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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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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8일 08시 48분 등록

 

터키 탁심광장에 내리는 눈

                    - 오르한 파묵 <눈>

 

L.jpg

 

 

민중을 없애라, 권리를 박탈하라, 입 다물게 하라.

왜냐하면 유럽의 계몽주의는 민중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니까.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초프가의 형제들> 작가노트에서-

 

 

<변화경영연구소>에 제가 참 존경하는 한 연구원께서 한 달 동안 ‘터키 여행’을 떠나신다고 하셨습니다. 전, 침을 튀어가면서 “터키 강추!”를 외쳤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가족 덕택에 많은 나라를 여행했지만, 이스탄불처럼 저를 매료시킨 도시는 없습니다. 언젠가 책을 읽다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아무래도 동양과 서양,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이슬람과 기독교가 중첩된 일반적인 이스탄불에 대한 거창한 평가보다는 ‘사람’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이스탄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TV나 신문을 통해 아실 겁니다. 지난 5월 28일 무렵부터, 터키 이스탄불 주요 교통의 허브이자 관광객과 이스탄불 시민 모두에게 인기 있는 장소로 꼽히는 '탁심'에서 터키 공권력과 시민들 사이에 엄청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 시내 몇 안 남은 녹지대인 탁심 광장의 재개발에 반대하여 게지gezi 공원을 점거한 터키 국민들을 상대로 국가가 물대포와 최루탄 등을 이용한 진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탁심 연대를 비롯한 시민 단체와 회담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불안한 터키 내부 사정때문인지 그 연구원께서는 여행지를 이탈리아로 변경하셨지만, 제가 좋아하는 분들께 터키, 그 중에도 이스탄불을 꼭 한번 다녀오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사람 냄새 나는 이스탄불에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 오르한 파묵도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신문으로 접하며, 저는 그의 소설 <눈>을 떠올렸습니다.

 

이 소설은 전통과 현대, 세속과 종교, 군부와 이슬람의 충돌을 몸으로 겪으며 살아가는 터키인의 충돌을 그린 작품입니다. 마치 지금 탁심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말입니다. 주인공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독일에서 12년간 망명 생활을 하다가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터키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연히 카르스 라는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데, 이때 무슬림 여고생들이 히잡을 벗고 등교하라는 세속주의 정부의 명령에 불복해 목숨을 끊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다가 테러와 쿠데타에 휩쓸리는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이 설원의 도시에서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적의, 탐욕, 믿음을 위해 인생을 내건 히잡 착용 소녀들, 끝없이 이어지는 신에 대한 신념과 회의, 그리고 각 계층간의 갈등들이 폭설로 외부와 차단된 공간 카르스에서 사흘 동안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도시의 더러움과 순수한 감정을 동시에 일깨워주는 존재는 히잡을 착용한 소녀들과 하얀 눈이 겹치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 동북부의 도시 카르스. 시를 쓰지 못하는 주인공은 카르스의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행복합니다. 지난 4년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던 시가 저절로 그에게 찾아왔기 때문이죠. 폭설로 갖힌 사흘 동안 그에게 사랑이 다가오고, 시가 찾아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공포를 외면한 그는 사랑을 찾게 되고, 시를 되돌려받게 됩니다. 허공에서 눈이 바람에 부서져버리는 것처럼 시의 언어 조합 또한 부서지긴하지만 말입니다.

 

결국, 자살, 쿠테타,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그 모든 갈등을 눈은 한 순간에 덮어버립니다. 제가 사랑하는 도시인 이스탄불에도 지금 탁심광장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 갈등과 사회계급, 그리고 인종과 종교를 덮어버리는 눈이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6월에 내리는 눈'을 게지 공원에서 볼 수 있을까요.

 

 

그는 일주일 전 독일에서 어머니의 부음소식을 듣고 1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행복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이스탄불에서 나흘을 보낸 후, 예정에 없던 카르스 여행길에 나선 참이었다.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게 내리는 눈은 수년 만에 다시 본 이스탄불보다도 더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는 시인이었다. 이주 소수의 터키 독자들만이 기억하는 오래전 어떤 식에 그는 평생 한번 우리의 꿈 속에서도 내린다고 말했다.

 

- 오르한 파묵 <눈> p.14

* 이미지 www.yes24.com 에서 

IP *.216.38.13

프로필 이미지
2013.06.20 07:00:33 *.138.53.28

글을 읽으니 '눈'이란 소설이 읽고 싶어지네요.

터키에 가기전엔 반드시 읽어야 겠고요^^

 

프로필 이미지
2013.06.20 08:48:44 *.216.38.13

오르한 파묵의 유일한 정치 소설입니다.

 

사건들이 추리적인 기법으로 꼬리를 물고 펼쳐지면서도 문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게다가 박진감까지 덤으로^^

 

카르스 라는 도시의 눈송이에 푹 빠져서 단숨에 다 읽게 만듭니다.  때론 한 편의 소설이 수십편의 국제정세를 논하는 전문가의 의견보다 더 큰 통찰의 안목을 줍니다. 이 여름, 카르스시의 눈 속에 푹 빠져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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