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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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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9일 07시 56분 등록

1.

신들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수메르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고의 일곱 신들이 모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엔키는 긴장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인가. 회의를 소집한 엔릴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다른 신들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엔키는 잠시 생산의 여신인 닌투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 역시도 내용을 알지 못하고 불려온 눈치였다. 회의장에는 엔릴을 가운데 두고 바로 오른쪽에 하늘신인 안(An)이 자리를 잡았고, 나머지 신들이 각자의 서열에 맞추어 자리를 잡았다. 엔키가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엔릴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베어 있었다.

 

인간들을 없애려는 엔릴의 의지는 집요했다. 그는 두 강의 사이, 메소포타미아에 강물처럼 불어난 인간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역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비를 관장하는 신을 시켜 가뭄을 불러오기도 했다. 강물이 줄었고, 땅은 메말랐다. 기근이 들었고, 사람들이 굶주렸다. 그렇지만 인간을 구하려는 엔키 또한 지혜로웠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 저승신의 마음을 달래도록 하였고, 비를 관장하는 신에게 동정을 구하도록 했다. 엔키의 적극적인 방해로 엔릴의 의도는 매번 빗나가고 말았다. 엔키의 마음은 착잡했다. 자신과 닌투 여신의 손으로 빚은 인간들을 없애려는 신들의 분노가 안타까웠다. 언제부터인가. 신들과 인간 사이의 평화로웠던 시절은 끝이 났고,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잦아지고 있었다. 그 갈등의 깊은 고리는 신들의 세계로까지 이어져, 엔릴과 엔키 그리고 수메르 최고신들 사이를 복잡하게 얽어 놓고 있었다. 인간들의 운명이 점차 위태로워지고 있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회의의 결정은 비밀에 부쳐졌다. 엔릴은 치밀했다. 이미 그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닿아 있었고, 이번만큼은 머리카락만큼의 여지도 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엔릴은 회의에 참석한 모든 신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걸고 비밀을 맹세케 하였고, 두 번 세 번 다짐을 받아냈다. 하늘의 신 안도 회의 내내 침묵을 지켰다. 더 이상 인간들을 위해 엔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보였다. 이따금씩 신들의 고함소리가 천둥처럼 울렸고, 신들의 분노가 구름 뒤에서 번갯불처럼 번뜩였다. 폭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2.

주인이신 하늘 신(An)이 하늘을 밝게 하였으며

땅은 어두웠고 저승에 눈을 두지 않았다.

골짜기에 물이 흐르지 않았고

무엇도 생기지 않았으며

넓은 땅에 밭고랑도 없었다.

....

하늘과 땅은 서로 왕래하지 않았고,

하늘은 땅을 아내로 택하지 않았다.

달이 비치지 않았으며

어둠이 와서 걸려 있었다.

좋은 땅에 풀과 약초가 스스로 자라지 않았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흐르는 땅, 메소포타미아는 인간보다 신들의 선택을 먼저 받은 곳이었다. 옛날 옛적 신들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하늘과 땅이 생겨났고, 대기와 비, 구름 그리고 대지에 강이 흘렀다.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강줄기는 넷으로 갈라졌다. 강물들은 각자 흩어져 퍼지기도 하고, 넘쳐 흐르기도 했으며 화살처럼 빨리 흐르기도 하고,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저마다의 모습처럼 강들은 비손, 기혼, 헷데겔 그리고 유브라데라고 불리었다. 네 줄기 강은 높은 산과 넓은 구릉지대를 따라 골짜기를 이루며 모두 에덴의 동쪽으로 흘러갔다. 그중 힛데겔은 달리 티그리스 강으로 불렸고, 유브라데는 유프라테스 강으로 알려졌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신들은 바로 이곳,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머물렀다.

