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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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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3일 11시 30분 등록
*이글은 4기 이한숙 연구원의 글입니다.

지난 5월 5일, 작가 박경리가 세상을 떴다. 다음날 모든 신문들이 그의 죽음을 대서 특필했다. 우리집에 배달되어온 신문에도 한 면을 다 할애해 그의 생애를 싣고 있었다. 거기서 읽은 시 한 편, 그가 한 달 전 <현대문학>에 발표한 3편의 신작시 중의 하나,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 집> 후반부) 

<토지> 완간 이후 오래 침묵하던 작가는 2003년 <현대문학>에 스스로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한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건강 악화로 곧 중단하였다. 그리고 위의 시는 결국 그녀가 남긴 마지막 시가 되었다. 

마침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읽고 있던 중이라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는 시의 귀절이 내 눈에 들어왔다.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가 울고 연못의 맹꽁이가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으며 외롭게 혼자 사는 그의 방에는 낮은 책상이 있고 그 위에는 원고지와 펜 하나가 올려져 있다. 목숨이 있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던 박경리, 그에게 문학은,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사마천은 어떤 사람이기에 홀로 적막함 속에서 글을 쓰는 노작가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까. 

먼저 나는 이 두 사람의 역사를 거슬러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박경리, 그는 1926년 10월 28일(음력) 초저녁에 태어났다. ‘나는 범띠생인데 초저녁에 태어났어요. 저녁은 호랑이가 한창 먹이감을 찾으러 다닐 때여서 기가 센 사주라고들 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 팔자대로 산 거 같아요.’ 어느 잡지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 박경리는 아버지의 방랑벽 때문에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야했다. 그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이듬해, 1945년에 결혼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지고 그해 말 남편을 사별한 데 이어 전쟁 직후에는 아들마저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유일하게 남은 딸만은 잘 살길 바랬지만 그 역시 남편(김지하)의 옥바라지로 호된 고생을 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은 단편 ‘계산’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그는 오롯이 글쓰기에만 한평생 매달렸다. 그는 사석에서 ‘나는 슬프고 고통스러워 문학에 몰입했고, 훌륭한 작가가 되기보다 차라리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싶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고통은 그를 처연한 문학의 외줄타기로 내몬 장본인이었던 셈이다. 

<토지> 한 작품만으로도 그는 한국 소설사에서 누구도 건널 수 없는 도도한 대하(大河)를 이루었다. 토지는 단순히 한 작가의 대표작으로 머물지 않는다. 한국의 현대문학이 거둔 최고의 수확이자 극점이다. 집필에만 26년(69년-94년), 권수로 21권이며, 원고지 분량으로는 3만 1200장에 이른다. 등장인물은 700명을 웃돈다. 그런데 놀랍게도 완간한 토지 머리말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제 (완간된) 책이 다시 나가게 되니 마음이 석연찮다. 자기 연민이랄까, 자조적이며 투항한 패잔병 같은 비애를 느낀다.’ 

대작가 역시 자기 글에는 만족이 없다. 그래서 겸손히 한 발씩 앞으로 나갈 뿐인가.

죽기 전 그의 일상은 아주 소박했다. 새벽 2시쯤 일어나 책을 보고 글을 쓴 뒤 동이 터오면 텃밭에 나가 손수 심은 야채들을 정성스레 돌봤다. 99년 강원도 원주 오봉산 자락에 문인들을 위해 창작공간인 토지문화관을 열고 자신 역시 그곳에서 살았다. 평소 친분이 두터워 그곳에 자주 들르던 작가 박완서는 어느 날 그곳 이층 베란다에서 빨랫줄에 널린 수많은 면장갑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술회했다.

"그건 그분의 매일매일의 노동의 흔적이었다. 그렇게 많은 면장갑을 버려놓고도 그분의 손은 늘 투박하고 거칠다. 그 손은 대작을 쓴 손일 뿐 아니라, 찾는 이 누구에게나 후하게 대접한 손이고, 열 마리도 넘는 고양이를 손수 지은 밥으로 먹인 손이고, 밥풀 한 톨 우거지 한 줄기도 함부로 버리지 않은 손이고, 땅 파고 씨 뿌리고 김 매고 거두면서 흙과 깊이 교감한 손이다…그분의 작품이 관념이나 사유가 아닌, 시류의 바람을 타지 않고 생명의 건강함으로 빛나는 것은, 그분의 정신노동이 엄청난 양의 육체노동과 조화를 이룬 것이라는 것을 역력하게 들여다본 것 같았다” 

그럼 낮에는 정직한 땀을 대지에 쏟아 붓고, 밤에는 글을 쓰기 위해 펜을 들던 80세의 노작가가, 달려갈 지표로 삼고 위로를 받았던 사마천은 대체 누구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사마천은 박경리가 토지로 한국 문단이 대들보가 된 것처럼, 중국 최고의 역사서 <사기>를 저술한 작가다. 본기(12편), 세가(30편), 서(8편), 표(10편), 열전(70편), 모두 130편으로 된 <사기>는 상고시대부터 자신의 당대까지 2천 년에 걸친 중국 역사를 다양하게 서술한 대 역사서로 중국의 고전 중에 가장 널리, 가장 감명 깊게 읽히는 책이 되었다. 이 책의 체계는 또한 후세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헤로도투스(Herodotas)가 그리스, 로마 세계의 사서 전통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처럼 사마천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사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사기>중에서도 <사기 열전>은 정수이자 백미다. 사마천은 갖가지 유형의 인간군상의 희비극을 마치 그들이 눈앞에 살아 숨쉬는 듯 생생한 필치로 기록한 열전 70편을 통해 인간의 의지와 운명, 그들이 만들어온 역사의 의미를 묻는다. 무엇보다 사마천은 이긴 자보다 자신처럼 좌절한 자의 운명, 그들에 대한 탐구와 평가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박경리는 사마천의 좌절한 인생, 그의 한 맺힌 울분에 자신을 투사하는지도 모른다. 흉노에 투항한 이릉(李陵)을 변호했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 치욕의 궁형(거세되는 형벌)을 당한 사마천은 절규했다.그는 <사기 열전> 마지막 70편에서 자신이 <사기>를 쓰게 된 발분(發憤)의 경위를 선인들에 빗대 이렇게 쓰고 있다.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어 세상에 <여람>(여씨춘추)을 전했으며,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과 <고분> 두 편을 남겼다…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최고의 역사이자 문학인 <사기>는 사마천의 한이 녹아서 이루어진 역작이다. 그는 스스로의 운명을 <사기>를 쓰는 데 묻음으로써 ‘역사의 조물주’(梁啓超의 표현)가 됐다. 

박경리 역시 그의 한 많은 생을 삭여 <토지>를 쓰는 연료로 삼았다. 박경리는 힘들 때마다 그런 사마천을 생각하며 자신을 다그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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