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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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몰락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한 왕국이 있었다. 왕국의 통치자들은 세상을 힘과 권력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라인의 강바닥에 숨겨진 붉은 빛 황금을 차지하면, 그 황금으로 빚어 만든 반지의 주인이 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 속에 함께 감춰진 저주는 알지 못했다. 그 저주가 불러올 전쟁과 배반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만 속죄할 수 있었던 사랑에 관한 이야기. 라인 강이 전하는 서글픈 로렐라이의 노래는 어쩌면 전설 같은 영웅들의 죽음과 참혹한 왕국의 종말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숱한 시간이 흘렀으며, 많은 것들이 강물과 함께 사라졌다. 아픔도 함께 잊혀졌다.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욕망이었다. 마치 꿈틀거리는 괴물 같은 욕망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다시금 감춰진 비밀을 찾아내고, 또 다시 세상을 차지하려했다. 우연인 듯싶었지만 그것은 필연처럼 나타났다. 신화는 역사 속에서 되풀이 되었고, 오랜 전설은 그들의 입을 통해 현실처럼 비쳐지고, 꿈같던 기억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소문처럼 부풀려지기도 했다. 어느덧 이야기들은 사실처럼 굳어졌고, 전설처럼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오랜 세월과 비바람에 닳고 닳은 라인 강변 고성들의 잔해 위에서 다시 피어났으며, 이제 막 라인의 협곡을 지나 강물을 스쳐온 바람이 다시 그 기억들을 되살려 놓았다.
1.
침묵을 안고 흐르는 강, 라인 강 바닥에는 세상의 풍요와 권력의 주인을 기다리는 반지의 비밀이 감춰져 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이야기는 기독교가 유럽세계를 지배하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한다. 한 때 라인 강가에는 하늘의 신들과 땅 위의 거인들 그리고 지하세계의 난쟁이 족들이 세상을 나누어 살았다. 그들은 때때로 다투기도 했지만 대체로 평화로웠다. 서로가 차지한 영역의 경계가 있었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경계를 넘기도 했다. 거인들은 신들이 머무를 발할Walhal성을 지어주었으며, 신들은 난쟁이들의 탄생과 운명을 관장하였다. 난쟁이들은 신들을 경배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들이 점지해 준 운명에 따랐다. 신들은 난쟁이들을 위해 루네Runen 문자의 비밀을 가르쳐 주었고, 아주 이따금씩은 자신들의 운명을 엿보게도 하였다. 난쟁이들과 거인들 간에 다툼이 일면 신들이 중재를 하였고, 신들과 거인들 간에 갈등이 생기면 난쟁이들이 한쪽 편을 들기도 했다. 난쟁이 족인 니벨룽겐의 알베리히가 라인 강가에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그럭저럭 평화로웠다.
라인 강에는 아름다운 요정들이 살았다. 특히 강의 신이었던 라인의 세 딸들은 강이 품고 있는 부드러운 바람과 그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 위로 보석처럼 부서지는 햇빛 그리고 강물의 풋풋한 냄새를 그대로 닮았다. 그들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강바닥에 숨겨진 붉은 황금을 지키는 일을 했다. 그것 말고는 세상의 별다른 근심 걱정을 모르던 세 처녀들은 밝고 명랑했다. 시커멓고 못생긴 난쟁이 알베리히는 처녀들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발을 헛디딘 그가 그만 라인 강물 속에 빠지고 말았다. 장난기가 돋은 세 처녀들은 욕정에 사로잡혀 안달이 난 알베리히를 희롱했다. 그의 귓전에 다가가 달콤한 말을 속삭이다가 미끄러지듯 품을 빠져나갔다. 몸이 달아오를 때로 달아 오른 알베리히의 손은 강물 속에서 미친 듯이 허우적거렸다. 처녀들은 더욱 신이 나서 점점 더 강물 깊은 곳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붉은 빛 황금이 숨겨진 곳을 들키고 말았다. 구름을 벗어난 햇볕이 깊은 강물 속까지 비쳐들자 방금 전까지도 욕정에 빠져있던 알베리히의 눈이 번쩍 트였다. 그는 이제껏 그런 빛을 머금은 황금을 본 적이 없었다. 알베리히는 손에 잡히지 않던 사랑대신 황금을 거머쥐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희롱하던 처녀들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아예 사랑자체를 저주하였다. 