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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뫼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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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9일 05시 35분 등록

숨통을 틔워 준 <빨간머리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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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yes24

 

 

지난 주에는 변화경영연구소에서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바로 전날. 나에게 출판기념회의 사회를 좀 봐줄 수 있냐는 부탁에, 나는 저자와도 잘 아는 사이라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출간기념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기획조차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에 다급하게 통화를 하면서, 나는 그녀에게 책에 나온 문장들을 참석한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에, 작가 자신이 직접 뽑은 문장을 종이에 적어 참석자가 그 종이를 펼치면, 그 문장에 따른 에피소드와 후일담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하자는 의견이 보태졌다.

 

저자는 벌써 세 권의 책을 출간했고, 세 권 모두 일정 독자들에게 공감을 사고, 그들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녀의 첫 번째 책이 출간되었을 때가 생각난다. <혼자 놀기>라는 책은 오직 그녀만이 생산할 수 있었던 독특한 책이었다. 일상에서 소소하게 벌어지는 일들을 놀이와 함께 접목시켜서 일상을 놀이로 업그레이드 하며, 밝게 그러낸 책이었는데, 연구원을 함께했던 그녀를 아는 나는, 그 책을 읽으며, 너무 그녀답다는 생각에 깔깔대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무언가 부족하지 않고, 넉넉하고, 당당하고, 언제나 재치와 발랄함으로 뭉쳐, 어떤 때는 그녀만의 엉뚱한 상상력으로 ‘4차원 아니야?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작가. 그런 작가의 모습들이 새 책에도 고스란히 나온 것 같아 사회를 보는 내내 즐거웠다.         

 

출판기념회에서 작가가 직접 뽑은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을 즐기는 여행자의 마음이다.”

나는 내 방 천장을 응시하며 똑바로 바라본 적이 없다. “

“3 3주차 베스트셀러를 모두 읽은 것보다, 윤성희의 소설을 모두 읽었다는 것에 더 뿌듯해 하는 내가 되고 싶다. “

 

한 문장씩이 담긴 종이를 참가자들이 뽑아 읽으면, 작가는 그 문장에 얽힌 이야기와 배경, 그리고, 그 문장이 탄생하게 된 순간들을 막힘 없이 술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잘 하던 그녀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정적. 갑자기 그녀가 입을 떼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로 이 문장에서였다.  

 

나는 엄마가 딸이라 불러 딸이었을 뿐, 한번도 제대로 딸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엄마라는 말이 나오자, 그만 울컥 하고 만 것이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는, 다음출판 계획인 엄마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나갔다.

 

저는 언젠가 저의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더 늦어지기 전에 어머니의 인생에 대해서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직접 눈으로 책을 읽을 실 수 있을 때, 빨리 출간해서 어머니께서 읽으시도록 해드리고 싶습니다.”

 

늘 통통 튀고, 밝고 명랑하기만 했던 이 작가 또한 엄마를 그리워하는 딸이었구나, 라는 생각에 사회를 보던 나 자신도 잠시나마 숙연해졌다.

 

***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속에, 나는 딸에게 주려고 사 두었던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을 발견했다. 그리고 작가가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 앤 셜리와 상당 부분 닮아있음을 알아챘다. 아마도 책 <숨통트기>의 표지의 소녀도 그런 연상을 하기에 한 몫 한 듯 싶다.  

 

고상하게 들린다는 이유로 이름 끝에 꼭 e 자를 넣어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앤의 모습. 빨간 머리를 검은 색으로 염색하려다 녹색으로 물들이고서 자책하는 앤의 모습. 목사님 부인을 집으로 초대하고 케익에 바닐라 향 대신 진통제를 넣어 만든 앤의 모습. ‘가로수 길기쁨의 하얀 길, ‘배리 연못반짝이는 호수로 그녀만의 이름으로 바꾸어 이름 짓는 앤…,. 감성이 풍부하고 예민하지만 자존심 강한 이 소녀는 여러모로 작가와 닮아있다.

