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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9일 08시 21분 등록

이 글은 변화경영연구소 3기 최정희 연구원님의 글입니다.

 

옷을 샀습니다. 회색 바지가 38,000원, 검정색 블라우스도 38,000원이니까, 총 76,000월을 지불했군요. 왕복 2시간 거리를 걸어갔다가 왔더니 다리가 얼얼합니다. 슬리프를 신고 동행한 딸아이의 발가락은 벌겋게 부풀어 올랐구요.
그런데 그까짓 옷 하나 산 것이 무슨 이야기 꺼리가 되냐구요? 모르는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옷 사는 일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일에 속하지만 저에게는 대단한 결심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생각해보니 최근 몇 년간은 옷을 산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전에 옷을 많이 사모아 두었다거나 하는것도 아닙니다.

이쯤되니 저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군요. 제가 오늘 옷을 산 것이 왜 대단한 용기와 결심이 필요했는지 자세히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책임감 같은 것이죠.

전 성질이 약간 더럽습니다.
조금 자극적인 말이라 생각되시겠지만 우리 반 꼬맹이가 그러더군요. ‘우리 선생님 성질 더럽다구’
그러나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이들을 살짝 꼬집는다던지, 부당하게 야단을 친다던지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니까요.
그러면 왜 제가 성질 더러운 선생님이 되었을까요? 저도 처음에 이 소리를 듣고 당황했습니다. 그것도 저의 면전에 대고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나 처음의 그 당황함이 잠시 후에는 호기심이라는 것으로 변하더군요. 마음이 지극히 평온해지면서 말입니다.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 (음으로 친다면 ‘미’음 정도 될까요?)로 꼬맹이를 불렀습니다.
경험상으로 교사가 먼저 흥분하면 아이들은 마음을 열고 다가서지 않거든요.
아이는 선생님이 불러주는 것 만해도 즐거운지 만면의 미소를 머금고 다가옵니다.
일단 반은 성공한 셈입니다.
몇 마디 일상적인 이야기를 시작으로해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너 조금 전에 선생님 성질 더럽다고 하던데 왜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는 조금 당황합니다. ‘선생님이 어떻게 내가 말한 사실을 알고 계실까?’ 하는 표정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이십 몇 년의 생활지도 경험을 살려 아이를 편안한 마음상태로 돌려놓습니다.
‘아하!’
제가 성질 더러운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 누구도 이야기 해주지 않았고 저 자신 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저의 그 ‘더러운 성질’을 9살짜리 꼬맹이가 찾아 냈더라구요.
“선생님은 선풍기도 마음대로 켜지 못하게 하시잖아요”
“그랬구나, 또 있니?”
“네 많아요. 조그만 한 종이 하나 버려도 당장 주워 오라고 하시지요. 먹기 싫은 반찬 버 리면 또 노란 스티커 주시구요..”
“그래, 선생님 미안하다. 성질이 더러워서”
아이도 웃고 저도 따라웃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지극히 일리가 있더군요.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들어오면 더운 것은 당연하겠지요. 뛰고 달리는 것이 일상인 아이들에게는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는 열기를 품고 있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저는 체질상으로도 그렇겠거니와 27도 까지, 아니 그보다 더 높은 28도가 되어도 별 더운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조금 더운 것은 참고 또 추워도 조금은 참아보자는 주의거든요.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참는 것도 배워보자는 것이지요. 조금 불편한 것은 전체를 위해서 참아보고 우리 전체에게 유익하다면 내가 조금 싫어도 함께하고 뭐 그러한 것이죠.
옷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몇 만원하는 옷은 제가 용기를 부리지 않아도 사 입을 수 있습니다. 덧붙여보자면 새 것이면 사실 저도 좋구요.
그러나 제가 아이들에게 요구하기 전에 저 자신이 먼저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기에 저를 조금 달랩니다. 조카가 싫증나서 버리는 옷을 가져다 입고, 형님이 품이 적다고 주시는 옷 고맙게 받아 입고 그랬지요. 생각해 보니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몇 년전 학급 바자회에서 50원 주고 산 옷이군요.

