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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5일 06시 17분 등록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읽고  <2011. 1. 5>

 

 


대단한 소설을 만났다. 이 작가의 칼날은 아주 성능이 좋다.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꽤 복잡하고 두터워 보이는 지층의 단면을 싹둑 잘라 보여준다. 거기에서 서늘한 금속성이 느껴진다. 과도한 연민이나 회한으로 주절주절 늘어놓지 않고, 인생의 맥을 짚어 단칼에 끊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라고 지칭된다. ‘그’는 우리 모두와 닮은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 즉 ‘에브리맨EVERYMAN' 이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뉴욕의 성공한 광고인이며, 세 번 결혼하여 세 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그’ 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여 행했던, 애정도 자부심도 없는 첫 결혼에서 빠져나와, 진짜 사랑했고 헌신적이며 유능한 두 번 째 아내를 배신하고 자기 나이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모델과 놀아난다. 내가 잘 나가는 백인남자였더라면 그와 똑같은 수순을 밟았을 것 같다. 그와 내가 남달리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보통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빠질 수 있는 함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보통 사람이 거치게 되는 인생경로에 대해 철저한 연구를 한 것 같다. 주인공의 선택과 행동, 기대와 심리묘사 어느 것을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건뿐만 아니라 주변인물들도 꼭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 같은 실감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 시대의 평균적 인간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를 소설 형식으로 썼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그는 서른넷에 두 번 째 결혼을 하고, 쉰 여섯에 심장수술을 하며, 예순다섯에 해변에 있는 은퇴자 마을에 입주하여 오랜 꿈이던 그림을 시작한다. 그림은 그가 예상한 기쁨을 주었지만 심장병으로 인해 모든 것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는 점점 한 시간의 산책과 30분간의 가벼운 수영 외에는 하는 일이 없는 노인이 되어 간다. ‘소중히 여기던 평화와 고요도 스스로 만들어낸 고독한 감금의 형식이 되어버리고, 그는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에 시달린다. 목적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한 때 그의 인생은 완전했다. 두 번 째 아내인 피비와 함께 만을 가로질러 헤엄을 치고, 사람들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사랑을 나누고,  바위에서 저녁으로 먹을 홍합을 걷어 집으로 돌아오던 때, 그리고  ‘늘씬한 작은 어뢰처럼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헤엄치던 어린 시절. 그는 보석상의 아들답게 이토록 아름다운 수사를 남긴다.  



여름의 매일매일 살아 있는 바다에서 타오르던 그 빛이여, 그것은 눈에 담을 수 있는, 엄청나게 크고 귀중한 보물이었다. 마치 아버지의 이름 머리글자가 새겨진 보석상 루페로 귀중하고 완벽한 행성 전체를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고향을, 십억, 조, 천조 캐럿짜리 행성 지구를!



그는 종전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을 가지고 수술실로 들어갔지만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에브리맨’이 가야하는 길로 가고 만 것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색다를 것이 없다. 미국에 사는 한 중산층 남자의 일생 특히 나이들고 병들어 죽기까지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자의 숙련된 솜씨가 이 오래된 주제를 코앞에 바싹 들이댄다. 일부러 외면하기도 하고, 더러 잊어버리기도 하는 ‘절대적인 소거’를 두 번 다시 제쳐놓지 못하게 만든다.



단 한 줄의 문장도 허투루 쓰인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한 계산아래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진다. 그의 장례식에서 피비는 “그가 만에서 헤엄치던 것만 보여요”라고 회고한다. 단지 그 말밖에 하지 못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장면은 두 사람에게 ‘살아있음’의 정수였던 것이 나중에 드러난다. 피비와 헤어지는 장면은 단 두 장으로 처리되었다. 그것도 그의 변명 세 마디를 제외하고는 모두 피비가 한 말로 채웠다. 저자는 이 짧은 지면을 통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여자의 심경을 대변하고, 외도로 인해 완벽한 결혼을 깨는 철없는 남자의 생리를 묘사하고, 앞으로 그 남자가 처하게 될 난국까지 예고한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1 센티미터씩 사라지는 것을 다 지켜 보았다. 아버지의 관을 흙으로 덮는 것을 보며 남긴 문장이다.  살아있는 내 몸 위로 조금씩 흙이 쏟아지듯  진저리가 쳐진다.



정교하게 빚어낸 인물들을 그처럼 함축적인 문장으로 묘사하다보니 장면들이 다 보이는 것 같다. 그는 형을 거의 신격화할 정도로 믿고 숭배했었다. 그랬던 그가 병원 문턱에도 가 보지 않은 형의 건강이 부럽고 질투가 나서 형과 멀어지는가 하면,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딸과 함께 살고자 한 계획이 무산되는 것 모두 낯설지 않은 정황이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그런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은 엄정한 각본이 날렵한 문장에 실려 모든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한 편의 시나리오다.



저자의 그런 능력 때문에 ‘에브리맨’은 섬찟하다. 역자의 말처럼 무슨 장치나 꾸밈이나 특수효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렇다. ‘절대적인 소거’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해도, 어떤 호기심도 나를 달구지 못한다는 노년에 대한 두려움이 부쩍 커졌다. 동시에 저자가 행간에 숨겨놓은 메시지 또한 강하게 다가온다.



“저는 일흔하나예요. 당신네 아들이 일흔 하나라고요.”


“좋구나, 네가 살아 있구나.”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되돌아보고 네가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속죄하고, 남은 인생을 최대한 활용해봐라”



그의 독백에 대꾸하는 돌아가신 부모님, 그리고 살아계실 적 아버지의 입을 빌려 저자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



1933년생인 저자는 74세인 2006년에 이 작품을 썼다. 생존 작가 중 유일하게 Library of America에서 결정판을 출간하는 작가라고 한다. 작품 속의 ‘그’는 일흔하나의 나이에 숱한 무력감과 이질감에 시달렸다. 그러니 저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에브리맨’의 숙명을 거슬러가는 셈이다. 나도 저자처럼 살아있는 한 내 몫의 힘을 갖고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 이 천조 캐럿짜리 행성 지구에서!  그러기 위해서는 글쓰기가 그중 강력한 도구이니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글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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