 

해마다 봄이 오면 비는 강을 범람케 했고, 강물은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은 퍼 날랐다. 강바닥에는 오랜 세월동안 침적토가 쌓였다. 홍수를 막고 농사를 짓기 위해 누군가 매년 강바닥과 수로에 쌓인 침적토를 퍼내야만 했다. 지위가 낮은 ‘이기기 신’들에게 그 일이 맡겨졌다. 이기기 신들은 운하를 파서 강물을 끌어와야 했고, 매년 막힌 수로를 다시 뚫어야 했다. 지겨운 일이었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아눈나키의 신’들 중 하나인 엔릴이 그 일을 관리하고, 감독했다. 땅은 풍요로웠지만, 일은 고되고 힘들었다. 신들의 불만이 둑방에 퍼올린 흙처럼 쌓여갔고, 그 위에서 지위가 높은 신들에 대한 불평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홍수는 해마다 되풀이 되었고 신들도 지쳐갔다. 고역 같은 노동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수메르의 지위가 낮은 신들의 분노가 홍수를 이기지 못한 둑방처럼 터지고 말았다. 그들은 땅을 파던 삽을 집어 던지고, 흙을 나르던 삼태기들을 모아 불태웠다. 신들은 엔릴의 신전으로 쳐들어갔고, 그의 처소를 에워쌌다. 전쟁이 대문 앞까지 들이닥쳐서야 엔릴은 겨우 상황을 알아차렸다. 급히 신들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엔릴은 이 시끄러운 지상의 일을 때려치우고 하늘로 돌아가고 싶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최고의 신인 안이 엔릴을 달래며 그들의 고통을 껴안으라 했다. 안의 생각을 지혜의 신인 엔키가 읽었다. 엔키는 생산의 여신인 닌투로 하여금 신들의 노동을 대신할 사람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아눈나키 신들이나 이기기 신들 모두가 동의했다. 이로써 신들 간의 불안한 갈등이 일단락되었고, 메소포타미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을 창조하기 위한 작업은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일이었다. 지능이 뛰어났던 신, ‘웨일라’가 선택되었다. 초하룻날, 초이렛날 그리고 보름날에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한 신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성스러운 의식이 시작되었다. 신들의 신성한 의식 막바지에, 웨일라는 희생되었다. 그의 살과 피가 진흙에 섞었다. 닌투는 새로 만들어질 생명이 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잊지 말라고 자신의 혼을 불어넣었다. 수메르의 모든 신들이 돌아가며 자신들의 침을 뱉어 진흙에 버무렸다. 잘 버무려진 진흙덩이는 다시 열 네 덩이로 나뉘어 각각 출산의 여신들 자궁 속에 놓여졌다. 열 달이 지난 후 사람이 나왔다. 남자가 일곱, 여자가 일곱이었다. 신들은 모두 기뻐하였고, 자신들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탄생을 축복하였다. 인간은 신들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필요한 지능을 받았고, 신들로부터 혼을 부여받았다. 최초의 인간, 룰루(Lulu)는 신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들로 태어났다.

 

강은 다시금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땅은 비옥했고, 신들의 축복을 받은 인간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들은 이제 신들을 대신하여 새 호미와 삽을 만들었고, 커다란 운하를 팠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으로부터 끌어들인 강물은 혈관처럼 대지의 곳곳으로 흘러들었고, 목말랐던 대지가 몸을 적셨다. 흘러든 강물로 인간들은 농사를 지었고, 가축을 키웠으며, 신들을 위한 음식을 마련했고 제사를 지냈다.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신들은 자유로웠으며, 인간들의 숭배로 신들은 더욱 행복해졌다. 지상에는 신을 찬양하는 노랫소리가 널리 퍼져나갔고, 도시마다 신들을 모시는 신전들이 세워졌다. 도시의 크기가 신들의 위계를 결정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신들은 경쟁을 벌였고 더러는 다투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들과 인간들의 사이에는 평화로운 시절이 얼마동안 계속되었다. 신의 지능을 물려받은 인간들은 이제 신들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알아서 짝을 지었고, 자신들을 닮은 생명들을 생산해내었다. 인간들은 날로 늘어났고, 사는 땅도 점차 넓어져 갔다. 이제 메소포타미아에는 사람들이 강물처럼 차고 넘쳐났다.

