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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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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5일 09시 18분 등록

이 글은 6기 연구원 신진철님의 글입니다.

 

어느 날 집을 나섰다. 어딘가로 가고 싶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길을 잠시 따라 걷다가 발이 닿은 곳이 전주천이었다. 그때 그 물길을 따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 물길을 거슬러 오셨다. 당신이 나고 자랐던 곳이, 전주천이 만경강으로 이어져 다시 서해바다와 만나는 곳, 심포였다. 나도 그 아버지를 따라 이곳까지 거슬러 왔다. 그리고 마흔을 이곳에서 살았다. 전주천에 기대어 그 물을 먹고, 그 물에 제 똥오줌을 흘려보내고서 살아왔다. 때가 되면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안다. 강을 거슬러 오르던 연어들처럼 생명을 잇고, 주어진 생명을 다하고 나면 세상의 흐름에 몸을 내어 맡기는 것이 아니던가. 끊임없이 거슬러 오르는 것, 산다는 것이 그런 걸까. 나는 강을 거슬러가는 연어일까 아니면 연어를 품어 안은 강물일까. 흘러야 할까. 거슬러야 할까.

문득 그 길이 궁금해졌다. 내가 거슬러왔던 길. 아니 다시 마흔쯤을 더 지낸 후에 돌아가게 될 그 길이. 미리 돌아가 보기로 했다. 아니 되돌아 가보기로 했다. 누군가 그랬던가. 가야할 길을 보이지 않으면, 왔던 길을 돌아보라고. 겨울바람 찬 그 길을 따라 흘러가기로 했다. 그날은 마흔 네 살, 생일날 아침이었다.

 

대장촌 춘포春浦

하룻길을 걸어 해를 넘기고 느즈막히 닿은 곳이 춘포(春浦)였다. 식당도 모두 문을 닫고, 동네 사거리 슈퍼 옆 선술집에서 소주 한 병에 굴전으로 늦은 저녁을 때우고서야 이름 정겨운 춘포장여관의 허름한 문을 밀고 들어섰다. 지금이야 이름처럼 촌스러운 동네가 되고 말았지만, 만경강 물줄기가 막히지 않았던 시절 배가 오르고, 기차가 닿았던 마을이니 제법 살만한 곳이었을 테다. 춘포의 옛 이름이 대장촌이었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 근처에 ‘호소가와’라는 대지주의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너른 만경평야를 끼고 흐르던 젖줄, 만경강을 따라 기찻길이 놓이고, 벚꽃길로 유명한 전군가도의 신작로가 놓였을 이유를 짐작케 한다. 아직껏 전북도민 열중 일곱을 먹여 살린다는 만경강을 그들이 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길따라, 기차길을 따라 그리고 벚꽃길을 따라 목숨같던 쌀이 흘러가고 멀리 바다 건너 전쟁 중인 목숨들에게 빼앗겼을 젖가슴이었다. 빼앗겼던 들판에도 봄은 다시 오겠지만, 춘포에도 꽃피는 한 시절이 다시 오게 될까.

이제는 뱃길도 끊기고 사람들 발걸음도 예전 같지 않다. 기껏 유명하다는 보신탕 한 그릇들 하러 오는 승용차들 정도가 고작이고, 전라선 복선화 사업을 하는 타지 일꾼들 덕에 춘포장여관도 겨우 문을 닫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인사도 없이 여관을 나서, 배웅할 사람도 마중 나갈 사람도 없는 기차역을 혼자 서 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역사(驛舍)에도 더 이상 기차는 서지 않았고, 까치발 처마에 달린 고드름만 뚝뚝 울고 있었다. 살펴가라며 손을 흔들법한 역장대신 마당 가운데 머리 덥수룩한 가이즈카 향나무가 말없이 낯선 이방인을 배웅했다.

