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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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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6일 01시 29분 등록

3.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엔키는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인간을 비롯한 지상의 모든 생명을 남김없이 쓸어버리려는 신들의 음모는 주도면밀하게 진행되었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이번만큼 엔릴의 각오는 단단했다. 마지못해 침묵했던 자신이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신들의 비밀을 알려야만 했다. 신들의 결정을 되돌릴 수도 막을 수도 없다할지라도 최소한 다시 시작해 볼 무언가는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자신과 닌투 그리고 수메르 신들 모두의 축복 속에 창조되었던 인간들이 아니었던가.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엔키는 지우수드라를 떠올렸다. 그라면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것이고, 자신의 뜻을 이해할 것이었다. 엔키는 잠들어 있던 지우수드라의 꿈속으로 찾아들었다. 목소리는 비밀스러웠고, 조심스러웠다.

 

갈대 벽, 갈대 벽, 벽, 벽...

갈대 벽에서 듣거라. 귀를 기울여라.

슈루파크의 사람아, 우바르투투의 아들아.

집을 허물고, 배를 만들어라.

풍요를 버리고, 그대의 생명을 구하라.

재물을 버리고, 생명을 보존하라.

그대는 모든 생명들의 씨앗을 배에 실어라.

그대는 크기를 잘 재어서 배를 만들어라.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똑같도록

압수에 씌여진 것처럼 지붕을 만들어라.

 

지우수드라는 충실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목소리대로 따랐다.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가로와 세로가 각각 60미터인 커다란 배를 만들었다. 육층을 두고 일곱 칸으로 나누고 다시 중앙을 아홉으로 나누었다. 소를 잡고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고, 일꾼들에게는 술을 주었다. 그리고 서둘러 배가 완성되자 모든 산 것들과 그들의 씨앗들을 싣고 친척들과 가족들을 태웠다. 모두 엔키의 뜻 그대로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배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때가 되었다. 새벽녘에 태양신인 우투가 하늘의 어둠을 걷어내기 시작하자 신들은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먹구름을 몰고 왔고, 천둥소리를 울려대기 시작했다. 하늘의 물꼬가 일시에 터졌고, 강과 수로의 물이 순식간에 넘쳤다. 빛은 다시 어둠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고, 어둠 깊은 속에서 바람이 대지를 찢어 놓았다. 강물은 울부짖는 아우성들을 집어 삼켰고,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물속으로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그 무엇도 볼 수 없었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켜보던 신들마저도 아연질색을 하였다. 차마 그런 지경이 되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 후였다. 기가 막힌 안이 하늘로 돌아가 버렸고, 사랑의 신 인안나가 비명을 질러댔다. 다른 신들도 눈물을 감추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섯 날, 여섯 밤 동안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홍수와 폭풍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신들도 외면한 땅 위에 인간들은 모두 진흙으로 돌아가 버렸다.

 

일곱째 날이 되었다. 비로소 바다가 잠잠해졌고, 바람이 그쳤으며, 폭풍도 멎었다. 지우수드라는 배의 창을 열었다. 쪽 창으로 빛이 비쳐들었고, 바다 끝으로 수평선이 이어졌다. 비둘기를 날렸다. 쉴 곳을 찾지 못한 비둘기는 금새 되돌아왔다. 얼마 후에 다시 제비를 날려 보냈다. 앉을 곳이 보이지 않자 제비도 이내 되돌아왔다. 세 번째로 까마귀를 날려 보냈다. 까마귀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지우수드라는 배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딛었다. 먼저 제사를 준비했다. 술을 차려놓고 향을 피웠다. 절망 같은 죽음의 땅에서 다시 피어오른 향내를 맡은 신들이 서둘러 모여들었다. 인안나가 먼저 닿았고, 엔키가 왔으며, 엔릴도 뒤따라왔다. 엔릴은 신들의 분노를 피해 살아난 생명이 있음을 알고 화를 내려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신들이 외면했다. 엔릴은 더는 엔키를 추궁할 수 없었다. 엔릴 자신도 이미 한편으로 깊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대신 엔릴은 수메르의 모든 신들과 지우수드라를 포함하여 살아남은 지상의 모든 생명들을 축복하였다. 그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쪽 하늘 위로 무지개가 떴다. 이제 살아남은 모든 것들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며 신들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다시는 강물로 지상의 인간들을 쓸어버리는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었다. 지우수드라는 그의 가족과 더불어 머나 먼 강들의 입구, 딜문의 땅에서 신들처럼 오래오래 천수를 누렸다. 그의 소식은 먼 훗날 그를 다시 찾아온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시를 통해 전해지게 되었다.