 

그러나, ‘’, ‘희망’, ‘사랑과 예쁜 상상력으로 가득 찰 것 같은 이 소설, <빨강머리 앤>이 사실은, 입양 과정 중 남자아이에서 여자아이로 바뀌어 실망하는 슬픈 장면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다. 그 것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부모님을 잃고, 아이 보기로 다른 사람의 집을 전전했던 11살 소녀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는 그녀의 긍정적인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녀만의 오직 상상력의 힘으로 부모의 죽음, 가난, 어른들의 학대와 불합리성을 극복하려 한다. 아픔을 날것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상으로 대체시켜야 하는 열 한 살짜리 고아 소녀 앤은, 아마도 내가 모르는 작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양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와 살짝 보이는 덧니에서, 그리고 깡마른 체격에서 오는 이미지는 차치하더라도, 벌을 받으면서도 울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지만, 어디선가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에 본인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쏟아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 둘을 동일시했다.

 

그녀는 책 <숨통트기> 에서 일상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솔직히 팬티가 몇 장 있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그냥 필요할 때 하나씩 사서 마음에 드는 순서대로 골라 입는다. 그러다 보니 입지도 않는데 서랍장 구석에 개어둔 팬티들이 옷장정리를 할 때마다 쏟아져 나온다. 입지 않는 팬티는 버려야 하는데, 옷장 정리를 할 때면 언젠가 빨래를 못하는 상황이 되면 한 번쯤은 입을 것 같아 매번 곱게 개어 다시 들여다놓는다.”

 

밥 한 번 먹자는 약속은 어른들이 슬프지 않게 헤어지기 위해 외우는 주문과 같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인사처럼 하면 슬프지 않게 헤어질 수 있다. 곧 다시 만날 거라 믿으면 지금의 헤어짐을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빨간머리 앤>의 앤은 이렇게 묘사된다.

 

앤은 골짜기 아래 있는 샘물과도 친구가 됐다. 샘물을 깊고 맑았으며 얼음처럼 차가웠다. 반질반질한 붉은 사암에 둘러싸인 샘 주변에는 커다란 손바닥처럼 생긴 물고사리가 무리지어 자랐고, 그 너머로는 개울을 가로지르는 통나무 다리가 있었다.

 

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리를 지나, 수목이 우거진 언덕으로 올라갔다. 똑바로 자란 굵은 전나무와 가문비나무 아래로는 땅거미가 내린 듯 어두컴컴했다. 주변에는 꽃 중에서 가장 수줍음을 많이 타면서도 가장 예쁘고 가냘픈 방울꽃이 가득 피었고, 지난해 피었던 꽃의 영혼처럼 창백하고 영묘한 별꽃도 약간 눈에 띄었다. 나무들 사이로는 거미줄이 은빛 실처럼 은은히 반짝거렸고, 전나무의 가지와 수염 같은 꽃은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혼자놀기> <숨통트기>에서 빨강머리 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책<빨강머리 앤>은 고통과 절망을 상상력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줌과 동시에 소녀적인 꿈과 욕망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이끌어낸다.

 

나는 출간기념회장을 나오며, 작가가 쓸 어머니에 관한 다음 책이 궁금해졌다. 머리를 양 갈래로딴 주근깨 많던 고아 소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머니로 성장해 나가듯이, ‘혼자 놀던그녀의 책이 답답한 현실의 숨통을 틔워주며, 이제 따사로운 사랑을 그리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어떻게 변주될지 기대된다.

 

 

제 집이 있어, 돌아간다는 게 너무 좋아요. 저는 벌써 초록 지붕 집을 사랑하게 됐어요. 전에는 어떤 곳도 사랑한 적이 없었어요. 어떤 곳도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요. , 마릴라 아주머니, 저는 너무 행복해요. 지금 당장이라도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는 기도가 조금도 어렵게 생각되지 않아요.”  

-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

 * 이미지 출처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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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16.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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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9 14:17:44 *.30.254.29

잘 읽었습니다.

맞아요. 앤과 그녀는 닮았어요.   

 

어머니에 대한 책이 나오면,  (미래의 4번째 출간기념회에서)

어떤 노래를 불러주어야 할지 생각나는군요.

 

빨강머리..앤.

사서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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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9 14:56:49 *.216.38.13

<빨간머리 앤> 이 그냥 그런 성장소설이 아님을 칼럼을 통해 쓰고 싶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녀의 비중이 너무 커다랗게 비춰진것 같네요.

다음번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아야겠어요.

그래도, 이번 칼럼은 출판 기념회도 있고 해서 숨통트기 우선으로.. ㅋㅋㅋ 

 

그런데, 어떤 노래 불러 주실지 정말 궁금한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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