이른 아침 일꾼들 밥 지어 먹이는 식당을 물어 ‘사랑방’ 식당에서 해장국 한 그릇을 든든히 채우고서야 바람만 찬 빈 들녘에 걸음내어 밀 용기가 났다. 백구를 지날 즈음 갑자기 점점이 박혀있던 점들이 날아오르더니 머리 위로 가득 까마귀 울음소리가 채워졌다. 이미 누군가 지른 불길도 지난 자리에 간혹 타다 남은 검은 재만 날렸다. 겨울 들판이라지만 비어있지 않았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였지만 간간이 녹은 얼음 사이를 뒤져 낟알 찾기에 여념이 없던 까마귀들에게 나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몇 개의 다리를 건너고, 어딘지도 잘 모를 제방길을 또 얼마쯤 걷고, 이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작은 동네들도 지나쳐서 익산으로 넘어가는 목천포 다리에 닿은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구제역 때문에 검문보다 방역에 정신이 없는 검문소를 지나, 무작정 파출소 문부터 열고 들어섰다. 쉰 중반을 넘겼을 법한 사내가 놀란 표정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열심히 문서작업을 하던 젊은 의경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파출소 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오는 멀쩡한 젊은 남자가 드문 모양이었다. 그들에게 ‘가까운 짜장면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제야 불순한 의도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두 사내는 서로에게 이 ‘어렵지 않은 민원’을 해결할 수 있는 지를 물었지만, 그들은 내 주린 배를 채우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가끔 시켜먹는 짜장면 집은 머나먼 목천포 다리 건너 익산 쪽에 있는데, 한 그릇을 배달이나 해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별스럽다는 나이 든 사내의 표정에서 심난함이 묻어났다. 머뭇머뭇 따뜻한 물 한잔이라도 얻어먹을까 하다가 굳이 권하지도 않는 정을 청하고 싶지 않았다.

파출소 문을 열고 나와 바람을 피하려고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섰다. 가방을 뒤져 소보로 빵 한 조각을 베어 물고서 잠시 망설였다. 짜장면 한 그릇을 비우러 다리를 건널까 그냥 가던 길을 재촉해서 만경대교가 이어지는 청하까지 갈 것인지. 아침에 먹던 소주생각이 절실했다. 차라리 해가 조금이라도 더 있을 때 길을 걸어 청하면에 가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면소재지니 짜장면집 하나 없을 리가 없고, 운이 좋으면 짬봉 국물 한 그릇에 소주 반병 인심도 가능할 것이었다.

 

해질녘 청하에서

다시 뚝방길을 따라 백여 걸음 쯤 떼어놓자마자 날씨가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슬슬 해가 가리기 시작하더니 다시 눈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뒤돌아서서 걸어온 걸음을 가늠해봤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강물은 흘러온 길을 다시 흘러가지 않는다. 강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고개 돌려 강구경하는 일도 포기해야 했다. 그저 목도리 자락에 입을 파묻고 걸음 옮기는 일만 생각했다. 적어도 청하까지 해떨어지기 전에 가려면.. 때를 놓치지 않고 얼큰한 짬봉 국물 한 그릇 얻어 먹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올해 들어 가장 춥다던 그 길을 잡아 끈 것은 강물도 바람도 아니었다. 그냥 짬봉 국물에 소주 한 잔뿐이었다.

네 시를 조금 넘겨 도착한 청하에는 짜장면집이 두 군데였다. 먼저 도착한 청하반점은 토요일인데도 문이 잠겨져 있었고, 슈퍼에 들러 길을 물어 본 골목 안쪽에 중화반점도 사람이 없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마치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파출소 문도 열리지 않았다. 사람대신 ‘순찰중’이라는 팻말만 날릴 뿐이었다.

“도대체 이 놈의 중은 또 어디를 간겨..”

