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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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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0일 07시 50분 등록

휴가를 떠나며


휴가다. 3박 4일. 하루 휴가를 쓰기에도 눈치를 봐야하는 마당에 3박 4일은 참 긴 시간이다. 그럼에도 아주 즐겁지는 않다. 며칠을 쉴 수 있다는 편안함 정도일까. 이제 휴가는 마치 군대에서 고참상병 시절이나 초년병장 시절의 휴가와 비슷하다. 그 시기의 휴가는 포상휴가 등이 없다면 군대에서 마지막 공식휴가이다(우리 때는 그랬다). 외박이나 특박도 적지 않게 경험을 해보았고 그렇게 고대하던 휴가도 일병 때 이미 갔다 왔다. 제대는 눈앞에 있고 이제 휴가보다는 제대 이후에 무게중심이 더 쏠리는 시기이다. 그 시기의 휴가는 졸병 때만큼 즐겁지 않고 귀대할 때가 되면 복귀하기 싫다는 게 특징이다. 


미시령 터널을 나오니 안개가 앞을 막아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맑은 날씨였던 터널 저쪽과는 전혀 딴판이다. 자욱하다 못해 아예 세상을 덮어버린 듯 하다. 바로 앞에서 달리는 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라이트란 라이트는 다 켜고 기어가듯 간다. 재미있고 신기하다. 창문을 열고 안개를 구경하다 소리를 지른다. “여보 사진 찍어! 언제 이런 안개를 또 보겠어!” 자주 그렇듯이 필요한 것은 필요한 순간에 없다. 카메라는 짐 속에 처박혀 있었고 사진은 찍지 못했다. 그런들 또 어떠랴. 볼만큼 봤으면 됐지. 안개에 덮인 속초가 천천히 다가왔다. 석 달만의 재회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엔 주공연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주공연수원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숙소로 잡은 작은 연수원이 있다. 배정된 방의 거실에서 보니 주공연수원이 눈에 잡힌다. 짐을 정리하고 거실 창문으로 주공연수원을 내다본다. 올 4월초 주공연수원에서 하루를 잤다.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였다. 지금은 7월초. 그때부터 꼭 석 달이 지났다. 레이스를 시작한 이후로는 다섯 달이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 때 그 자리에 있고자 스스로 원했지만 그 만큼의 변화는 있었던 것일까. 석 달. 긴 시간이 아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도 하지만 석 달은 긴 시간이 아니다. 수십 년 넘게 자신의 틀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사람의 변화를 끌어내기에 충분한 기간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조급해 지는 것은 미뤄놓은 변화의 숙제가 삶의 시간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고작 50권, 그 조급함과 기대 사이


한해의 반이 벌써 지났다. 그 동안 십여 권의 책을 읽고 십여 개의 리뷰를 쓰고 십여 개의 칼럼을 썼다. 그것뿐이다. 힘들었지만 그것뿐이다. 4월의 햇빛 좋은 그날 진전사에서 선생님은 말했다. “그래봤자 고작 50권이다.” 맞다. 고작 50권이다. 연구원이 되려는 생각조차 없었을 때도, 연구원이 되어 커리큘럼을 보았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래봤자 50권이다. 그 50권이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선생님은 그날 이렇게도 말했다. “괴로운 훈련이 될 것이다. 때때로 회의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생이니, 그것을 담기 위해 1년 훈련을 하자. 1년 동안 채찍이 가해질 것이다. 자기 내면의 영웅을 꺼내야 한다. 어제 여러분은 장례를 치르고 이미 죽었다. 죽음은 계속 된다. 계속 죽으며 고독과 싸워라. 그렇게 가는 것이 너희들의 인생이다.”


고작 50권이지만, 쉽지 않은 괴로운 훈련이다. 문제는 때때로 솟구치는 회의다. 1년 동안의 채찍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맞을 수 있다. 새로 태어날 수 있다면 매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 죽을 때마다 알면서도 버리지 못했던 것들을 버릴 수 있다면 매일 죽는 것은 매일의 즐거운 일이다. 고독과 싸우라면 고독과 맞붙어 아예 고독을 질식사 시켜버릴 수도 있다. 


문제는 회의다. 마음이 급한 까닭이다. 미뤄놓은 것을 한번에 해치우려는 조급함이 그것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가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든다. 이제 와서 서두른다고 수십 년의 묵은 때가 한번에 벗겨지지 않을 터인데 조급함은 회의만 키워간다. 많은 것들이 결국 나의 몫일 것인데 나를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결국 무엇이 나 인지 찾아내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이 앞선다. 내면의 영웅은 고사하고 가득 숨어있던 못된 것들만 튀어 나온다. 내 속에 이런 것들이 있었나 싶은 것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글자가 집이 되고, 쌀이 되고


점심에 먹은 오징어순대가 탈을 일으켰다. 유명하다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갔는데도 맛은 썩 좋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불만스러운데 탈까지 일으키니 더 불만스럽다. 두어 시간을 방에 누워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을 깨어보니 방에는 아무도 없다. 아내와 아이는 산책을 나갔으리라. 넓은 창으로 내다보는 전망은 싱그럽다. 현관 앞으로는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이 있고 그 앞쪽으로는 논이 푸르게 펼쳐져있다. 눈을 들면 먼 곳에 산이 병풍처럼 자리 잡았고 산허리에는 구름이 몇 점 맴돌고 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인가 무력감과 짜증이 몰려온다. 멍한 느낌이 기분을 우울하게 한다. 기지개를 한껏 펴고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무언가를 하니 몸이 깨어난다.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래도 먹고 노는 팔자는 아닌 모양이다. 한 시간여 자판을 두들기고 설악산 입구까지 가 보기로 했다. 도로는 한적했다. 휴가 비수기의 평일에 누릴 수 있는 한가함이 가득하다. 천천히 길을 가다 풍경 좋은 곳에서는 차를 길 한편에 세운다. 길에 내려서 거닐기도 하고 앉아있기도 한다. 나무 하늘 바람이 내 안에 있다.