주위에서 저보고 가끔은 ‘짠돌이“라고 하지만 알고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한 잔 쏠 줄도 알거니와 마음에 드는 공연은 티켓의 가격에 별로 구애를 받지 않고 구입하니까요.

참, 오늘 산 옷 이야기를 잠깐하고 넘어가야겠군요. 지난 금요일로 기억됩니다. 아이 준비물을 기지고 온 학부형 한분이 저보고 이러시더라구요.
“ 우리 정현이가 그랬어요. 교생선생님이 참 예쁘다고”
저는 가슴이 철렁 했습니다. 지난 번 때와는 달리 위기감 같은 것을 느꼈지요.
정현이를 불렸습니다. 그리고 물었지요. 교생선생님이 어디가 그렇게 예쁘냐구요.
“옷도 예쁘고 마음씨도 예쁘고 ...........”
난감했습니다. 이제 곧 ‘교원 평가’ 라는 것도 받는데 이렇게 있어서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옷을 50원 주고 사 입고, 얻어 입는 것도 좋지만 ‘평가’에 낙제점을 받아도 곤란하니까요. 그리고 아이들 행동에도 덜 간섭해야겠네요. 색종이는 귀퉁이 먼저 사용해라. 무엇이든 필요한 만큼만 쓰고 함부로 버리지 말아라. 내가 말하고 있는 이러한 수많은 것들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간섭이고 싫었던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기가 막히게 잘 실천했습니다. 저 가슴이 뿌듯할 정도로 말이죠. 그러나 점차 싫증을 내더라구요. ‘우리 엄마는 대충해도 아무말씀 안하시는데 유독 선생님만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비교’라는 현장체험을 통해서 터득한 것입니다. 맛있는 아이스크림 먹는 것도 싫어하는 선생님을 좋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기야 저희들 살아나갈 미래 사회를 위해서라는 거창한 구호를 부르짖고 있는 저의 마음을 알 리가 없지요.
요즈음 일부 지역 초등학교에서는 학습시간에 필요한 소모품인 학용품은 제공하고 있습니다. 색종이를 비롯한 찰흙, 가위, 도화지 등이 이에 속합니다. 저는 환경적 측면, 경제적 측면 나아가서 나랏돈으로 산 물건이라는 측면에서 철저하게 아껴 쓰도록 지도했지요. 종이 한장 허투루 사용하지 않도록 하고 나무젓가락을 비롯한 1회용 물품은 가급적 사용 못하게 했습니다.
자, 여기까지 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성질 더럽다’라는 소리 들을 만 하지요.

올 2월 제 큰 딸아이 고등학교 졸업식 하는 날 제가 딸에게 2가지 선물을 했습니다.
한 가지는 10만원으로 펀드 계좌를 개설해 준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기아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팔레스타인 소녀를 후원하는 가입 신청서를 준 일이죠. 첫 달 후원금 2만원은 제가 보냈지만 “이제 너도 사회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는 말과 함께 다음 달 후원금은 스스로 마련하여 매달 빠짐없이 보내라고 했지요. 딸아이도 아주 의미 있는 선물이라고 좋아했구요.

오늘 제가 새 옷을 사서 내일 학교에 입고 가면 아이들 반응이 어떠할지 궁금합니다. 아들의 속성이 알록달록 한 것을 좋아하는 지라 회색과 검정색 옷을 입고 가면 새 옷인지 아닌지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저는 최소한의 예의는 지킨 편입니다. 어느 분이 그러시더군요. 교사도 일종의 서비스 직종이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아이들의 비위를 적당이 맞추어 주는 것이 중요 하다구요.
다 옳은 말씀입니다. 아이들 말도 옳고 주위 분의 말도 옳습니다. 그렇지만 옳은 것에도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전체를 위하는 것이 더 우선 순위라는 거죠.

교실 뒤쪽 구석에서 사내 녀석 둘이 뛰고 구르고 야단법석입니다. 가 봐야 겠습니다.

아참! 이 더러운 성질이 키우고 있는 네팔 소년이 벌써 10살이 되었군요. 그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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