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연구원의

변화경영연구소의

  • 진철
  • 조회 수 4486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13년 4월 13일 13시 55분 등록

배가 강 한가운데 이르렀다. 코사크의 무리들을 가득 태운 배는 볼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스텐 카라친은 공주의 손을 이끌고 뱃전에 올라섰다. 공주는 말이 없었다. 노를 젓던 손들이 멈춰 섰고, 무리의 시선이 그에게 모아졌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공주를 사랑한다. 그리고 짜르의 압제와 굶주림에 시달려온 형제들도 사랑한다.”

짧고 단호했다. 공주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람이 잦아들었고, 강물도 숨을 멈춘 듯 고요했다. 무리의 소란스러움도 더는 일지 않았다. 천천히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강물이 뱃전을 스쳐갔다. 그는 뱃전에 세운 공주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멀리 강물 끝자락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조국을 더 사랑한다.”

문득 공주의 등이 떠밀렸다. 그녀의 하늘거리던 샬와르가 붉은 노을빛에 잠시 감기더니 짧은 순간 사라졌다. 딱 한 번 강물이 물보라를 일으켰고, 바람은 침묵했다. 무리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강물 위에

스텐카라친 배위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페르시아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띄운 그 입술에 노랫소리 드높다.

돈 코사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 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우리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에 볼가 강물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라친, 장하도다. 그 모습

 

노랫소리에 맞춰 노를 젓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배는 다시 강물을 밀쳐내며 속도를 냈다. 배가 강물을 박차고 나아갈 때마다 강물에 부딪친 고물이 오르내렸다. 바람은 앞에서 불어왔고, 물보라가 일었다. 노랫소리는 바람을 타고 다른 배들로 이어졌으며, 배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 붙었다. 어둠에 묻히기 시작한 볼가 강 저편은 짜르의 땅이었다. 그곳은 여전히 압제에 짓눌린 고통의 땅이었다. 돈 코사크의 무리들을 기다리는 것은 짜르의 군대였다. 모스크바까지는 볼가 강의 물길을 얼마나 더 거슬러 가야할지 몰랐다. 바람같이 자유로운 사내들, 돈 코사크의 사내들은 싸우기 위해서 태어났고, 싸우다가 죽었으며, 그렇게 살고 죽는 것이 사내다운 것이라 배웠다. 자유를 얻고자 세상을 향해 칼을 빼든 자들에게 죽음은 운명이고 순간일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하늘과 강물은 이미 구분할 수 없었다. 어둠 사이로 돈 코사크 무리들이 남긴 궤적이 남았다. 눈이 녹아 불어나기 시작한 강물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흘렀다.

 

코사크 무리들은 필요악이었다. 모스크바에서는 귀족들과 부호들의 배를 가리지 않고 약탈하는 그들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고, 짜르 또한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투르크와 타타르의 침공으로부터 변방을 지키는 것은 모스크바의 귀족들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우랄산맥 너머 시베리아를 원정할 때도, 동란시대에 볼로트니코프 반란군의 주력부대가 된 것도, 폴란드로부터 우크라이나가 독립전쟁을 벌일 때도 코사크들은 맨 선두에 있었다. 짜르는 코사크들의 자치를 허용했고, 원정을 묵인했다. 오히려 물자와 월급을 지급하기도 했고, 더러 관직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절대 허용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반란이었다. 무장한 코사크의 배는 볼가 강을 거슬러 올라서는 안 되었다. 코사크도 짜르도 서로가 넘지 않아야 할 경계가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들의 뱃전은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었다.