한 겨울 사람 짜증나게 하는 ‘도로 공사중’ 말고도 또 있었다. 짬봉 한 그릇에 목숨 건 사람처럼 그 조그만 거리를 두어 차례 왔다 갔다 했지만 억울하고 배고픈 사연 들어줄 사람 하나 만나기 쉽지 않았다. 그 얼어붙은 길거리 위에 혼자 죽나 싶었다. 혹시나 하고, 간판이 내려진 식당 건물 문을 밀치고 들어갔더니 익숙한 메뉴판이 아직 벽에 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예전에 하던 식당은 아니었고, 새만금으로 연결되는 도로건설 일을 하는 인부들을 위한 함바집이었다. 대학시절 몇 번 다녔던 노가다 생각이 났다. 짬봉은 안되겠지만, 라면에 소주 그리고 식은 밥 한 그릇이면 그만한 성찬이 또 있을까. 뜨뜻한 아랫목에서 패를 띠고 있던 이모를 졸라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고서야 고향이 어딘지를 물었다. 전주에서 왔고, 청하에 온지는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가. 몸은 또 얼마나 솔직한가. 소주 서너 잔에 취기도 오르고, 배도 부르니 잃었던 농담도 하게 되고, 풀어놓은 아랫배에서 하품이 쏟아져 오르기 시작했다. 넉살좋게 하루 저녁 재워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덮을 이불이 없다며 미안해라 했다. 별도리가 없었다.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 저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굳이 사양하지 않는 손에 웃돈을 조금 더 얹어주고서 배낭을 둘러맸다.

청하에는 잘만한 곳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만경대교를 건너 대아까지 나갈까 아니면 만경으로 들어갈까를 정해야 했다. 아니 내일 아침도 걱정스러웠다. 이렇게 쏟아지기 시작하면 길도 얼어붙을 것이고, 버스나 다닐 수 있을까. 내일 아침 심포항 구경이나 할 수 있을지... 차라리 더 눈길에 갇히기 전에 아예 심포로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핏 새로 지은 모텔 간판을 본 기억이 있었다. 얼마를 졸았던 것일까. 꽁꽁 얼어붙은 길 위에 혼자 남겨둔 채 버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꽁무니를 뺐다. 몸은 아직도 버스 안 라디에이터의 훈풍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발길을 떼어야 했다. 바다로 향하는 길은 늘 바람을 안고 걸어야 했다. 이미 여덟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망해사 넘어 오던 길

심포항에서 늦은 아침으로 백합탕에 소주를 반병 깠다. 이미 보상도 다 끝났고, 5월이면 자리를 옮겨 조개구이를 할 거라는 인상 좋은 젊은 사내에게 값을 치루고, 명함 한 장 대신 받았다. 이미 파도를 잃어버린 바다.. 물길도 끊긴 강물은 배들의 발목을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벚꽃대신 눈꽃이 핀 망해사를 지나 심창초등학교 뒷산에서 잠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누군지도 모를 무덤가에 눈이 녹기 시작했다. 너른 만경평야가 좋아 땅땅거리며 살고 싶었던 이는 죽어 양지그늘 자리에 누웠고, 이도 저도 싫고 술 좋아 하던 이들은 서해바다를 보고 누웠다. 가방을 뒤져 먹다 남은 소주 반병으로 때늦은 고시래를 하고서 산목숨에게도 두어 모금을 부어넣었다.

아마도 이 자리 즈음 되었을 것이다. 월사금 낼 돈조차 없었던 아버지가 점심시간에 빈속을 물로 채우고 시간을 때우던 곳이. 문득 은빛연어가 강에게 제 아비를 묻던 기억이 났다. 아비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은빛연어에게 강은 폭포를 거슬러 오르던 아비의 삶에 대해 들려준다. 강은 그렇게 자신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을 키워내던 품이었다.

머리 깎을 돈마저 없었던 아버지의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였다. 가방대신 책보가 편했다고 하셨지만, 얼마나 부러웠을까. 공책은 있는 집 자식들 사치였고, 신문지, 달력, 회푸대 종이 걸리는 대로 엮어 만든 딱 한권의 공책에 침을 묻혀 가며 쓰던 글씨.

'기영아 학교가자'
'영희야 놀자'

아버지는 글씨 한 자 한 자를 새기면서 부자꿈 대신 가난한 눈물을 삼켰을지도 모른다. 학교가고 싶어서, 놀고 싶어서. 하얀 와이셔츠, 자전거타고 출퇴근 하는 면서기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학교 교문을 피해 울타리 넘어 교실로 도망쳐 들어가곤 했지만, 결국 교실까지 쳐들어 온 훈육주임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잔인한 바리깡은 어제는 남-북통일, 오늘은 동-서화합. 신작로보다 넓은 십자대로가 났지만,

“나 말고도 한 놈이 더 있었어”
“그렇게 깎이다 보면, 공짜로 빡빡머리가 됐어. 머리감기도 좋았지.. 뭐.. 암만..”

