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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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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4일 16시 20분 등록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걷고 있는데 딸기가 말을 건다. 나를 집에 좀 데려가 줘.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가간다. 언제 계절이 이렇게 됐지? 마트 진열대에서 활짝 웃고 있는 딸기가 반갑다. 그렇지. 이맘때쯤 딸기를 한번 먹어줘야지. 그래. 오늘 나랑 같이 가자.


어디 보자. 어떤 게 좋을까. 요즘은 딸기도 브랜드시대다. 유기농 딸기도도 있고, 지리산에서 자란 딸기도 있고, 주인의 이름의 달고 나온 딸기도 있고, 참숯 먹고 자란 딸기도 있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명품 딸기도 있고, 새벽에 딴 딸기도 있다. 저마다 빛나는 빨강과 향기를 뽐낸다. 나는 가장 알이 굵고 향이 좋은 한 팩을 집어 든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녀석들 중에 제일 비싸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도 벗지 않은 채 팩을 열고 가장 크고 선명한 빨간색으로 두 알을 고른다. 한 손에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굵고 탱글탱글 하다. 두 알을 한꺼번에 쥐고 물로 대충 헹궈 씻으려고 했더니 너무 커서 자꾸만 텅 소리를 내면서 싱크대로 떨어진다. 수채구멍으로 빠지지 않게 서둘러 주워 든다. 두 손으로 제대로 잡고 빡빡 문질러 씻는다. 초록색 꼭지를 따서 아무렇게나 버린다. 딸기를 입으로 쏙 넣었더니 입이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는다. 딸기물이 오른쪽 입술 끝에서부터 턱을 타고 줄줄 흐른다. 그래. 이 맛이야. 싱그러움이여 내게로 오라. 티슈를 뽑아 쓱쓱 닦으며 방으로 들어간다. 딸기란 한 팩을 통째로 씻어서 예쁜 접시에 담아 먹을 때보다 이렇게 남몰래 먹는 것처럼 한두 개 꺼내 먹는 것이 더 맛있는 법. 그렇게 딸기 두 알로 힘을 내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는다.


이제 딸기를 제대로 먹어 볼까. 싱크대에 소쿠리를 걸쳐 놓고 팩에서 조심스럽게 두 알씩 딸기를 꺼내 담는다. 이렇게 팩에 담긴 딸기를 살 때 잘못 사면 위칸에만 알이 굵고 빨간 게 들어 있고 아래칸에는 덜 읽은 꼬마 딸기가 들어 있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속았다는 생각에 기분 확 잡친다. 그런데 오늘 내가 산 딸기는 아래칸까지 꽉 차게 빨갛다. 그래. 맘에 들었어! 하긴, 이게 얼마짜린데. 어차피 혼자 먹을 거면서 둥그런 접시를 꺼내 보기 좋게 담는다.


나는 딸기를 먹을 때마다 약간 우쭐해진다. 딸기는 내 사치품이다. 적당한 선에서 저렴한 것을 구입해서 딸기향만 맡을 수도 있지만, 이왕 먹는 거 가장 빨갛고 맛있는 상품으로 선정된 것으로 산다. 가장 좋다는 것이 꼭 가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만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기준이 된다. 내가 딸기의 당도를 재거나 향기만으로 그 딸기의 품질을 구분해 낼 수는 없을 테니까. 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그리고 이왕 딸기를 사 먹을 작정이라면 가장 비싼 것과 저렴한 것의 가격은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 일이 천원만 더 주면 내 기분이 훨씬 좋아질 수 있다. 그러니 딸기만큼은 내가 고를 수 있는 것 중 가장 비싼 것으로 사 먹자는 것이 나의 오래된 개똥철학이요, 딸기를 한 입 가득 물고 콧속까지 퍼지는 향기를 느끼는 즐거움이야 말로 나의 귀엽고도 사랑스러운 사치다.


나도 살아가면서 어떤 것들은 가장 좋은 것을 갖고 싶다. 내 만족도와 기분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물건을 선택하고 싶다. 아끼고 절약하고 겨우겨우 구색을 갖추고 생색만 내기 위한 것들을 선택해 왔다면 약간은 사치스러워 보이더라도 내 어깨를 으쓱하게 해 주는 것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세계 제일이거나, 아무나 살 수 없을 만큼 고가의 물건이거나, 혹은 이 세상에 몇 개밖에 없는 스페셜 에디션은 아니어도 된다. 일상에서 만나는 시시한 어떤 물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면 충분히 좋은 생활 사치품이 될 수 있다.


