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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6일 11시 15분 등록

이 글은 4기 연구원 정예서님의 글입니다.

 

왜 그렇게 아까부터 빤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소. 아직도 토끼눈이구려. 내가 당신 앞에 앉아 있는 것이 그렇게 놀랄만한 일인가요. 방해하지 않을 것이니 따듯한 얼그레이 티나 한잔 주고, 바쁜 것처럼 보이는 하던 일이나 계속하시오.

 

먼 길을 왔더니 몹시 피곤하구려. 내가 왜 왔는지 아직도 궁금하오. 당신이 나를 그렇게 불러 대는데 내가 어떻게 오지 않을 수 있었겠소. 당신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그 변화경영 연구소 동기들이 밤마다 얼마나 질문을 해대던지, 편안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소. 그리고 그중에 당신이 나를 붙들고 가장 쩔쩔 매는 것 같아 도대체 어떤 모자란 사람인지 궁금해 오게 되었소.

 

아참, 질문은 사절이오. 그만큼 질문을 해댔으면 이제 성이 차지 않았소. 그러니 질문은 내가 하겠소, 그도 싫다면 나는 이 카우치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이리다. 내가 궁금한 것은 당신은 책도 깊이 읽지 못하고, 타자도 빠르지 않으면서 지문은 왜 그렇게 많이 쓰는 것이오. 아하, 깊이 읽지 못해 필사를 하는 것이라구요. 그러니까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길게 쓰는 것이군. 당신도 필사의 힘을 믿는구료. 이제사 이야기지만 나도 책을 처음 쓸 때 필사를 했었소. 국문학을 전공하는 당신은 제임스 조임스를 알고 있겠지요. 나는 그의 작품, 율리시즈를 즐겨 읽었고, ‘더블린 사람들’ 을 한때 필사하기도 했었소, 이곳의 작가 신경숙이도 최인훈이나 오정희의 작품을 필사하며 작가 수업을 했다고 하지 않소.

 

신화를 좋아하지 않아 나를 몰랐다던, 당신이 신화의 힘을 읽으며 내게 도발 당했다더니, 동양의 신화를 읽을 때는 내내 표정이 좋지 않던데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오.

 

아하, ‘동양의 신화’에서 내가 일본까지 왔다가 되돌아갔다고 섭섭했던 것이오. ‘사무라이’나 ‘다도’ 또한 일본의 토착 전승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면서 인접국이고, 그 지리적 여건으로 문화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당신의 나라, 한국을 제외시켜서. 그 부분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소. 행여 잘 못 말했다간 당신 동기들에게 몰매를 맞을 것 같으니. 하지만 듣고 보니 서운할만 했다는 생각은 드는구려. 그저 나의 무지의 소치라 여겨 주시오. 내가 어찌 동양의 모든 나라를 다 알 수 있었겠소.

 

얼그레이 티 빛깔이 곱구려. 보아하니 밤을 새운 당신도 몹시 피곤해 보이는데 한 잔 하시오. 그 눈빛은 뭐요. 어디서 영향을 받아 신화를 쓰게 됐냐고 묻고 싶은 게요. 연구원들이 소개했듯이 박물관에 갔다가 토템기둥에 인디언 …… 하하하. 어린나이에 뭘 그렇게까지. 그런 경험들이 후일 내가 신화에 천착하는데 작은 추동의 역할을 하기는 했겠지요.

 

나는 구스타프 칼융의 원형 이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소. 융은 현대적 근원에 국한해서 원형의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신화, 연금술, 종교, 점성술 등에서 이를 찾으려 했지요. 그에게 원형이란 개념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아니마(여성성), 아니무스(남성성)처럼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에서 아주 사소한 것까지 중요도가 다른 원형들이 삶의 다양한 스팩트럼처럼 망이 짜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에서 유사한 신화와 민담과 이미지를 탄생시켰고. 문화의 차이에 따라 표현은 다른, 그 차이들을 관통해서 존재하는 동일성을 융은 이미지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원형과 상징으로 설명했어요.