이렇게 회상하시던 아버지의 웃음. 배고픔이 만든 오기였을까. 어린 가슴에 맺힌.

심포항이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오학년에 오를 때, 아버지는 돌을 실어 나르는 배의 기관장을 하던 작은 매형을 따라 여수로 가는 배를 탔다. 돈을 벌어야 했다. 술 좋아하는 무지랭이 할아버지와 병약한 할머니를 먹여 살려야 했다. 12살 뱃놈, 초딩 5학년 대신 얻은 아버지의 첫 직업이었다. 그 뒤에 전주로 나와 운수사업이 한참 잘 나가던 시절, 버스 차장질로 시작한 15살 기름밥 청춘이 아버지 인생의 꽃시절이었다.

새 학기가 되면, 아버지는 우리들을 불러 앉히시곤 했다. 새로 받은 책들을 훑어보시고, 지난 달력과 누런 회푸대 겉봉지를 적당히 잘라 책을 싸주셨다.

‘국 어’
‘5-1’
‘신 진 철’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과목과 학년학기 이름을 써주시고는, 마지막으로 필통을 확인하셨다. 검정색 네모난 칼로 한 자루 한 자루를 깎아 주셨고, 몽당연필이 된 것은 볼펜 깍지를 반으로 잘라 끼워서 목숨을 늘려주셨다. 저녁 먹고 시작한 이 의례는 밤 열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삼남매는 각자 책가방들을 꾸리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다. 무슨 뜻이었을까. 당신의 큰 아들이 5학년이 되도록 일 년에 두 번씩 이 연례행사를 직접 주관하시면서 당신은 무슨 말씀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6학년이 되면서부터 이 의례는 없어졌다. 젊은 시절 험하게 부렸던 육신은 솔직한 복수를 했다. 결국 교통사고 후유증을 견뎌내지 못했고, 위암 판정을 받고야 말았다. 대신 우리에게는 ‘기차모양을 한 은빛 하이샤파’가 어린이날 선물로 주어졌다. 신나게 돌리기만 하면 뱉어내는 그 작은 기계는 병든 아버지의 손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동생들은 샤프를 더 좋아했고, 중학생이 된 나는 볼펜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연필 깎을 일이 없어졌다. 책표지를 쌀 일도 없어졌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연필깎는 일이. 그런데 나이가 마흔을 넘기고, 글을 쓰겠다면서 나는 연필을 깎고 있다. 그렇게 지루해하던 일, 제 아비가 하던 일을 자청해서 하고 있다.

 

겨우 만경강 백리길

삼륜차를 타고 전주로 이사를 나오던 기억이 났다. 다섯 살 때 일이었다. 조그만 삼륜차 앞자리에 짐처럼 끼워져 배웅을 나온 식구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고모들 손에 부축해서 나온 할머니가 눈물을 훔쳤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기억이 없다. 차가 꼬막 껍질 깔린 구불구불한 길을 흔들리며 얼핏 타고 놀던 등굽은 소나무를 지나고나서부터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심포를 떠나와 전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가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이나 가졌다. 집이며, 차며, 직장같은 마흔 넷이란 나이에 어울리는 그러저러한 것들을 갖추고 살아 왔다. 참 멀리 떠나온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되짚어 돌아가는 길... 겨우 백리가 조금 넘는 걸음뿐이었다.

얼음이 녹고, 날이 다시 풀리면 언제쯤 아들래미하고 이 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 강에게 제 아비를 묻던 은빛연어 이야기며, 소주대신 찬물로 배를 채우던 제 할아버지 이야기며, 다시 강을 거슬러 폭포를 넘어야 하는 아들의 이야기들을... 나를 키워온 강에게 묻고, 우리를 품어 온 만경강에게 듣고 싶다. 그렇게 강을 따라 흘러왔고, 강과 함께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고작 백 살도 안 되는 사람살이... 꽁꽁 얼어붙은 저 강물의 비밀이 풀리고, 입이 열리는 어느 날,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흐를 것이다. 만경강 백리 길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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