 

엔릴은 불안하였다. 신들보다 더 늘어난 인간들의 숫자가 그를 불편하게 했다.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일이 끝나면 잠들기 전까지 먹고 마시고 떠들어댔다. 사람들은 점차 신들을 닮아갔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일만하지 않았다. 인간들의 불평이 늘어가더니 차츰 소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 소동은 엔릴의 오랜 기억 속의 두려움을 되살아나게 했다. 순간, 아찔한 생각 하나가 스쳐갔다. 그들이 누구던가. 지난 번 이기기 신들의 폭동에 앞장을 섰던 웨일라의 피와 살로 만들어진 존재들이 아니던가. 어찌 그 생각을 미처 못했더란 말인가. 그것이 실수였다. 차라리 지능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엔키의 말을 듣지 않았어야 했다. 사람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싶었다. 사람을 만들자고 제안했던 엔키의 의도 속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비록 지금은 자신에게 밀려 강의 하류에 머물며 지하수를 관장하고, ‘강이 바다로 이어지는 빗장’을 쥐고 있다지만, 한때 엔키는 자기보다 더 많은 권능과 인기를 가졌던 존재였다. 더구나 지혜의 신인 엔키의 속을 엔릴으로서는 다 헤아려 볼 수 없었다. 걱정과 근심이 의심을 낳았고, 두려움은 날로 커졌다. 불면의 밤이 늘어갔다. 점차 커져가는 인간들의 소란을 더는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 없었다. 지난번처럼 당하기 전에 먼저 근심의 뿌리를 뽑아야 했다.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엔릴은 수메르 최고신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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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11:07:40 *.42.252.67

풍요를 가져다 주는  푸근한 강.

오늘 아침엔 비가 주룩주룩 내리니 강물 줄기가 더 힘차겠구나 생각이 드는 아침!

그대의 글을 읽으니  떠났다 돌아 온 유럽의 강들이 눈 앞에 넘실대는 아침.

 

이 글은 강이야기야? 신화이야기야?

오호 짬뽕이로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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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14:29:42 *.47.39.151

동기들의 댓글이 달리니 힘이 나누만....ㅎ

강이 가진 키워드를 신화와 역사 그리고 문학 속에서 뒤져서

꺼내봤습니다. ㅎ 재밌게 읽어주시길..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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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11:44:28 *.1.160.49

삼년만에 저도 제 안의 일곱 신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공과를 묻기전에 먼저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찐하게 안아주는 의식부터 치르게 할 생각입니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굳이 상처를 나눌 이유도 없었다는 걸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아무리 읽어도 이글, 제게는 진철이라 불리는 한 사내의 문명이야기로 밖에는 읽히지 않는데...

오빠, 맞죠? 맞는 거죠?

 

별안간 궁금증에 몸이 달은 묙이었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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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14:39:38 *.47.39.151

일단 지난 주부터 연재했으니.. 그것도 한번 읽어보시고.. 담주에 이어질 후편까지도 관심가져주셈...ㅎㅎ

인터넷에 올리는 글의 분량이 너무 길면 보기에 부담시럴거 같아서.. 나누어서 올리기로 했삼..

강에 대한 인류의 오래된 기억을 찾아가다보니... 강... 문명... 신화까지 거슬러가게 되드망...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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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13:06:01 *.236.3.241

1편으로 봐서는 신화 이야기인지, 문명 비판인지, 아니면 예전 '섬진강' 처럼 개인적인 소회를 담은 에세이인지 감이 오지 않는구나.

코멘트는 2편까지 읽어보고 올릴게. 하여간 오랜 시간 숙성한 진철이의 역작을 읽을 수 있게 되어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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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14:33:51 *.47.39.151

이번에 올리는 글은 재작년에 썼던 개인적인 소회를 담은 글은 아니고,

작년부터 새로 쓰기 시작한 글여...

경계와 두려움, 풍요와 욕망, 치유와 성장 그리고 공존이라는 카테고리를 염두에 두고..

일단 꼭지글들을 써보고 있삼. ㅎ 좋은 댓글 부탁..요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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