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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9일 13시 21분 등록

본 칼럼은 연구원 4기 박중환 연구원의 글입니다

 

 

많은 고민 끝에 보험업계에 입문했다. 전장(戰場)에 처음 발령받은 어수룩한 초급 병사였다. 한 달 동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직무교육이 진행되었다. 교육기간이 끝난 후, 첫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두려움과 설렘을 교차하게 했다. 묘한 긴장감이 온몸에 전율처럼 전해져왔다. 팽팽한 활시위를 벗어나 화살과 같이 맹렬히 날아가고 싶었다. 어떤 결과가 다가올지 몰랐다. 다만 아이의 아빠로서, 아내의 남자로서, 그리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렸다. 경마가 발마대를 벗어나 힘차게 달려나가는 것처럼, 드디어 영업이 시작되었다. 영업 시작 첫 달, 전쟁 같은 시간을 보냈다. 아침 7시 출근, 12시 퇴근. 주말은 반납한 지 오래였다. 일하는 것이 쉬는 것이었고, 쉬는 것이 일하는 것이었다. 달리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경주마가 눈을 가리듯, 오로지 선명한 목표만을 응시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내가 팔아야 하는 보험에 대해서 새빨간 확신범이 되어 있었다.

 

영업 개시 첫 달, 전체 입사 동기들 가운데 운 좋게 건수 부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영업 두 번째 달부터 성과는 바닥 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일반적으로 보험영업은 지인에서 시작한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지인시장의 범위에 따라 성과는 큰 차이가 나곤 한다. 지인시장의 범위가 좁았던 상황에서 지인시장의 탄약이 바닥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사무실을 혼자 지키는 시간이 많아졌다. 애꿎은 담배 녀석과 조우하는 시간만 늘어났다. 어느 순간 텅 빈 공간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은 모두 가망고객을 만나기 위해 외근을 나간 상태였다. 만날 사람이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홀로 표류하는 조난자와 같은 심정이었다. 고독했다. 그러나 수첩에는 빼곡하게 가망고객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사업가, 의사, 주부, 샐러리맨의 이름과 연락처가 검은색 잉크로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다만 그 잉크 속 명단은 계약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만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수화기를 들 수 없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사업하는 사람이 나를 만날 시간이 있겠어?’

직업이 의사인데 이미 많은 보험에 가입되어 있겠지.’

대학원생이 보험료를 납입할 여유가 있겠냐?’

 

머릿속에는 만나지 말아야 할 분명한 변명만이 아른거렸다. 망연자실했다. 처음 신입사원 교육 때, 가장 어려운 업무 중 하나가 전화접근이라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실패하는 영업인의 50%가 이 전화접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담당 매니저와 지점장의 눈빛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 하필 보험영업이냐?’며 말리던 절친한 친구들, 말없이 믿고 따라줬던 가족들, 냉랭한 눈빛으로 차갑게 거절하던 지인들. 이 모든 걱정들이 빛바랜 필름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위기의 순간에 찾아오는 잡념은 유령처럼 내 주위를 배회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용기를 내야 했다. 자신에 대한, 가족에 대한, 동료에 대한 약속이 있었다. 한참을 주저하다 몇 달 전 상담했던 대학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어, 경제적 수입의 문제로 가입을 연기했던 친구였다. 다행스럽게 대학동기는 오랜만에 전화를 했음에도 방문을 승낙했다. 늦은 저녁 연구실로 찾아가기로 약속을 했다.

 

도착했을 때, 대학 교정은 밤을 잊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불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저녁도 거른 공복의 상태였지만, 시장기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대학동기가 근무하고 있는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대학동기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무 말 없이 담당 교수님이 좋아하는 커피라며, 향이 은은한 헤이즐넛 커피를 내주었다. 은은한 커피 향기와 함께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이 웃음 속에서 오고 갔다. 잠시 후 대학동기에게 자연스럽게 보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온몸에 남아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듯이 상담했다. 한참 제안서를 설명한 후, 대학동기에게 상담내용이 어떠했는지 물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대학동기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내게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너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니?”

난 순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제대로 못 들었는데…….”

그는 당황하며 답변을 주춤거렸다.

오해는 하지 마. 대학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고, 인정받고 잘나가던 너잖아. 그런 네가 꼭 이런 거친 보험영업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서 그래. 다른 폼 나는 일을 하면서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잖아.”