때 늦은 후회를 했지만 처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라인의 붉은 황금이 난장이 알베리히와 함께 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모든 신들 사이에 군림했던 오딘은 피할 수 없는 신들의 최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최후의 결전을 위해 발할 성을 지었고, 그 성에 전쟁터에서 죽은 전사들의 영혼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오딘의 천사들인 발퀴레 여신들이 전쟁터의 하늘 위에 머물다가 용맹스럽게 싸우다 죽은 영웅들의 영혼을 발할 성으로 데려왔다. 그들은 이제 곧 닥쳐올 세상의 종말을 맞아 신들의 편에서 싸울 전사들이었다. 오딘은 모든 전사들의 수호신으로 추앙받았다. 한때는 바람을 관장하던 신이었지만, 그는 운명의 실에 얽힌 루네 문자의 마법과 죽음의 비밀을 완전히 터득하게 된 뒤로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이 마법의 힘을 빌어 그는 종종 죽은 예언자를 불러내었고 그로부터 세계의 최후에 관한 예언을 귀담아 듣곤 했다. 쇠를 녹여 칼이 빚어지는 세상이 오고, 칼과 창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판의 바람 속에서 어지러워지자 그는 한 때 최고의 신이었던 티르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는 전쟁으로 세상의 질서를 잡았고, 모든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였다. 또한 전쟁터에서 용감한 영웅들을 보호하기도 했지만, 땅 위의 승패보다는 궁극적으로 신들의 최후를 준비하기 위해 더 노력했다. 평상시에는 더 힘이 세고, 더 용기 있는 자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때때로 싸움의 결과는 예상을 빗나가기도 했다. 특히 발할 성의 전사들이 부족할 때면 편을 가르지 않고 많은 영웅들이 희생되었다. 세상의 끝에서 신들이 치러질 최후의 전투에 나설 전사들은 그렇게 소집되고 있었다. 오딘의 어깨에는 늘 두 마리의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다른 까마귀들이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의 시신을 거두고 있을 때, 후긴(Huginn, 생각)과 무닌(Muninn, 기억)은 새벽이 오기 전에 날아올라 세상 이곳저곳의 소식들을 오딘에게 전해주었다. 그래서 발할 성의 높은 권좌에 앉아서조차 그는 요동치는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지닌 지혜와 마법의 힘에도 불구하고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은 있게 마련이다. 오딘은 이제 곧 닥쳐올 순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딘의 거처이자 죽은 전사들의 영혼이 머무르던 발할 성은 거인 족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거인족의 건축가인 파졸트(Fasolt)와 파프너(Fafner)는 솜씨가 매우 좋았다. 성은 지상에서 신들의 세계로 이어지는 무지개의 끝에 자리를 잡았다. 무려 540개나 되는 문들이 세워졌고, 각각의 문들은 800명의 전사들이 동시에 드나들 만큼 넓었다. 하늘로 높이 솟은 대들보는 수많은 창으로 세워졌고, 천장에는 금빛의 방패들이 덮여졌다. 발할의 지붕위로는 천상의 나무 이그드라실이 자라고 있었으며, 덕분에 성안의 모든 전사들은 사시사철 이그드라실의 푸른 잎을 먹고 자라는 암염소 하이드룬의 젖으로 만든 꿀술을 마실 수 있었다. 가히 신들과 용맹스러운 전사들의 성다운 위용을 충분히 갖추었다. 문제는 이 성을 지은 파졸트와 파프너에게 지불해야 할 대가였다. 그들은 발할 성을 지어주는 대가로 젊음의 사과를 간직한 아름다운 프라야(Freia) 여신을 달라고 했고, 오딘은 그 계약에 서명하였다. 오딘에게 발할 성은 그만큼 급했다. 영원한 젊음을 포기해야 하는 신들이 반발하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발할 성을 짓는 일이 더 중요했다. 신들의 젊음은 프라야 여신이 나누어 주는 사과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신들은 화려한 성을 얻었지만 이제 곧 젊음을 포기해야 했다. 마침내 성이 완성되던 날, 약속대로 파졸트와 파프너가 찾아왔다. 오딘은 솜씨 좋고 성질 사나운 거인족의 건축가들에게 프라야 여신을 내어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순간 꾀가 많은 불의 신 로게가 나타났다. 오딘은 그의 입에서 기가 막힌 어떤 묘책을 기대했으나 엉뚱하게도 그가 들고 온 소식은 라인의 딸들이 황금을 잃어버렸다는 소식이었다. 