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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옹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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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5일 08시 57분 등록

기계란 무엇인가(What is a machine)?

 

기계공학과 교수가 첫 수업시간에 한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청년은 당황했지만 잠시 후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답했다.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는 건 모두 기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주겠나?”

 

일을 좀 더 쉽게 만들어주거나, 시간을 단축해 주는 것이 기계입니다. 더운 날 버튼만 누르면 시원한 바람이 나오죠. 선풍기는 기계입니다. 멀리 떨어진 친구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전화기도 노동과 시간을 줄여주니 기계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펜촉이나 바지의 지퍼 같은 것도 기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초만에 올렸다, 내렸다,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할 수 있으니까요.”

 

갑자기 선생님이 학생에게 분필을 던졌다. “그래서 정의가 뭔데?” “교수님 방금 말씀 드렸는데요...” “시험 때도 그렇게 쓸 건가? 올렸다, 내렸다, 올렸다, 내렸다? 멍청한 놈. 다른 사람 없나?”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28 가르마를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는 외모답게 교과서에 나와 있는 문장들을 줄줄 외워서 대답했다.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훌륭해

 

먼저 대답한 청년이 따졌다. “교수님, 제가 한 얘기가 저 대답을 쉽게 풀어서 말한 건데요?” “쉽게 풀어쓰길 좋아하면 예술대나 상업대로 가.” 학생이 맞받아쳤다. “그럼, 무턱대고 딱딱한 정의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게 중요한 건가요?” 교수에 맞선 청년은 결국 쫓겨나고 만다. 그런데 입구까지 갔다가 다시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교수가 물었다. “왜 돌아오는 거지?” “뭘 놓고 가서요.” 교수가 다시 물었다뭔데?” 청년은 잠시 호흡을 들이쉬고는 속사포처럼 이렇게 대답한다.

 

"기록, 분석, 요약, 정리되어 정보를 논하고 설명하기도 하며 그림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종이로 묶여 있으며 커버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입니다. 머리말, 개요, 목차, 색인이 있고 인간의 계몽, 교육, 이해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시각기관을 통해 전달되며 감동을 주기도 하는 물건이죠."

 

넋이 나간 듯 교수가 물었다.

"그게 뭐야?" 

"책입니다. 책을 빼먹었는데 가져갈게요."

"좀 쉽게 말할 수 없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청년이 말했다.

"아까 제가 그렇게 했는데, 잘 안 되어서요."

                                                                                   - 영화 <세 얼간이(3 idiots)>

 

 

통쾌하지 않은가? 우리가 만났단 답답한 교수와 지리멸렬한 수업에 대한 항변이고 복수기 때문이다. 특히 정답이 단 하나만 존재하는 공대를 다닌 사람은 이 이야기에 심하게 공감할 확률이 높다. 공돌이들은 대개 어떤 과목이나 개념을 배울 때 그 단어의정의(definition)’부터 배우게 된다. 경계가 분명해야 개념의 혼동 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치게 정의의적확(的確)표현에 집착하여 본질을 멀리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내가 두 번째 직장에 입사했을 때, 그 회사의 유일한 교육담당자인 내게 떨어진 임무는 전 사원의전략적 사고 능력을 함양하라는 것이었다. CEO의 지시사항이었기에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관련 서적을 수십 권 읽고 개념과 도구를 정리했고, 사원부터 임원들까지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요구사항을 분석했다. 단순한 지식 전달 대신 현업의 실제적인 문제를 팀이 직접 해결해가며 배워나가는 액션 러닝(Action Learning)형태의 프로젝트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몇 주간 밤잠을 설치며 보고를 준비한 탓에 나는 자신에 차 있었다.

 

그래, 전략적 사고의 정의가 뭔가?”

 

CEO의 첫 질문에서 보고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름의 정의를 말했음에도 부족하다는 눈치였다. 30분짜리 보고는 2시간 CEO 특강으로 바뀌었고 나는 계속해서 사장님의 말을 받아 적어야 했고, 보고가 끝나고 함께 동석한 부사장과 임원들의 방을 오가며 계속해서 전략적 사고의 각기 다른 정의에 대해 들어야 했다. 누구는 전략적 사고란인과관계를 밝혀내는 능력이라 했고, 누구는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어떤 임원은실행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체 중 90%가 공대생인 이 회사에서 이 문제는 한동안 큰 이슈였다.