사치품이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들을 소유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우러러 봄으로써 나를 더욱 빛내고 사치품의 진가는 발휘된다고 믿었다. 그러니 소박하게 하루하루를 엮어가야 하는 나와 같은 평범한 시민이 사치품을 즐기는 것은 욕먹어 마땅한 일이었다. 오히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싸잡아서 눈 흘기고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그들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 부치는 쪽에 서 있었다.


이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게 됐다. 명품만 사치품이 아니다. 절대적인 가격이 너무 비싸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그리하여 나와 다른 사람이 차별되는, 평범한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의 고가 물품을 갖고 있어야 뿌듯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월급보다 비싼 가방을 팔목에 걸쳐야만, 유명 연예인이 갖고 있다고 해서 가격이 올라가는 상품을 사야 생활의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내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명품은 그보다 훨씬 많다. 사치품의 범위를 꼭 시계나 자동차, 가방, 구두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사치품은 무궁무진하다.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사치품이고 럭셔리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다들 갖는 비싼 가방을 내가 못 갖는 다고 좌절하거나 우울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개개인의 럭셔리가 필요하다. 나만의 럭셔리를 나만의 방식으로 즐기면 그만이다. 딸기가 나의 사치품이자 나만의 호화로움인 것처럼. 그것이 다른 사람이 갖고 싶어서 안달 나는 그런 물건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만족과 안정을 준다면 충분하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사 먹을 수 있는 딸기지만 최고급 딸기만을 즐긴다는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매일 만나는 것들 중 어떤 것을 골라 사치를 부려보자. 그게 꼭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내 기분을 새단장 하기 위해 기꺼이 추가 비용을 지불하자. 옆자리 동료가 스타킹이 열 개 있는데도 새로운 계절이 돌아오면 또 반짝이 스타킹을 사는 것, 친구가 책을 살 때 가격을 보지 않고 읽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사는 것, 누군가는 볼펜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냥 너무 예뻐서 갖고 싶어서 사는 것, 한 달에 한번은 택시를 타고 출근하는 것, 모두가 생활 사치품이다. 동네 포장마차에서 가족들 몰래 떡볶이 한 그릇에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것도 평범한 주부 입장에게는 사치품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사치품의 기준은 가격이 될 수도 있고 개수나 구입 횟수가 될 수도 있다. 혹은 어떤 특별한 상황에 만나는 물건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이런 사치가 필요하다.


생활 사치품 몇 개를 정해 두면 아무일 없이 힘 빠지는 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날 우습게 보고 스스로도 하찮게 느껴지는 날, 내 자신이 형편 없이 허물어지는 날, 가진 것을 모두 잃어 아무것도 없는 듯 허무한 날, 아무도 나를 예뻐해 주지 않는 것 같은 날에 나 혼자라도 나를 향해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려 세워줄 수 있다. 봄바람이 살랑 부는데 나만 아직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는 느낌일 때, 또 두꺼운 코트를 벗는 것만으로는 내 기분이 달라지지 않을 때, 나를 산뜻하게 끌어올려주기도 한다.


모두가 이게 뭐냐고 나무라지만 잘 견뎌줘서 고맙다고 스스로에게 칭찬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과하지 않은 선물로 나를 응원해 주고 싶은 날, 누군가는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사치품 하나를 챙겨놓자. 도무지 힘을 내기 어려울 것 같은 날, 돈 일이 만원으로 내 기분을 달래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사치를 부려볼 만 하지 않은가. 가장 비싼 딸기를 사 먹는 것만으로, 문구점에서 장난스러운 볼펜 하나를 사는 것 만으로,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 만으로, 우리의 기분은 마술처럼 산뜻해진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사치품이 아니라 진정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럭셔리를 즐겨보자.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함으로써 나를 치켜세울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해도 스스로의 만족감은 충분히 올려준다. 맥주도 저렴한 것으로 아무거나 골라 적당히 취할 수도 있지만 취향 따라 내가 맛있어 하는 특별한 맛으로 골라 먹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기분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잘 알지 않는가.


이런 사치품은 돈으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을 넘어선다. 일상에서 한가지 사치를 허하는 것은 빡빡한 일상에 촉촉함을 더해준다. 꼭 필요한 만큼만 사고 그렇지 않은 소비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던 것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도 느낄 수 있고 말이다.


일상을 단장해 주면서 내 기분과 일상을 화사하게 해 주는 사치품을 즐기며 살고 싶다. 생활 속에서 작은 만족을 찾고 잠깐 나를 충전해 주는 것들을 곳곳에 배치해 놓자.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을 근사한 것들로 채워 놓고, 그런 것들을 고르고 맛보고 즐기는 여유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말자. 내 삶에도 왕관을 씌워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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