 

4.

1872년 11월, 새로 조직된 영국의 성서고고학협회는 흥분에 도가니에 빠졌다. 바로 얼마 전 영국박물관으로 옮겨진 고대 앗시리아의 점토판에 관한 보고서 때문이었다. 점토판에 빠져 지내던 ‘조지 스미스’는 홍수에 대한 새로운 기록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믿기지 않는 그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기원전 3천 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였다. 그때까지 알려졌던 노아의 홍수보다 훨씬 더 이전, 그야말로 대홍수에 관한 인류 최초의 기록일 수 있었다. 세상은 호기심을 가지고 주목하였고, 발굴 작업이 추가로 진행되었다. 고대 바빌로니아 도시 니푸르와 우룩의 도서관으로 짐작되었던 터에서는 수많은 점토판들이 쏟아져 나왔다. 메소포타미아의 진흙 뻘 속에는 인류의 오래된 기억들이 묻혀있었다. 발굴된 점토판들에는 수메르의 신화뿐만 아니라 앗시리아의 설화 그리고 길가메시의 서사시들이 적혀있었다. 이야기들은 인간 이전의 시대, 까마득히 오랜 옛날 신들의 시대를 전하고 있었다. 두려운 순간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메소포타미아에 범람한 유프라티스와 티그리스 강의 홍수이야기가 아니었다. 신들에 의해 탄생된 최초의 인간과 신들에게 대항한 인류의 끔찍한 비극에 관한 서사시였다.

 

시간은 거꾸로 거슬러 흘러갔고, 감춰졌던 비밀의 빗장이 열렸다. 역사는 다시 쓰여지게 되었다.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던 인류의 기억 속에 강, 풍요의 이면에 감추어진 신들의 음모가 함께 되살아났다. 홍수는 인간의 저항에 대한 신들의 분노였고, 인간의 깊은 기억 속에 그것은 두려움으로 각인되었다. 신들의 분노 앞에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신들의 생명은 무한하고, 인간의 삶은 유한했다. 신들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죽었고, 그들의 나라들도 사라졌다. 강변에 자리 잡았던 도시들은 폐허로 남았다가 강바닥 깊은 곳에 소리없이 묻혔다. 불멸한다던 수메르의 신들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는 것은 강물뿐이었다. 그리고 기억에서 기억으로, 다시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며 바람같이 떠돌던 이야기들이 점토판 위에 새겨졌다. 그리고 몇 천 년 시간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마침내 강이 간직한 모든 기억들과 함께, 신들과 인간의 오래된 인연도 되살아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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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8 13:46:25 *.236.3.241

점토판이 수 천 년의 세월에서 이야기를 건졌네. 점토판이 이야기의 방주네~~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도, 인간도 아니네. 자신들의 실수를 비의 장막으로 거두려 한 신들과

그들의 실수를 기억한 댓가로 멸종될 뻔한 인간. 그 모두가 강의 흔적인 진흙뻘 속에서 잠자고

있었으니 강이 결국은 세계의 배후가 되는 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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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9 23:26:26 *.168.120.232

ㅎ 댓글이 늦었네..

오래된 비밀이 풀렸으니.. 이제 막 쏟아지겠지.. ㅋㅋ

기대해보셈. 타임머신의 계기판을 잘 맞추지 않으면

좀 정신이 없을지도 몰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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