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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옹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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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6일 08시 04분 등록

이 글은 3기 연구원 송창용님의 글입니다.

 

 “그대는 왜 울고 있나요?”
요정들이 물었다.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어요.”
호수가 대답했다.

“하기 그렇겠네요.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요정들이 말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호수가 물었다.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르키소스는 날마다 그대의 물결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잖아요!”
요정들이 놀라며 반문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호수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중에서 -


변화경영연구소의 첫 수업은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다른 이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내가 죽기 전 신이 내게 10분의 시간만을 허락한다면 나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나의 삶을 살아보겠다고 여기에 온 사람들을 처음부터 죽여 놓고 시작하니 어찌 보면 잔인하다 싶다.

올해 첫 수업도 어김없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나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지금까지 울지 않는 이를 본 적이 없다. 저마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었고, 애증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미안해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사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죽음을 거부하며 끝까지 삶에 집착하는 이 또한 없었다. 모두가 죽는 연습을 미리 한 양 제대로 죽었다. 죽음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을 받아들였다.

죽음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영원한 이별이기에 앞서, 단 하나뿐인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요하리 만치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죽음이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죽음의 방향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다. 사는 일은 곧 죽은 일이며,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나의 첫 수업을 돌이켜보면 나는 제대로 죽지 못했던 것 같다. 나의 장례식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결과다. 10분 뒤에 죽기가 싫어서,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지금 죽기에는 너무나 억울해서 내 멋대로 40년은 더 살고 죽겠다고 때를 썼다. 나의 미래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미느라 유서는 너저분해지고 너덜너덜 해졌다. 아쉬움도 없었고, 안타까움도 없었고, 삶에 대한 애착도 없었다. 한마디로 제대로 죽지 못했다.

그 이후로 죽음이란 육체적인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 또한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저명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삶이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라 단언했다. 제대로 죽어야 잘 사는 것이다. 삶의 거울은 죽음이다. 삶은 죽음이 있기에 더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운 것이다.


자신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고 다른 이의 삶을 좇아가느라 허우적거릴 때마다 삶의 거울을 꺼내어 보는 것만으로도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이 거울은 나르키소스의 호수처럼 잃어버려 울 일도 없고 심지어 깨질 염려도 없으니 신의 주신 귀중한 보물이라 하겠다. 얼마나 잘 살았는가는 얼마나 자주 이 거울을 들여다보는가에 달려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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