자판을 두들기다 눈을 들어 내다보니 높은 산이 코앞에 있다. 홍천이다. 20층 베란다에서 내다 본 풍경은 온통 푸른 숲이다. 속초를 떠나 홍천까지 왔다. 두 시간여를 더 가면 서울이다. 텔레비전에서는 교통정보를 전한다. 화면에는 도로를 가득 채운 차들이 늘어서있다.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차는 많아지고 속도도 빨라진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괴력에 사람들이 쫓기는 까닭이다. 


글을 쓰며 살 수 있다면 서울을 주거지로 택하고 싶지 않다. 사람을 몰아붙이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고 싶지 않다. 여태껏 서울이라는 도시에 주민등록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괴물 같은 도시의 모습이 너무 싫었고 그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무언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며 살 수 있다면 숲이 보이는 곳에 살고 싶다. 글이 밥이 되고 집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아내와 아이는 물놀이를 하러 가고 혼자 남아 자판을 두들기며 꿈을 꾼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꾼다. 꿈은 부드럽게 흘러간다. 꿈속에서 자판을 두들길 때마다 글자가 하나씩 태어난다. 글자 하나가 태어날 때마다 벽돌이 한 장씩 떨어진다. 벽돌을 모아 집을 짓는다. 글자는 기와가 되기도 하고 대들보가 되기도 한다. 흙이 되기도 하고 댓돌이 되기도 한다. 아내와 아이와 하나씩 모아 차곡차곡 집을 만든다. 


집을 다 만들고 나니 글자는 이제 쌀이 된다. 글자하나가 태어날 때마다 쌀이 한주먹씩 떨어진다. 글자는 배추가 되기도 하고 된장이 되기도 한다. 고기가 생선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글자는 생명의 수단이 되어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글자가 태어나는 중간 중간에 고개를 들어 넓은 창 밖을 내다보면 그 곳엔 숲이 푸르다. 


꿈은 그렇게 끝났다. 백일몽에서 깨어나니 벽돌도 대들보도 없었다. 쌀도 고기도 없었다. 담배 한대가 피우고 싶어졌다. 숲이 내다보이는 베란다에서 담배 한대는 물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담배는 없고 탁자 위에는 숙제만 쌓여 있었다.


다시 숙제를 하느라 자판을 두들긴다. 읽고 쓰고 하다보니 한해의 절반이 갔다. 7월이다. 이제 한해의 절반이 남았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커리큘럼에 휩쓸려가는 느낌이다. 50권의 커리큘럼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나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한해가 온전히 지나 해가 바뀌었을 그 시기에 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많은 경우에 그랬듯이 성실한 참여자로만 끝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과 조바심이 몸을 눌러온다. 기대와 회의, 두려움과 조바심이 서성대는 그 어느 지점에서 한해의 남은 절반이 시작된다. 




                                                        2008년 7월 6일


                                                 --  유인창(변화경영연구소 4기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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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어느 날인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에 퍼뜩 놀랐다. 놀란 김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생각대로 살지 않은 게 아니라 생각 없이 살았던 거였다. 농부인 아버지가 그랬듯이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이 내세울 만한 것 별로 없이 살아가지만 아주 불만스럽지는 않다.
한번은 해보고 싶었던 기자생활을 시작해 문화일보 편집부에서 꽤 오랜 시간을 기자라는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매일 기사를 챙기고 버리고 자르고 붙이는 편집 일을 하면서 자신의 삶은 편집하지 못해 끙끙대며 마흔을 살았다. 생각하는 대로 살려면 어떻게 삶을 편집해야 하는지 궁금증을 갖고 있다. 
서툴게 살아가다 보니 책읽기가 때로는 따뜻한 위안이었고 때로는 즐거운 놀이였다. 놀이가 끝났으면 책을 덮고 일어나면 그만일 것을, 책을 덮고 펜을 들어 책을 쓰겠다고 달려들었다. 읽기가 하나의 놀이였다면 쓰기는 이유 모를 갈증이었다. 어쭙잖은 글로 마흔의 강을 건너며 만난 목마름을 달랬다. 물맛 참 시원하다.


위의 글은 유인창의 3번째 책 <명상록을 읽는 시간>에 올라가 있는 저자 소개입니다. 


2008년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 4기 연구원으로 공부를 시작한 그는 2011년 <마흔 살의 책 읽기>, 2013년 <꿈을 꾸지는 않지만 절망하지도 않아> 그리고 2016년 <명상록을 읽는 시간>까지 3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무명의 그가 10년 동안 3권의 책을 펴낸 작가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문화일보 편집부 기자로 살고 있고, 여전히 글을 쓰고 있으며, 또한 여전히 밥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월 300만 원만 벌 수 있다면 오롯이 글만 쓰며 살고 싶다고요. 출판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참 쉽지 않은 바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가 평생 글을 쓰며 살아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글쓰기가 그의 특기이자 장점, 강점이자 유일한 취미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글을 쓸 때 살아 있습니다. 생기가 돋아나고, 힘이 생겨납니다. 어쩌면 살아가기 힘든 이 세상에서 그를 지켜주는 가장 강한 무기가 바로 그가 만들어 내는 글자, 문장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글자가 밥이 되긴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 기자의 짐을 내려놓고, 마침내 자유의 길을 걸어야 할 때 그는 분명 글쓰기를 통해 밥을 먹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글쓰기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그 유일한 생각이 그의 삶을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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