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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옹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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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6일 14시 11분 등록

이 글은 3기 연구원 최정희님의 글입니다.

 

오월의 하늘은 맑고 새들의 노래 소리는 대기의 신선함을 듬뿍 뿜어내고 있었다. 산을 휘감아 도는 강물은 깊고 잔잔하였으며 우리가 나누는 달콤한 언어들은 날개를 달고 날았다. 그들은 노래가되고 향기가 되어서 다시 내게로 다가와 속삭인다.
" You are my sweet pea."

오랫만의 외출이었다.
매일 일과처럼 행해지는 둘만의 아파트 등나무 아래로의 나들이를 제와 한다면 한 달도 훨씬 넘었다. 서로가 바쁘다기보다는 ‘나로 인함’이다. 대학원 논문에서 시작하여 연구원의 책읽기와 글쓰기, 그리고 잡다한 나의 취미로 우리가 즐겨하던 도시락 싸서 나서는 둘만의 외출은 휴강 상태나 다름없었다. 생동감 있는 철학 강의에 취할 대로 취한 뚜비(그는 나를 늘 이렇게 부른다. 내 본명을 들어본지가 십 수년은 되었다.)의 한 달 30일 출근을 그는 넉넉한 미소로 지켜봐 주었다. 그의 이름은 언젠가 언급한 바 있는 남편 보라돌이다.

5월의 청명함이 한 잔의 커피 속으로 내려와 앉는다. ‘흥겨운 노동’의 프리마가 찻잔 속에서 스르르 녹아나고 텅 비운 머릿속에는 ‘벗어던짐’에서 오는 홀가분함이 자리를 잡았다.
토끼풀들이 지천이다. 하얀 꽃들이 초록의 잎들 속에서 올망졸망 어깨를 맞대고 개미를 비롯한 풀벌레 몇 마리가 그 사이를 유영한다. 따스함이 전해진다. 커피 잔에서 전해지는 것인지 그의 손길에서 오는 것이지 명확하지 않지만 느낌은 아주 좋다.

토끼풀 팔찌.
내 왼 손목을 초록과 흰색으로 살포시 감싸고 있다. 보라돌이가 뚜비에게 준 풀빛 짙은 토끼풀 팔찌에서 나는 과거의 짧고도 긴 우리들의 역사를 읽어내고 잠시 가슴 저미어 옴을 느낀다.
하늘을 올려 다 본다. 종다리 두 세 마리가 원을 그리고 토끼모양의 구름이 서쪽을 향하여 두둥실 떠가고 있다.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 때면 사람들은 곧잘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서 위안을 찾는것인지 눈물 떨어짐을 막으려는 시도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 나의 경우는 둘 다 해당된다.

사랑이야기에 관해서라면 대부분 사람들이 특별한 사연과 가슴 저림을 간직하고 있듯이 나 또한 그 특별한 사랑을 안고 있다. 지금에야 곱게 품을 수 있지만 그 생채기의 아픔이 깊고도 슬펐기에 스스럼없이 끄집어내어 풀어 놓기에는 아직은 힘들다. 그러나 그 아픔의 보퉁이를 살짝 비집고 나오는 ‘사랑’ 이라는 것이 나를 조금은 넉넉하게 만들어 준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들 많은 집 막내다. 그리고 소위 명문이라는 고등학교, 명문 대학 졸업, 한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곳에 주소를 두고 있는 키 크고 잘 생긴 총각이었다. 덧붙이자면 노래도 잘했고 프로스트의 영시를 멋지게 읊을 줄도 알고 있었다. 분위기가 되면 군대 행진곡 정도는 음정 박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입과 손으로 연주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해할 만한 뚜렷한 이유도 없다. 돈도, 인간성도, 그 무엇도 아니었으니 나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답답할 뿐이었다.
고난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체제(울 엄마의 생각)를 변화 시킬 만큼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냥 물결 속에 휘말려 떠내려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집에서는 착한 딸로서 다시는 그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다. 그러나 그 남자 앞에서의 엄마와의 맹세는
얼굴조차도 드러내지 못했다.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맺고 끊음이 없던 나의 성격으로는 지극히 예견된 조류였다. 나는 나였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식구들의 고충은 기아 상태이상이었다.
그 뒤 전개는 멜로 드라마였다.
결혼식에는 한 쪽 가족만 참석했다. 내 쪽에서 신랑 체면을 차려 준 것이 있다면 친구들이 대거 몰려와 축하의 말을 건네고 멋들어진 실내악 연주까지 해 주었다는 것이다.

