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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옹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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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1일 13시 59분 등록

뼈가 많아야 진국이다.

 

'노자'(老子) 속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혜자가 장자를 찾아와 말했다.

당신의 모든 가르침은 쓸모 없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자 장자가 웃으며 쓸모 있음의 함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쓸모 없는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쓸모 있는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네. 예를 들어, 땅은 넓고 광활하다네. 그러나 그 넓은 땅에서 사람은 다만 그가 그 시간에 우연히 서 있는 발 밑의 적은 넓이만을 사용하지.

그렇다고 그의 발 아래의 땅만큼만 남기고 나머지 땅을 황천에 이르기 까지 깊이 파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의 발 주위에 온통 깊은 심연만이 입을 벌리고 있고, 양쪽 발바닥 아래를 제외하고는 아무데도 단단한 곳이 없으며 그가 다만 허공 속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게. 과연 얼마나 오래 그가 사용하고 있는 땅을 더 사용할 수 있겠는가?”

장자는 '무용의 용(無用之用)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쓸모 없음이 쓸모 있음을 빛낸다. 무용한 경험이야 말로 기막힌 유용성을 지니며, 때문에 무용과 유용을 사람의 잣대로 구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으로 1차 선발되어 힘겨운 지적 레이스를 펼치던 시기였다. 첫 번째 필독서는 철학자 에릭 홉스봄의 <미완의 시대>라는 책이었다. 700페이지나 되는 어렵고 지루한 책이었는데, 읽다 지쳐 재미없어 토할 것 같다는 볼멘 소리를 했다. 구본형 선생님으로부터 부드러운 듯 따끔한 충고가 날아들었다.

 

“옹박아, 너는 인문학적인 것들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냐? 그 책에서 무언가 느끼지 못했다면 너는 엘리트가 아니거나, 학교가 학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한 느낌이랄까. 완전히 벌거벗은 느낌이었다. 눈물 찔끔.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책을 제법 읽는 편이었지만 나의 책상 위에 꽂혀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자기계발 혹은 경영 관련의 실용서적들이었다. ‘밑줄 쫙쫙 치고, 아이디어를 얻고, 현업에서 적용해보고, 잘 되는 것은 내 기술로 만든다.’ 이런 류의 책들은 나를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일하도록 도와주었다. 점점 유능해지는 느낌을 갖게 해 주는 환상적인 책들이었다.

 

가끔 고전 소설이나 시를 읽고 가슴 두근거리는 경우도 있었고, 철학 책이나 종교 관련 서적들에 자꾸 손이 가는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은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별로남는 장사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자연스럽게 인문학 서적들은 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독서뿐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효율적이지 못한 것들을 신경질적으로 싫어했다. 길을 걸을 때에는 항상 최단거리를 계산했다. 밥을 먹을 때에는 신문을 읽었고, TV를 보면서 운동을 했다. 항상 철저한 계획에 의해 움직였으며,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약속을 만들지 않았다. 결과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했으며, 말을 할 때에는 결론부터 짧게 이야기했다. 많은 자기계발서를 핵심만 추려내며 읽었고 늘 분주히 무언가를 메모했다. 나는 빠르게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실용서들이 성공의 속도를 높인다고 믿었던 것 같다.

 

“지나오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열려 있다는 것'이 부족한 사회에 살았다는 것이다. 열린 마음이 꽃을 피게 한다. 앞으로 많은 책들을 고루고루 보도록 해라. 지식에 금기는 없고, 무용한 지식이야 말로 기막힌 유용성을 지닌다. 인문학은 아마 무용한 학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무용함의 맛이 깊어야 아주 맛있어진다. 네가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유용함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더냐?”

 

따끔한 질책에 마음 아파하고 있음을 아셨던지 선생님은 다음날 메일을 보냈다. 그제서야 나는 효율성이 나를 죽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빠른 성취에 압도당해 진정한 여가를 갖지도, 제대로 생각하지도, 느끼고 창조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성공에 질식한 사람 그것이 내 모습이었다. 빨리 정상에 오르려다 좋은 풍광들을 다 놓치는 바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여행의 목적은 도착이 아니다. 여행은 곧 여정이다. 여행에서 만나는 풍광과 사람이 곧 여행이며,그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결과가 아니며, 삶의 목적은 죽음이 아니다. 인생은 하루하루의 과정이며, 매 순간의 경험이다. 지식근로자는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결과 중심적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지식근로자는 육체노동자와는 달리 생산의 과정이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오직 결과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오직 결과를 통해 능력을 입증하려는 태도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결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미국의 창의성 전문가인 로저 본 외흐는 수천 명을 대상으로 당신은 언제 좋은 아이디어를 얻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사람들의 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첫 번째 대답은 필요성이 있을 때였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일이 잘못되어서 바로 잡아야 할 때

마감기한이 가까워졌을 때

 

충족되어야 하는 수요가 있고, 그 결과에 초점을 맞출 때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마련이다. 소위 똥줄 효과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라는 미국의 속담이 옳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정 반대의 의견을 낸 사람도 대단히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릴없이 어슬렁거릴 때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맥주 두 잔을 마시고 난 후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일 수 있지만, 놀이는 분명히 발명의 아버지다. 유희적인 태도는 창조적 사고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다. 정신이 운동장에서 놀고 있고, 내부의 검열 체계가 무너져 있으며, 정신적 감옥이 느슨해 져 있을 때 우리는 현실을 재창조하고 이미 정해진 방법을 의심해 보게 된다. 결과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그 과정을 즐기고 있을 때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실용성에 스스로 목매지 마라. 심각한 얼굴로 책상머리에 머리를 처박고 사상을 더듬지 말라. 뜬금 없이 산책을 떠나라. 하릴없이 거닐고 소설을 읽어라.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가고, 꽃의 냄새를 맡고 포근한 햇살에 몸을 맡겨라. ‘만약에?’라고 질문하고 무작정 버스를 타고 거리를 헤메라. 효율성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즐겁게 상상하라. 상상에 미쳐 버려라. 어느새 당신은 고민하던 문제의 답 속에 엉뚱하게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뼈는 먹을 수 없다. 그러나 뼈가 많을수록 국물의 맛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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