 

코사크의 무리들은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 모두는 세상의 풍파에 쫓겨 온 자들이었다. 코사크의 무리는 누구이던 자유를 찾아 도망쳐 온 이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자신들의 수령(아타만)은 모두가 모이는 집회(크루크)에서 선거로 뽑혔다. 새로 돈 코사크의 수령으로 뽑힌 스텐 카라친도 그들 중 하나였다. 모임은 늘 어수선하고 떠들썩했지만 진지했다. 길게 늘어뜨린 콧수염 아래로 활기찬 웃음소리들이 넘쳐났고, 입담 좋은 사내들의 농담은 걸쭉했다. 술과 춤이 끊이지 않았고, 음악은 빠르고 경쾌했다. 사냥과 원정은 코사크의 일상이었다. 초기의 코사크는 농사보다는 말을 몰아 사냥을 하거나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며 먹고 살았다. 그런데 점차 세력이 커지면서 흑해를 건너 오스만 제국을 침략하기도 하고, 볼가 강을 거슬러 러시아의 심장으로 향하는 부호들의 배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코사크는 결코 약탈이나 일삼는 도적들의 무리가 아니었다. 형제들은 이따금씩 볼가 강의 하류에서 코사크 동족들을 노예로 잡아가던 투르크나 타타르의 노예 선들과 맞부딪치곤 했다. 납치된 젊은 여자들은 오스만 제국 하렘의 후궁으로 팔아 넘겨졌고, 남자들은 노를 젓는 사공이 되거나 예리체니가 되어야 했다. 형제들은 분노했고, 몸을 사리지 않았다. 코사크의 형제들은 명예와 의리가 무엇인지 알았고, 싸움터에서 규율과 형제애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뼈에 새겼다. 해방된 노예들은 코사크 무리에서 자유로웠다. 비록 폴란드와 러시아 그리고 오스만 제국 같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의 운명은 늘 위태로웠지만, 형제들과 함께 세상과 맞서 싸워서 자유를 지킬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따져 묻지 않았다. 무리들의 출신배경은 다양했고, 코사크의 뿌리는 모호했다. 영주로부터 도망친 농노들도 있었고, 짜르의 군대에서 탈영한 병사들도 있었다. 타타르나 투르크의 군대에 포로로 잡혀 노예생활을 하다 탈출한 자들도 있었고, 말을 타고 거처 없이 떠돌던 유목민들도 섞여 있었다. 세상은 흉흉했다. 러시아 대륙은 광활했고,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는 길었다. 동토의 땅에서는 먹을 것이 귀했고, 영주들의 주머니는 늘 허기졌다. 농노들은 딸린 식구들의 입보다도 영주들을 위해 땅을 일구어야 했지만, 정작 죽은 농노를 위해 언 땅을 파줄 귀족은 없었다. 짜르는 새로운 땅이 필요했고, 전쟁은 불가피해보였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그렇지 않으면 병들어 죽거나 전쟁터에서 죽어야 했다. 어떻게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든 귀족이 아니면 제 명대로 살지 못하였다. 짜르의 땅에서 농노들은 삶보다 죽음이 더 흔했다. 폭동과 반란이 자주 일었고 전쟁이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농노들은 죽어갔다. 폴란드 영주들의 착취, 짜르의 압제, 기근으로 인한 굶주림 그리고 잔인한 땅을 휩쓸고 지나간 전염병을 피해 부초처럼 떠돌던 자들이 결국 강을 따라 흘러들었다. 흑해로 흘러드는 드네프르 강 하류에는 자포로지에(급류 건너편) 코사크들이 머물기 시작했고, 후에 돈강 유역까지 퍼져나간 무리들은 돈 코사크라 불리었다. 새로운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서고 짜르가 바뀌어도 농노들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봄이 찾아들면서 동토의 땅에도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기나 긴 겨울의 끝자락에서 얼음과 눈이 녹아 볼가강물이 불어나듯 코사크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날이 풀려 강물의 얼음이 녹고 물길이 열리면 코사크들은 흑해를 건너 오스만 제국이나 카스피해 너머 페르시아로 원정을 나서기도 했다. 스텐카라친의 형제들이 페르시아 공주를 납치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공주는 잘 웃었다. 그리고 자주 웃었다. 한 번 웃으면 세상의 어둠과 고통을 잊은 듯 자지러지게 웃곤 했다. 형제들 앞에서 공주는 납치되었을 때 입었던 모양 그대로 춤을 추었다. 머리띠와 귀에 걸린 작은 보석들이 흔들리면서 잘게 부서지는 바람소리를 내었고, 하늘거리는 샬왈라에 비치는 몸매는 봄 물결처럼 간지러웠다. 인질로 잡혀온 포로라기보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한 식구였던 마냥 형제들의 사랑을 받았다. 술에 취한 형제들이 춤추는 공주를 에워쌌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거구의 코사크들에 비해 너무도 작은 체구였지만 스텐카라친이나 형제들이 어찌하지 못하는 힘이 공주에게서 풍겼다. 형제들은 바람에 일렁이는 볼가강처럼 흔들렸고, 어색한 눈길들을 감추지 못하였다. 무리에서 아우성들이 일었다. 무언가를 걱정하는 우려도 있고, 한숨도 섞인...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푸념과 불만들이 자주 들려왔다. 날이 점점 더 풀려 얼었던 강물위의 얼음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일이 잦아졌다. 스텐카라친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얼마 전 쿠르크 회의에서는 중요한 결정이 있었다. 지난 번 원정에서 맞부딪쳤던 짜르의 군대와의 다툼이 끝내 화근이 되었다. 그들은 코사크들의 전리품을 내놓으라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아무리 불한당 같을지라도 짜르의 군대였다. 그리고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미루어오던 결정이었지만, 형제들 누구나 언젠가는 해야 할 결정임을 알고 있었다. 스텐카라친은 자신보다 앞서 코사크의 아타만이었던 형이 모스크바의 군사령관에게 처형당했을 때부터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코사크의 사내라면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리로 몰려드는 형제들은 새로운 소식들을 가져왔다. 짜르의 압제는 날로 심해졌고, 봄바람을 타고 반란의 기운이 빠르게 퍼져갔다. 몇 해 전에도 모스크바에서 폭동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짜르의 목숨이 위협받았고, 그 대가는 잔인했다. 짜르는 페스트에 무력했지만, 반란에는 단호했다. 7천명이 처형당했고, 주동자들은 산채로 뼈를 부러뜨리는 고문을 당한 후, 붉은 광장의 교수대에 목이 걸렸다. 형제들은 이미 자신이 살아왔던 땅을 등졌을 때부터 정해진 운명의 길을 선택했다. 코사크의 무리들을 가뜩 실은 배가 볼가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돛을 가득 부풀렸다.

