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연구원의

변화경영연구소의

  • 옹박
  • 조회 수 331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2년 5월 9일 11시 05분 등록

이 글은 3기 연구원 이은남(향인)님의 글입니다.

 

장시간 집을 비웠다가 들어가면 먼저 그의 이름부터 부른다. 그러면 석고상처럼 정지상태로 있었던 물체 사이로 팔랑개비처럼 살랑 살랑 움직이는 꼬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자다가 일어난 듯 눈을 반쯤 뜬 채로 어기적 거리며 다가오는 꼬리의 주인공은 나와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 테리이다. 주인의 외출 시간이 얼마나 길었느냐에 따라, 또는 음식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는가에 따라 그 대상를 맞이하는 목소리가 다르다.

근 한 달간의 칩거를 마치고 북한산에 다녀온 그 날도 그랬다. 현관 문을 열자 쪼르륵 뛰어 나와선 어딜 다녀왔느냐? 나 간식 안 준건 알고 있느냐? 앙앙거리지만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꼬박 한 달을 붙어 있다가 하루 14시간 이상을 떨어져 있었으니 저도 내심 반가웠다는 뜻이다. 우린 그럴 땐 그냥 이름을 부르며 바라보기도 하고 걸음걸이를 같이 하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하곤 한다. 예를 들어 낮잠을 잘 잤느냐, 식사를 거르지 않았느냐 말을 건네주고 그의 영역을 방문해 삶을 챙겨주는 것이다.

그럼 녀석은 그런 나의 주변에서 발에 채일 정도로 부산거리며 물이 없다느니, 밥이 식었다느니 하는 말로써 주인의 미안함을 덜어주곤 한다. 한 일 이분 정도의 일상적인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하는데 그러다 이윽고 조용해지는가 싶으면 예의 그 갸르릉을 시작해 준다.

녀석이나 나나 수선스럽고 시끄러운 타입이 아니니 그저 느끼고 느껴지는 것에 금방 마음이 편해지곤 한다. 우리는 서로의 관계에 익숙해지면서 처음 만날 때처럼 콕 집어서 애정을 확인하는 절차는 이제 생략해도 괜찮은 사이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격렬함 대신 잔잔하고 편안한 공기 같은 차원의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된 것이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먼저 그렇게 고양이와 인사를 나누고 나선 으레 찻물을 올리고 컴퓨터를 부팅하고 옷을 갈아입고 책상에 앉는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며 메일을 확인하거나 그 날의 이슈를 잠깐 보기도 하는데 그러면 녀석이 다가와 다리를 감싸거나 기척도 없이 곁에 앉아있곤 한다. 가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심한 주인에게 나 여기 있다는 표현 방법은 뭐해요?(냐옹?) 하는 한 마디이다. 마치 사람이 말하는 것 같다. 연예가십거리에 빠져있던 주인은 “으응”하며 눈을 화면에 대곤 건성으로 녀석에게 대답하곤 한다.

그런데 오늘 풍경은 조금 달랐다. 차를 따라 한 모금을 마시곤 녀석을 향해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다가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 동안 큰소리로 말하지 못하고 어쩔까 고민만 하느라 진즉 이야기할 기회를 놓쳤는데 이번엔 당당하게 말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테리, 있잖아, 나 실은 너를 가지고 글을 써 볼까 하는데...”
“아니, 뭔 이야기를??....궁상스런 과거얘기? 연애 한번 못한 고양이라고 소문 내는 거? 아 나 그거 정말 싫어요, 냐옹, 냐옹…”

녀석이 약간 히스테리칼하게 변했다. 부담스런 그 마음을 어찌 내가 모르리.. 그 동안 녀석 모르게 슬쩍슬쩍 울궈 먹은 게 쏠쏠하지 않은가? 내심 걸리는 게 많은 주인인지라 그의 말을 경청하고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아하 이거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느낌이 오고 있다.

사람마다 황홀의 극치를 경험하는 대상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또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것이며 그래서 일정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갖는 감정도 그 주체와 객체, 주어진 상황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지 듯 오늘 내가 갖는 어떤 기쁨은 때론 찰나적일지도 모르며 또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뒤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상황이 가져오는 색깔의 차이일 뿐 결국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는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가리워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고양이에게 나의 욕망을 털어놓기로 했다. 내가 집중하고 몰입한 어떤 것이 실은 매번 나를 황홀의 극치로 데려다 주곤 했노라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테리가 어떻게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광경을 설명하자면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근조근 말을 시작했고 그는 나의 손길을 따라 얼굴을 비벼대며 내 말에 취한 듯 감미롭게 눈을 감은 채 그가 좋아하는 내 손과의 접촉의 기쁨으로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녀석에게 한 말의 요지는 이렇다.

