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연구원의

변화경영연구소의

  • 경빈
  • 조회 수 3486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12년 8월 21일 08시 54분 등록

오만한 예술가의 초상 - 샤를르 보들레르

 

ECO.jpg

 

나의 인생은 저주받았다.

 

나의 꿈은 그저 돈 걱정 없는 백수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비록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퇴학생 신분이었지만, 한 번도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결국 부모님이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던 것도, 원치 않던 법학을 버리고 문학을 택했던 것 모두 누군가 나에게 내린 저주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만 전 세계를 다니며 부르주아적인 사교계에서 호들갑떨면서 댄디와도 같은 삶을 살며 소비하기를 바랬을 뿐이다.

 

내 이름은 샤를르 보들레르. 1821년 4월 파리에서 출생했다. 내가 태어났을 당시, 나의 아버지는 62세였고, 엄마는 28세였다. 둘의 나이 차이는 34살. 아버지는 두 번째 결혼에서 나를 낳았다. 아버지는 원래 신부였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께서는 귀족 집안에서 생활한 덕분에 상류사회의 세련된 예의와 사교 분위기를 몸에 익혔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유롭고 철학적인 귀족들과 화가들 사이에서 성장했고,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유로움 때문인지, 신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파계하여 1797년 첫 결혼을 하여 나의 형인 알퐁스 보들레르를 낳았다. 나의 이복형이다. 그러나 부인이 돌아가시자 1819년 나의 엄마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의 엄마의 양부도 환속한 신부 출신이었고, 나의 아버지와 친구사이였다. 어쨌건, 나의 아버지는 내 나이 6살 때 돌아가셨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다. 파리 시내의 여러 미술관들을 산책하며 그림에 대하여 이야기했던 추억이며, 신부였던 아버지의 위엄과, 예술을 향한 사랑, 그리고 나지막히 나에게 속삭여주던 이이이야기를 말이다. 내가 처음 문학을 시작하였던 것이 시(詩)가 아닌 미술평론에서 시작했던 것도, 어쩌면 미술 애호가이자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845년의 미술전 평』으로부터 시작한 미술평론을 기반으로 시와 예술에 대한 나의 미학을 깊이 있게 밝히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재혼을 하시기까지의 몇 년 동안, 나는 엄마의 애정을 듬뿍 받은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한다. 그러나 엄마는 이 시절을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시간으로 기억하셨던 것 모른다. 전 부인과의 사이에 난 아들과, 나를 데리고 어떻게 미래를 꾸려가실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다. 배 다른 두 명의 아들을 둔 엄마는, 육군소령 출신인 ‘오픽’씨와 결혼한다. 나는 그를 결코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그저 오픽씨라 부를 것이다. 오로지 나 혼자 독차지 할 줄만 알았던 엄마와의 좋은 시절도 짧게 끝나버리고 아버지를 잃은 상실과 엄마의 품을 빼앗긴 배신감이 의붓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엄마에 대한 질투와 결합되어 부모에 대한 냉담으로 전이되었다.

 

나는 명문이라 불리는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문학수업이었다. 문학에 대한 관심은 성적으로도 이어졌다. 전국 라틴어 경시대회에서 첫 해 장려상을, 두 번째 해 2등을 연속 수상하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이 나를 문학으로 이끌게 된 계기를 마련한 것 같다. 문학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나는 관심 분야를 문학 뿐 아니라, 이 시기부터는 미술평론으로 발전시켜나갔다. 이내 나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Eugene Delacroix 의 작품에 빠지게 된다. 그의 작품은 나의 오감을 자극시켰으며, 학생 문예지 등에 그를 향한 글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빅토르 위고와 고티에의 시도 이 시기에 접하게 된다. 생트 뵈브의 시를 모방해 습작도 했다. 이 무렵 피레네를 여행하면서 영감을 얻은 시는 『악의 꽃』에 포함된 <저 높은 저 높은 곳에>라는 시로 태어나기도 한다. 기억하건대, 나는 이미 열다섯 살부터 심연에의 유혹을 느꼈고, 여인의 한숨을 환히 꿰뚫어 보았으며, 내 삶의 저주와 권태감을 느꼈다.

1839년, 내 나이 열여덟 살. 학교 교장은 부모님께 나의 퇴학처분을 통고하는 서신을 보냈다. 학교 교장이 내 친구로부터 받은 쪽지를 본인에게 가져오라고 명령했음에도, 그냥 무시하고 입에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교장을 보며 이야기했다. ‘내 친구와 나의 비밀을 공개하느니 차라리 내가 처벌을 받겠습니다.’ 라고.

 

교장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학생은 뛰어난 자질을 타고 났으나, 무척 나쁜 정신으로 인해 망가져서 본교의 훌륭한 질서에 해를 끼치는 일이 빈번하여 귀하께 돌려보냅니다. 본인의 유감의 뜻과 귀하에 대한 경의를 드립니다.

 

피에르 교장.