제1부로 끝난 드라마였다면 참으로 슬픈 드라마였을 거다. 결혼 후 십년을 넘게 그는 사위로 인정되지 아니했고 나는 단지 집나간 딸로 연출 되었으니까.

제2부는 웃으면서 볼 수 있다. 전 반 몇 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지만 나와 울 엄마는 이기고 지는 관계가 아니었다. 엄마에게는 딸에게 있었던 일은 모두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혼식을 올린 것도 없었던 일, 아이를 낳고 사는 일도 없었던 일, 단지 진행되고 있었던 확실한 사실은 엄마의 모든 생활이 분노로 가득 차 있다는 것만 유일하게 인정되어졌다. 그 분노는 현재의 삶에 대한 분노를 시작으로 해서 과거 저 밑바닥까지 송두리째 거부되고 철저히 무시되는, 그로 인해 딸인 나는 죄스럽고 무서워서 엄마라고 부르지도, 뵙지도 못하고 자주 자주 떠돌 뿐이었다. 그 곳은 도피처요 망각의 장소들이었다.

그러나, 그 힘든 고통의 순간에 일어서서 울창한 밀립을 헤치고 한 발자국씩 전진할 수 있었음은 나의 사랑 보라 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언제나 영웅이었고 그는 나를 위해 기꺼이 로마의 전쟁 노예까지도 될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출세라는 커다란 욕망을 버렸고 가족으로부터 오는 결코 가볍지 않는 질타도 사뿐히 받아넘겨 버리는 정말 나에게는 과분하게 이를 데 없는 충실하고 멋진 반려자였다. 내가 좋아하는 소(牛)이야기로 기꺼이 밤을 지샐 줄도 알고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워즈워드. 릴케의 아름다운 시를 읊을 수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 절반은 유머다. 온 몸으로 웃기고 함께 웃게 만든다. 숨어서 웃기고 연기로 웃기고 말로서 웃고 또 웃게 한다. 오직 그가 나의 청을 정중하게 거절한 것이 있다면 좀 더 무게 있는 아빠가 되어달라는 청이었다. 이제 아이들이 아빠의 열렬한 시청자요, 관객을 넘어 연기의 구성원에 기꺼이 동참하게 된 것은 그가 승리했음을 뜻한다..

‘세월’이라고 불리어질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이제 우리 엄마는 한 말씀 하신다.
“ 왔는가 ”
감격스럽고 황홀한 한 말씀이시다. 그 이상 바라지도 아니하거니와 더 하시지도 않는다.

딸은 알고 있다. 차마 그 긴 사연을 다 털어놓기는 뭐하지만 나의 엄마, 뚜비의 엄마가
충직하고 변함없는 보라돌이를 왜 그렇게 온몸으로 거부했는지를.

윌 듀런트는 아멘호테프를 왕이 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고 표현한다. 전쟁보다 예술을 더 좋아하고 아름다운 시를 썼으며 아내인 네페르티티를 지치지 않고 사랑한 그 멋진 아멘호테프를,
듀런트가 생각하는 왕의 조건은 어떠한지 정확하게 알 수 는 없지만 그는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인간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삶의 모든 것을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요. 왕의 조건임이 확실한 것이니까.

그러고 보니 나의 보라돌이가 진정한 영웅이다. 내가 그에 의해서 영웅이 된 것과는 달리 그는 스스로 영웅의 길을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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