지금까지 살면서 무엇이 너를 가장 기쁘게 하였는가? 무엇이 너를 너 스스로 인정하게 하였는가? 무엇이 너를 가장 솔직하게 하였는가? 무엇이 너를 고개 숙이게 하였는가? 무엇이 너를 너로 살게 만들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가장 커다랗게 들려온 굵은 메시지는 다름아닌 새롭게 알고 느끼고 행하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의 시작과 끝에는 독서와 습작의 시간이 확연하게 증거하고 있었고 그것에서 잠시 손을 떼자 금단증상처럼 몰려오는 시시한 삶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려 하고 있었다.

아니다, 이것은 아니다. 나는 내 삶을 시시함으로 만들 수는 없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한 발 더 나아가자. 좀 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자. 도대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쓰지 못한다는 것인가? 쓸 수 없다는 것인가?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해야만 했다. 강을 건너는 길에서 하염없이 물살만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아무런 해답이 없다. 물살이 얕은 곳을 찾아 가던가 배를 만들던가 여럿이서 협공하던가 하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강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래서 강을 건너는 대신 산으로 올라가 보았다. 숨을 크게 쉬고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그리고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면 아주 작은 강이다. 물살이 센 곳도 있지만 얕은 곳도 있어 보인다. 산 꼭대기에 보는 강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새들처럼 사뿐하게 날아서 건너는 곳이다. 바람이 태워주면 건너갈 수 있는 곳이다.

작년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속이 터질 것 같은 시원함이 있었다. 꽉 막혔던 기도가 뚫리는 후련함이 있었고 잔잔한 소통의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사랑했다. 표현의 욕구는 물이 샘솟듯 자고 나면 차올라 있었다. 읽고 쓰고 하는 시간은 귀중했으며 나는 그런 습작의 시간을 즐겼다. 그러다 이제 어느덧 정해진 일년의 마지막 어귀에 서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개인적인 자잘한 사고들을 핑계 삼아 잠시 머문 곳에서 그저 얼어붙어 있다.

습작과 책을 쓴다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왜 “책”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겁을 집어먹은 것일까? 쓰는 행위의 연속이 결국 “책 출판”이 아니겠는가? 한 때 내 삶에 있어 가장 만족스런 행위가 “읽는다, 느낀다, 쓴다”는 것이라고 했다면 이렇게 얼어붙어 있는 이유에 대해 규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오늘도 이 문제를 가지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빙빙 돌고 있다. 만약 이것에 답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 시시한 인생으로 간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나의 삶을 불만족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부분에서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근육들을 유연하게 만들 필요를 느끼고 있다.

나는 인생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웃게 하는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아주 즐거울 수도 불행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그런 면에서 욕심쟁이처럼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편이다. 이것은 어쩌면 지나온 삶이 그렇지 못했기에 더욱 더 그것을 만회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일수도 있다.

그 동안 독서를 하면서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그래서 떨리는 가슴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나를 가장 부르르 떨게 만든 것은 몇몇 멋진 사람들, 특히 “통찰과 해학”의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 덕에 삶이 즐거울 수 있음을 알았다.

전문성이 없다는 것, 나의 피를 끓게 하는 테마가 없다는 것, 사회에 공헌하는 글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도 관계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도 의식하지 말고 오로지 내게 쓰는 글, 나의 만족을 추구하는 글, 나는 그렇게 앞으로도 글을 쓰기로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통찰과 해학이 있는 글을 쓸 수 있으리라. 첫 번째 책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이렇게 정리하기로 하였다.

고양이에게 오늘 이런 내 마음을 털어 놓으며 강을 건너려고 하는 데 같이 가 주겠느냐고 물었다. 녀석은 그저 주인만 곁에 있으면 좋다는 듯 여전히 내 손에 코를 틀어박고 부벼대고 있다.

테리를 들어 올려 품에 안으며 삶이 내게 시험해 올 때마다 떠 올렸던 글귀를 다시 가슴에 새기며 심호흡을 한다. 지혜를 찾아가는 길에 만나는 첫 번째 적은 공포라는 그 말을…. 처음 연구원에 지원하고자 했을 때 망설이던 나를 끌어주었던 그 말을…

IP *.247.149.24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