 

강을 건넌 코사크 형제들은 볼가강의 차리친(볼고그라드)에 자리를 잡았다. 스텐카라친의 밀사들은 러시아의 곳곳으로 말을 달렸고, 돈 코사크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은 말보다 앞서 퍼져갔다. 볼가 강 하구의 아스트라한의 성문은 스텐카라친의 무리들이 닿기도 전에 저절로 열렸다. 짜르의 박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소수 민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호응을 했다. 반란의 불길은 볼가강 유역의 러시아 중앙으로부터 멀리 백해 연안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라친의 무리들은 불가 강을 거슬러 심비르스크(울리야노프)를 함락시켰고, 소문을 듣고 몰려든 농민반란군은 한때 20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짜르의 군대는 강했다. 좋은 무기와 잘 훈련된 짜르의 군대의 진격 앞에 반란의 기운은 맥없이 꺾이고 말았다. 스테칸라친은 차리친의 본영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스텐카라친의 목숨을 빼앗아 간 것은 짜르의 군대가 아니었다. 한 때 형제들이라 불리었던 코사크 상층부의 배신으로 그의 몸은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사지가 찢기었다. 1671년 6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스텐카라친의 죽음이후에도 반란의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짜르의 보복은 시베리아의 칼바람보다 잔인했고, 농노제는 더 없이 강화되었다. 러시아 벌판의 설원 위에 뿌려진 붉은 피들이 눈과 함께 녹아 볼가 강으로 흘러들었다. 코사크와 러시아 농노들의 피를 기억하는 볼가 강에는 반란의 기운이 넘쳤다. 1708년 돈 코사크 출신인 볼라빈의 무리들이 강을 거슬러 올랐지만, 짜르의 군대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표토르 대제의 시대가 지나가고 에카테리카 여왕의 시절에도 반란은 계속되었다. 스텐카라친의 반란이 있은 후 약 백년 후인 1773년 역시 돈 코사크의 핏줄인 푸가초프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푸가초프 역시 정부에 매수된 배신자들에게 붙잡혀 모스크바로 넘겨졌다. 1775년 1월 붉은 광장에서는 또 한 차례 돈 코사크 형제의 몸이 찢겨져 나갔다.

