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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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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6일 10시 10분 등록

 이 컬럼은 6기 연구원 박미옥님의 글입니다.

 

타는 듯한 더위속에서 둘러본 델피, 발걸음 발걸음마다 생각과 느낌이 피고 지는 여정이었지만, 그 신탁의 성전에서 나를 가장 흥분시켰던 것은 2500여년전의 그리스인들이 아니라 현재를 함께 숨쉬는 한국사람 한정기 선생님이셨다.

 

아이들에게 읽어줄 동화를 찾다가 직접 동화를 쓰는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육아의 책임과 자아실현의 욕망을 한 기둥으로 합쳐낸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델피 신전에서 울려 퍼지던 낭랑한 진도아리랑의 음색. 낯선 사람들과의 여행에서도 단 몇 초의 주저 없이 가슴속의 소리를 신명나게 뽑아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내 가슴은 울렁이고 있었다. ‘닮고 싶다.’ 그녀를 알고 싶은 욕망에 갑자기 심장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궁금해졌다. ‘그녀를 다운로드하라.’ 아폴론 신을 통해 내가 받은 신탁이었다.

 

델피 유적에서 첫 숙박지인 칼람바카로 향하는 버스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긴 비행과 한낯의 유적탐방에 지친 탓인지 일행은 거의 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지만, 나는 내내 말똥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가 내어놓은 천사(식당이름이 앙겔로스였잖아)의 정찬에 놀래버린 대장의 아우성에서 좀처럼 놓여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덕에 델피에서 칼람바카로 오는 5시간 남짓의 버스길동안 쉬지 않고 이어지는 가이드 언니의 맛깔스런 신화이야기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으니 난감하기만 하던 그 복통은 바로 그리스에서는 몸 보다는 마음의 영양소를 섭취하는데 주력하라는 메시지였나 보다.

 

버스가 헤라클레스의 아들 라모가 세웠다던 라미아(Lamia)를 지나 도모코스(Domokos), 테살리아 평원을 거쳐 의술의 신 아스클리피오스의 고향으로 알려진 트리칼라(Trikala)를 꿰고 칼람바카(Kalambaka)에 도착한 것은 8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타고난 길치로 공간설명에 쓰이는 용어라면 일단 거부감부터 느끼는 나였지만, 지나온 낯선 동네들 중에 특히 귀에 들어오는 지명이 있었다. 바로 라미아가 그곳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인 BC 323BC 322년에 아테네가 그리스의 다른 여러 도시와 함께 마케도니아에 대하여 일으켰던 전쟁에 등장하는 그리스의 작은 도시. 그러나 내게는 그리스 신화의 흡혈귀 라미아가 떠올랐다.

 

라미아(Lamia)는 동방국가 벨로스의 착하고 아름다운 공주로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 아기를 여럿 낳았으나 헤라의 질투로 아이를 모두 잃게 된다. 비탄에 잠긴 라미아는 다른 어머니에게서 어린아이를 납치해서 산 채로 잡아먹는 식인괴물로 변해버렸다. 라미아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여 젊은 시인을 유혹하기도 하였는데, 시인 존 키츠는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장편시라미아를 지었다고도 한다. 이런 연유로 라미아는 요부나 괴물을 뜻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이채로운 것은 그리스에서 이처럼 무서운 괴물로 여겨지는 라미아도 그보다 오래 전인 바빌로니아 시대의 리비아에서는 여자의 머리를 한 뱀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숭배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바빌로니아의 대지모신 라마슈투의 화신 가운데 하나였으며 풍요와 번영을 관장하는 여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숭배는 그리스의 신들이 세력을 점차 강화함에 따라 쇠퇴해갔다. 게다가 그리스 신화가 씌어 질 무렵에는 라미아가 여신이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혀지고, 이교의 신들이 악마로 바뀌는 것처럼 그녀 또한 무서운 괴물로 전락해버렸다. 결국 무자비한 흡혈귀라는 그녀의 이미지는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자에게 주어진 오명이었을 뿐 그녀의 본질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사람과 마음의 길을 내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에게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자원에 불과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취하는데 놀라운 성취를 보였다. 물론 그녀에게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끌림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녀는 본능의 지시에 따라 그 끌림에 솔직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문제는 그 결핍이 충족되면 끌림도 해제되어 버린다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의 영악한 거래를 지속하면서 그녀는 알뜰히 자신을 채워갈 수 있었지만 그 충족감 뒤에서 스스로에 대한 무서운 의심도 함께 커져갔다. ‘관계의 흡혈귀...생존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를 마셔야하다니, 이런 삶이 죽음보다 나을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그녀의 외로움은 깊어만 갔다.

Me-story 중에서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녀가 어서 흡혈귀의 오명을 벗고 풍요와 번영의 여신이라는 본래의 자기를 되찾게 되기를. 復權의 과정이 내게도 의미있는 지도가 되어주기를.

 

여행 내내 그녀의 이야기는 내 가슴가를 맴돌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처음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라미아는 내게 풍요와 번영의 여신으로의 복귀라는 키워드를 준 것만으로도 이미 제 역할을 다 한 게 아닐까? 더 이상 그녀에게 바라는 건 뻔뻔스러운 거야.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어야할 차례야. 그 무엇은 물론 바로 復權의 지도겠지? 내가 만들어 보자. 그래서 그녀가 나의 지도를 통해 진짜 그녀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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