 

 

퇴학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에 부모님께서는 약간의 충격을 받으셨지만, 나의 의붓아버지인 ‘오픽’씨께서는 오히려 친구를 위해 신의를 지켰다는 명목 하에 받은 퇴학이라 차라리 이것은 ‘훈장’이라고 나에게 말해주셨다. 그런 위로도 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는 사실 보다는, 무엇인가 사회라는 틀에서 벗어난 느낌. 금 밖으로 벗어난 이에 대한 사회의 조롱과 시선을 나는, 어린나이에 이미 알아버렸다. 나는 어떻게 하든 퇴학 처분이 부당하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다. 경제적으로 별 문제가 없어 보였던 부모님께서는 가정교사의 지도하에 대학 입학시험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은지 6개월이 지난 뒤, 나는 당당히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 소식을 들은 날, 우연히도 의붓아버지의 승진 사실도 결정되었다. 사람들은 아버지와 나, 모두에게 축복 받은 날이라고 입바른 소리를 해댔다. 그러나 대학입학이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퇴학 처분을 무마하기 위한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속해 있던 집과 학교, 그리고 공동체라는 울타리가 답답하게만 느껴졌을 따름이다.

 

부모님의 바램에 따라 전공은 법학을 선택했다. 그들은 내가 대사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학교 수업은 거의 듣질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반항심이 가득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냥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을 따름이다. 똑 같은 삶, 똑같은 수업, 틀에 박힌 사고와 규율들이 나의 목을 조여 왔다. 나에게 웃음 지으며 속삭였던 것은 생트 뵈브의 시, 빅토르 위고의 소설, 그리고 들라크루아의 미술작품과 여인의 웃음소리, 그리고 해시시라 불리던 마리화나였다. 나는 제랄드 드 네르발, 귀스타브 르바바세르, 필립 드 쉔느비에르, 에르네스트 프라롱, 쥘 뷔송 들과 ‘노르망디파’라는 문학 동호회를 만들어 함께 몰려다녔다. 그들과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문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때로는 누가 더 멋진 옷을 입었는지 서로 자랑도 하고, 함께 홍등가에 가서 사팔뜨기의 한 창녀 ‘사라’를 사이에 두고 질투를 느끼기도 하였다. 마리화나와 창녀, 쾌락과 당시 퇴폐라 불리던 삶의 어두운 짜릿함은 후에 내가 시집 『악의 꽃』을 집필하는데 많은 자양분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나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나에게는 무척 자연스럽고 편안함을 주었지만, 반대로 엄마와 의붓아버지께는 당혹스러움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그 둘은 궁합이 어찌나 잘 맞으신지!) 독단적으로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해 버리셨다. 내가 강의를 거의 들은 적이 없고, 노르망디파 친구들과 어울리며 집에도 잘 가지 않자, 그들은 나를 해외여행을 보내 파리의 환락가로부터 멀리 떼어놓을 작정을 하셨다. 그들의 이런 결정 이면에는 내가 고등학교 퇴학을 맞고도 그들이 가정교사를 얻어 결국엔 내 대학입학을 시켰다고 생각한 그들의 착각이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의사를 밝혔으나, 이미 오픽씨는 대사 친구들에게 나의 여행을 알리고, 내가 그 여행을 통해 어떠한 결론을 얻어야 한다고 미리 결정해 버리신 상태여서 이미 되돌리기 어려웠다. 나는 오픽씨가 내 친부라도 이런 일을 나에게 했을까, 라고 의문을 품기도하고 주위에서도 물어보았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은 반대로 이런 아버지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론몰이 해댔다.

 

1841년 6월9일. 나는 인도의 캘커타로 가는 배에 탑승했다. 나는 배 안에서도 혼자였다. 이미 아버지 권력의 수하인이었던 선장은 나에게 연신 굽신거렸지만,  내가 결정한 여행이 아니었으므로 마음을 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몇 박 며칠간의 항해 끝에 배가 아프리카 동쪽의 모리스 섬과 부르봉에 도착하자, 나는 이제껏 내가 만나보지 못했던 열대 지방을 이국적인 정취에 흠뻑 빠져들었다. 인도 여행에서 얻은 가장 커다란 수확이라면, 후에 내가 창작한 시에 등장하는 열대 식물, 원색의 향기, 게으름과 이국 여인들에 대한 소재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는 것일 것이다. 특히 모리스 섬에 머물고 있을 때, 모리스 섬 총독 오타르 드 브라가르 씨 집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오픽씨가 미리 정치적인 압박을 가한 덕택에 나는 그들의 집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훔쳐간 것은 그들의 친절이 아닌, 총독의 부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의 시를 써서 보냈다. 물론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정성껏 나를 ‘모신’ 부부의 부인에게 ‘사랑한다’는 소네트를 보냈으니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는 나를 미쳤다고 생각했을 법도 했겠지. 그러나 그렇게 시를 쓰도록 유도한 것은 나의 이성이 아니라 나의 감성이었다. 시도 보내버리지 못하고 죽느니 시를 써놓고 대상자에게 보내버리자는 순간적인 즉흥성이 나를 압도했다. 결국, 나는 더 이상의 여행을 진행할 수 없었다. 규율을 거부하는 나의 즉흥성이 여기에서도 발휘했다. 후에 『악의 꽃』 중 61번째 시인 <식민지 태생의 귀부인에게>에 나의 추억 속의 부인을 기리는 의미로 기록했다.

 

나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프랑스 보르도로 돌아갔다. 내 인생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긴 여행이자 이후 나의 시상에 강렬한 이국적 정취와 관능과 향기를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

 

 

 

 - 이 글을 2기 연구원 정재엽(smilejay@hotmail.com ) 의 글입니다.

IP *.216.38.18

프로필 이미지
2012.08.25 21:23:07 *.75.12.25

네 작가에 대한 생애 잘 읽었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가정의 생활 속에서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가족간에 이루어진 일들 축음, 이혼 , 학교 등의 얼키고 설킨

문제들 속에서 환경을 무시 할 수는 없지만

그 터널을 뚤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