 

러시아 농노제는 1861년에 이르러서야 폐지되었다.

IP *.47.39.151

프로필 이미지
2013.04.13 20:00:00 *.143.156.74

선배, 글 좋아요.

강을 테마로 동서양,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이야기를 풀어 내는 방식도 독특하구요.

선배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지식이 부럽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책으로 냈을 경우 어떤 분류에 속할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문요한 선배가 알려줬는데 자신의 책이 에세이가 될 것인지, 자기계발서가 될 것인지에 따라 글의 구성, 목차, 기술 방식이 달라진대요.

선배글은 에세이 쪽에 더 가까울 것 같아요.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와 비슷할 듯)

원고가 어느 정도 쌓이면 이 부분을 고민해 보면 좋을 듯 합니다.

제 머리도 못 깎는 중이 주제넘게 한 마디 전합니다.  ^^;;

프로필 이미지
2013.04.14 21:28:29 *.214.1.65

고마워요. 재경씨..

이래저래.. 고민만 있고,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이네요.ㅎㅎ

좋은 댓글 고마워요. ㅎㅎ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6 상대나이 계산하기 (강미영) 경빈 2012.10.02 4205
95 몰입 : 창조적 인재의 핵심키워드 (도명수) 경빈 2012.04.24 4229
94 아주 오래된 병 [1] 승완 2012.01.23 4232
93 라미아, 흡혈요부에서 풍요와 번영의 여신으로 (by 박미옥) 은주 2012.08.26 4234
92 정예서/ 새길을 모색하며 효우 2015.01.28 4271
91 신성한 소가 더 맛있다 [4] [1] 옹박 2013.01.14 4291
90 몽고메리 <빨간머리 앤>, 강미영 <숨통트기> file [2] 뫼르소 2013.01.29 4296
89 가면나라 이야기 (양재우) [2] 로이스 2012.01.05 4316
88 토크 No.5 - 누가 갑(甲)일까? file [2] 재키제동 2013.01.20 4320
87 당신의 아침에 여유는 누가 줄 것인가? file [6] 경빈 2012.01.17 4323
86 내가 찾는 사람, 이상형 (by 이선형) 은주 2012.01.28 4337
85 스타벅스 커피 천 잔을 마시면 미국 영주권이 공짜! (by ... [9] 희산 2012.07.06 4419
84 무기력 학습 하나: 호스피탈리즘 은주 2012.02.25 4436
83 청춘의 풍경들 [6] 은주 2011.12.30 4449
» 장하도다 스텐카라친 [2] 진철 2013.04.13 4486
81 좌뇌형 인간의 죽음 [1] 옹박 2013.03.11 4509
80 자전거와 일상의 황홀 [3] 옹박 2012.01.11 4526
79 신뢰-훌륭한 일터의 핵심가치 [1] 경빈 2012.01.31 4528
78 우뇌를 회초리로 내리쳐라 [1] [1] 옹박 2013.03.18 4531
77 터키 탁심광장에 내리는 눈- 오르한 파묵 <눈> file [2] 정재엽 2013.06.18 4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