 

결국 이방 저방을 불려 다니며 전략적 사고 정의의합의점을 찾는데 3개월이 걸렸고, 그 결과 전략적 사고를현재 상태에서 목표 상태에 이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능력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표현(결국, CEO가 처음부터 생각했던 표현)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정말 어이없게도, 실제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모자라 결국 1 2일간 팀장들과 함께팀원들의 전략적 사고 함양 방안이라는 주제로 워크샵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결국 3개월간 정의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다 이틀 만에 후다닥 결론 내리고 마는 용두사미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담당자로서 그 답답함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정의는 구획 긋기에 불과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그 경계만 명확하게 참가자들에게 이해되면 되는 것이지 옳고 그름을 따져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표현을 찾는 것은 낭비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정의를 정의답게멋진 표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다. 어려운 용어들을 쓰려다 보니 자연스레 이게 맞네 저게 더 정확하네 하며 논쟁이 오고 가며 기간이 길어졌던 것이다.

 

전문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두말할 것 없이 그 사람이 가진 지식과 경험이다. 그러나 그 전문성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 이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 사람이 가진 전문성은 밖으로 표현되기 전에는 뇌 속에 들어있어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전문성을 쌓는 것은 지식과 경험이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커뮤니케이션, 즉 표현 능력뿐이다. 이는 우리가 간과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지식 자체가 부족하던 시기에는 표현이 어눌해도 내용이 알차면 전문가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지식 사회가 도래하면서 지식과 정보는 스마트 폰 버튼 몇 개만 누르면 1분안에도 수만 개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레 이제 전문성은 지식 그 차체가 아닌 지식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문제로 옮아오게 되었다. 이제는 전문가가 설명을 잘 못하면능력이 없다고 평가 받는다. 스티브 잡스와 버락 오바마를 보라. 이렇게 표현을 잘하는 리더가 각광받는 시대가 또 있었던가?

 

전문가의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하여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비전문가만이 전문 용어의 뒤로 숨는다는 사실이다. 모를수록 어렵게 말한다. 모르면 말이 꼬여 어려워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거창하게 말한다. 글도 그렇다. 초짜일수록 각주가 많고 사설이 길다. 읽고 나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전문 용어의 남용은 그들이 잘 모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고수는 다르다. 전문가는 백정이 관절과 관절 사이를 칼로 찌르듯 힘들이지 않고 핵심을 찌른다. 핵심은 늘 간단하고 명쾌하다. 그래서 그들은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도 처음부터 그랬을까? 자꾸 보고 오래 겪어 모호하던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따지고 살피다 보니 명백해진 것이다. 처음에는 걸음마다 망설여지고 오리무중이더니, 보이기 시작하자 백 리 밖의 일도 손바닥에 있게 된 것이다.

 

심입천출(深入淺出). 깊이 들어가 얕게 나온다. 세게 공부해서 쉽게 풀어낸다. 공부가 깊어야 설명이 간결하다. 자기가 알아야 남도 쉽게 이해시킨다. 말이 현란한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한 번 들어 알기 어려운 말은 옳은 말이 아니다. 속이 빈 것을 남들에게 들킬까 봐 말이 많아진다. 남이 나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두드려보면 빈 깡통이요 알곡 없는 쭉정이다. 그러므로 깊이 이해하고 얕게 풀어내라. 쓸데 없이 정의에 집착하고 멋있는 말로 범벅을 치려는 노력 대신 책 한 장을 더 읽고 더 생각하고 더 경험하여 진정 내 것으로 만들어라. 마음으로 보면 진짜와 가짜는 금새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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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6 13:58:17 *.11.178.163
전문용어를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전문가가 되나보다. 책 보다가 나름대로 자신의 말로 바꾸어보는 연습을 해본다. 아직 내말로 할 수 없으면 그건 이해하지 못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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