 

즉 다시 말해서 어떤 대상의 이미지군(群)이 있다면 이는 상징의 차원에서는 각각 다르지만, 원형의 차원에서는 서로 동일하다는, 나는 거기서 신화의 원형성에 발목을 붙들린 것이지요. 또한 그의 이론이 그것을 입증할 만한 오래 기간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한 통찰이라는 것에 매료 되었지요.

 

또 모두들 알고 있는 것처럼 집단무의식이론이 나왔는데, 이 개념은 원형이론과 결합되어 종교심리학을 연구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합니다. 융은 나뿐만 아니라 심리학, 종교와 문학 등 인문 전 분야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나의 평생 벗, 신화의 키워드가 되어준 그에게 감사할 따름이지요. 내친 김에 내 종교가 궁금하다고 묻는이들에게 융의 대답으로 내 대답을 대신하리다. 1959년, 융은 영국 방송공사(BBC)의 죤 프리만과 인터뷰를 했어요. 그때 프리만은 융에게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궁금해 하던 첨예한 질문이었지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청자들에게 융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나는 신을 압니다."

나 또한 같은 대답입니다. 종교적 입장은 다 다르고 워낙이 민감한 사안인지라 이제 그 이상은 대답하지 않으려오.

 

요즘은 작가적 비평이 아니라 독자비평의 시대입니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책을 만난 독자의 해석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의 느낌대로 책을 읽고, 내가 제임스 조이스나 칼융의 이론을 내 것으로 만들어 간 것처럼 당신도 나의 어떤 것을 당신 것으로 발전시켜 가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소.  

 

죽은 자도 불러다 강의를 시킨다는 당신 사부의 덕에 귀찮기도 했지만, 지난 몇 주동안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이 나를 부르는 것이 나쁘지 않았소. 동방의 이 나라가 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오. 당신의 사부가 주창하는 코리아니티는 이렇게 많은 학자들에게 제자들이 물음표를 던지면서 그 힘이 축적되는 시발점이 될 것이오.

 

베란다에 저 흰 꽃 이름은 무엇이오. 아, 저꽃 이름이 만리향이오? 아까부터 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향이 만리를 가는 만리향이라. 나는 저 향기처럼 당신 나라의 향기가 세계만방에 그윽히 퍼지기를 기원할 것이고, 또 그렇게 될 것이오. 그대의 나라에서 희망을 보고 가오.

 

모자란 당신을 만나서 반가웠소. 채워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은 가능성도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요. 너무 절망 말고 지금처럼 책을 읽다 답답해지면 필사를 하시오. 언젠가는 그것이 당신에게 큰 힘이 될 것이오.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가끔 길 찾기를 못 하는 당신이 신화를 표지판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오. 신화는 인생의 축약이니 반드시 여러 개의 지도가 있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찾는 것이 살아가는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삶의 의미라 함은 그 시선이 외부로 향하여 있지만 삶의 경험은 내부에서 찾아야 하오. 신화란 ‘의미의 모색’이 아닌 ‘의미의 경험’ 즉, 외적가치를 지닌 목적에 집착하지 말고, 내적가치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까닭이요. 거기에 주목해야 신화에서 내면으로 가는 상징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요.

 

봄볕이 좋구려. 이제 이 늙은이는 그만 보내주고 봄 멀미도 좀 즐기구려. 그리고 언제든 불러주면 내 다시 오리다. 처음 길을 내기가 어렵지 길을 낸 다음에야 한걸음 아니겠소. 내 책을 여러 권 읽은 당신이 아무리 모자라도 내가 살아간 시대를 초월하는 '동시성'을 시종 주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모르지 않으리라 생각하오. 즉 다시 말해 우리는 소통하고 있는 것이오.

 

모자란 당신. 어느날, 다시 만날 때까지 무탈하기를 바라오.

 

                                                                                                           정예서 변화경영연구소 4기 연구원 (wast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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