더욱 나쁜 소식은 황금을 훔쳐간 알베리히가 이미 반지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은 신들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거인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솔깃해진 파졸트와 파프너는 당장에 마음을 바꾸었다. 그들은 영원히 늙지 않게 해주는 젊은 여신보다는 알베리히의 황금이 더 탐났다. “만약 오딘이 자기들에게 알베리히의 황금과 반지를 가져다준다면 프라야 여신을 돌려주겠다”고 말하고선 여신을 인질로 끌고 가버렸다. 오딘의 입술이 바싹바싹 타 들어갔다. 라인의 황금이 난쟁이 알베리히의 손아귀에 들어간 이상 앞으로의 일은 이제 불을 보듯 뻔하였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던 불길한 예언이 드디어 실현되려는 것일까. 이제 곧 세계의 질서가 반지의 주인에 의해 무너질 판이었다. 지금껏 지하세계에 머물던 난쟁이들이 세상을 지배하려 할 것이었고, 그것은 곧 신들과 거인들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오딘은 무언가 손을 써야만 했다. 황금을 잃어버린 채 침묵하고 있는 라인 하늘 위로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막막해진 오딘은 로게와 함께 알베리히를 찾아 나섰다. 어찌했던 무슨 방도를 마련해야만 했다. 예상대로 반지를 손에 넣은 알베리히는 그 반지의 힘을 이용해 많은 재산을 모으고 있었다. 알베리히는 반지뿐만 아니라 어느 틈에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게 해주는 변신투구까지도 손에 넣었다. 땅 속에 살았던 난쟁이 니벨룽겐 족속들은 알베리히의 학대에 시달리며 땅 속의 보물들을 모조리 캐내고 있었다. 알베리히는 그를 찾아온 오딘과 로게 앞에 드러내놓고 자신의 부와 힘을 과시했다. 그의 속셈을 읽은 오딘은 심기가 불편했지만, 이번에도 불의 신 로게가 번득이는 꾀를 내었다. 로게는 알베리히의 자만심을 부추겼다. 그가 부리는 변신의 마법의 힘에 감탄하는 척하며 그로 하여금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변신토록 하였다. 마침내 알베리히가 커다란 뱀에서 작은 두꺼비로 변신하는 순간 오딘과 로게는 그를 사로잡았다. 이번에는 신들이 난쟁이 알베리히를 인질로 잡은 것이다. 신들은 알베리히의 몸값으로 그가 차지했던 보물들과 변신투구 그리고 손가락에 끼고 있던 황금반지까지 받아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서야 자유로운 몸으로 풀려난 알베리히는 발할 성을 돌아 나오며 자신의 손가락에서 오딘의 손으로 넘어간 그 반지에 저주를 걸었다.
“반지를 얻는 자, 저주를 받으리라.”
“마음의 근심이 그를 파먹을 것이며, 결코 죽음을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저주의 말을 중얼거리며 알베리히는 해가 저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오딘은 그 말을 미처 듣지 못하였다.
저녁 무렵에 신들은 이미 어둠이 깃든 발할 성에서 인질로 잡혀갔던 프라야 여신들 앞세운 두 거인을 다시 맞이했다. 거인들의 욕심은 이미 자신들의 덩치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난쟁이들로부터 빼앗은 보물을 다 쌓아놓고도 그 욕심을 채울 수 없었다. 결국 오딘은 변신투구와 라인의 붉은 황금으로부터 얻은 반지까지도 몽땅 내어놓아야만 했다. 반지까지 빼달라는 거인들의 요구에 오딘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 순간 곁에 있던 운명의 여신이 ‘반지에 걸린 저주를 피하라’는 귀뜸을 했다. 잠시잠깐 오딘의 손에 머물렀던 반지는 결국 거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비로소 프라야 여신이 풀려나자, 신들은 다시 젊음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반지를 차지한 거인들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반지는 오로지 하나 뿐이었지만, 반지를 차지하려는 손들은 많았다. 결국 다툼 끝에 파프너가 파졸트를 죽이고 말았다. 반지의 저주가 시작된 것이다. 파프너는 독차지한 보물들을 세상 끝에 숨겨진 아무도 모르는 깊은 동굴 속에 감추었다. 그리고 자신은 변신 투구를 이용해 무서운 용으로 변하여 그 보물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라인 강가에 머물던 세계의 질서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신들과 거인들 그리고 난쟁이들 간의 힘의 균형이 깨졌고, 욕망의 어둠이 간신히 유지되어왔던 평화를 삼켜 버렸다. 황금을 잃어버린 라인 강에는 어둠같이 깊은 침묵이 흘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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