 

뒤통수를 강하게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 더 이상 상담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의미가 없었다. 저녁도 먹지 않은 공복상태이기도 했지만, 내 자신이 철저히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 일을 왜 하는지 항변하고 싶었지만, 설득할 마지막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영원 같은 침묵이 흘렀다. 고민 끝에 자료를 챙기고 도망치듯 일어섰다. 사무실로 복귀하기 위해 차를 몰았다심리적인 충격이 너무 컸던지, 돌아오는 시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모두 퇴근하고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사무실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양복 상위를 벗었다. 이미 와이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있었다. 불타는 태양이 내리쬐는 광야에,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홀로 서 있는 것만 같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외로움이 엄습해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흘렀다. 과거 수많은 고객들의 거절에도 굴하지 않았건만…….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무실 한 귀퉁이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이 아닌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사무실에 누군가가 있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얼룩진 눈가를 휴지로 닦아냈다. 그 누군가는 함께 근무하는 지점의 선배 컨설턴트였다. 그는 조용히 다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말해보라고 했다. 눈가에 남은 눈물자국이 무척이나 민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위로받고 싶었다. 잠시 망설인 후 선배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그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복음을 전해줄 것만 같았다간절한 눈빛으로 그 선배의 화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선배는 말문을 열었다.

 

우리 일이 다 그런 거야.”

 

선배는 내 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외마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무실을 나갔다. 난 한동안 넋을 잃고, 선배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길 잃은 양에게 신비스런 복음은 없었다. 정말 실망스러웠다. 아니, 솔직히 황당했다. ‘,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하며 속으로 곱씹었다. 실망스러움의 충격으로 한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런데 설명하기 힘든 신기한 현상이 발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배의 외마디 조언이 머릿속에서 선명해지는 것이었다우리 일이 다 그런 거야라는 말 한마디. 놀랍게도 그 선배의 조언이 진짜 구원의 메시지가 되었다. 그 선배의 외마디는 참호 속 두려움에 떨던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랬다. 영업을 통한 성공, 가치, 신념. 이 모든 단어들은 실패, 거절, 자괴감이라는 단어들의 양면임을 깨달았다. 영업을 하는 사람에게 진한 외로움은 어린이가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와 같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상처받는 것이 싫어서,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주춤거리지 않게 되었다.

 

성공학자 오그 만디노는 《위대한 상인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들이 겪게 될 외로움과 어려움에 대해 묘사했다. 이 책의 주인공 하피드는 평범한 낙타지기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부유한 집안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봄날 벚꽃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녀에게 청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직업은 볼품없는 낙타지기. 거울 속에는 초라한 자신만이 있었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는 더 높은 부와 신분이 필요했다. 그는 결심했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다. 고민 끝에 자신의 주인인 파트로스를 찾아갔다. 주인은 이미 엄청난 부를 소유한 거상이었다.

 

주인님, 저도 낙타지기를 그만두고 상인의 대열에 끼겠습니다.”

, 정말 할 수 있겠느냐?”

, 저는 꼭 해야 합니다.”

간절한 눈빛의 하피드를 보며 파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그래 좋다. 지금부터 너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 세금징수 관리자도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고 로마군단도 숙소가 있지만, 너는 수많은 밤을 모든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거야. 어둠 속에서 낯선 집을 지나칠 때 식구들과 단란하게 모여 식사하는 것을 보면, 극도의 외로움을 느끼게 되지. 이러한 외로움과 시련의 시기에 반드시 유혹이 너를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유혹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네 인생에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올 거야.”

 

오그 만디노의 글을 보면서, ‘정말 내 이야기구나하면서 무릎을 쳤다. 영업뿐만 아니라 우리네 사는 인생이 모두 외로움이라는 녀석과 함께 동행하지 않는가. 모든 떠남이 낭만적이거나 행복하지는 않다. ‘외로움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얄궂은 얼굴로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이다. 슬픈 사실은 우리가 이 손님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은 불편한 만남을 해야만 한다. 반가운 소식은 이 불편한 손님이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외로움은 여인숙과 같다. 잠시 머물렀다, 이내 떠난다. 위대한 상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외로움은 친구와 같다. 이 친구가 조용히 찾아왔을 때, 피하기보다 함께 벗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박중환, 변화경영연구소 4기 연구원 (bigrock1@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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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31 08:08:35 *.71.14.127

여기서는 이렇게 진행이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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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31 23:24:21 *.137.158.174

머리보다 몸으로 부딪치는 삶...그런 것이 오라버니의 매력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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