다. 새로 캐라반과 물놀이장을 갖춘 캠핑장 리모델링 공사가 덜 끝났는지 입구는 아직 어수선했다. 와인테마공원도 외장 마무리 단장이 한창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모했던 ‘문화가 흐르는 강 살리기 사업’에 뽑혀 올해 45억 원을 들인다는 바로 그 사업인 듯싶다. 강선대는 다리 건너 마을 앞길에서 조금 비껴나 있다. 강 가운데 솟은 바위는 섬처럼 호젓해 보인다. 강물은 활짝 열린 가을 하늘 아래서 여물어 가고 있다. 넓게 퍼져 흐르는 여울이 한껏 강다운 꼴을 갖추었다. 이제 더는 계집애처럼 재잘대던 개울이 아니다. 지도상에는 다 같은 ‘금강’이라 적혀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천내강’ 또는 ‘양강’이라고 불렀다. 갈기산 자락을 차지한 해걸음에 솔숲에 남겨진 녹음이 한결 짙어갔다.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나룻배도 모래톱도 없었다. 지금껏 남아 있을 걸로 기대하진 않았지만 못내 서운하다. 송호리 솔숲은 80년대 후반 국민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작은 호텔과 음식점들이 들어서고, 꽤나 넓은 주차장도 마련됐다. 나룻배 대신 송호리에서 봉곡리로 건너는 260미터짜리 봉곡교도 90년대 중반에 생겼다. 강물에 닿은 솔숲 가장자리도 매끈하게 콘크리트 제방을 둘렀다. 2000년대 초부터는 상류 쪽 용담댐에서 담수가 시작되었다. 아마도 모래톱이 사라진 이유일 것이다. 용바위 부근에는 얼씬 할 수도 없었다. 해마다 익사사고가 있었던 모양이다. ‘위험지구’로 지정되어, 접근을 말리는 빨간 글씨의 표지판까지 세워놓았다. 정자에서 만난 한 노인의 말로는 예전에도 이곳에는 징검다리가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연이와 석이를 이어주던 징검다리 장면은 천내강 상류 어디쯤에서 따로 촬영했지 않았나 싶다.

 

그 다음 날은 소녀의 모양이 뵈지 않았다. 다음 날도, 다음 날도, 매일같이 개울가로 달려와 봐도 뵈지 않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운동장을 살피기도 했다. 남몰래 오학년 여자반을 엿보기도 했다. 그러나 뵈지 않았다. 그 날도 소년은 주머니 속 흰 조약돌만 만지작거리며 개울가로 나왔다. 그랬더니 이쪽 개울둑에 소녀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소년은 가슴부터 두근거렸다.

“그 동안 앓았다.”

알아보게 소녀의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그 날 소나기 맞은 것 때매?”

소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인제 다 낫냐?”

“아직도…….”

“그럼 누워 있어야지.”

“너무 갑갑해서 나왔다.…… 그 날 참 재밌었어.…… 근데 그날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지 않는다.”

소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본다. 거기에 검붉은 진흙물 같은 게 들어 있었다.……

“내, 생각해 냈다. 그 날 도랑 건널 때 내가 업힌 일 있지? 그 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다.”

소년은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3)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 소년은 턱수염이 굼실하고 머리칼도 희끗한 반백이다. 반나절 내내 강가를 서성이다 무슨 생각인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피씩 계면쩍은 웃음을 짓고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강바람을 탄 푸른 연기가 갈대숲에서 나풀거리던 긴 머리 마냥 어지럽게 흩어진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징검다리를 가늠해 본다. 아마도 물길이 좁아지는 저만치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는 모양이다. 눈길이 강을 거슬러가는 바람을 쫓아보지만 이내 길을 잃고 만다. 손에 들린 담배가 한참을 혼자 타들어갔다.

 

    

 

 

 

 

1) 황순원 <소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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