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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옹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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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5일 12시 29분 등록

이 글은 3기 연구원 김도윤(인센토)님의 글입니다.

 

"두 번 죽고 싶지는 않아. 너무 지루해." - 리차드 파인만

#1.
방황했다. 이 달의 주제는 '나'인데, 나의 관심 또한 온통 '나'인데, 나는 자신 안에 깊숙이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야근을 핑계로, 회사를 그만두는 친구를 핑계로, 진급시험을 치른 회사 동기들을 핑계로 나는 다른 곳을 헤매고 다녔다. 야근과 회식을 좋아하지 않는 나답지 않게,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었고, 논현동과 신사동의 주점에, 그리고 회사 앞, 치킨집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사부님의 글 속으로 숨어들었다. 나는 그 분의 책을 몇 권 읽지 않았다. 연구원 시험을 볼 때도 고백했듯이, 내가 읽은 그의 책이라곤 '사자같이 젊은 놈들'과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이 2권이 다이다. 갑자기 사부님의 글이 읽고 싶어진 나는 인터넷 헌책방을 뒤지며 사부님의 책을 찾았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실려있는 그분의 칼럼을 읽었다. 승완 형이 쓴 사부님 이야기를 읽었다. 매우 좋았다. 그러나 이번 주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 있었다. 바로 나를 만나는 일이다.

겨우 토요일이 되어서야, 나는 이번 주의 과제인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 혁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란 화두를 풀기 위해 읽어나가던 책에서 나는 이런 글을 만났다.

"가장 통렬한 실패는 강점이 예상대로 발휘되지 않았을 때 겪는 것이다. "다시 한번 도전해 봐." 주위에서 아무리 선의의 충고를 한다 해도, …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난 재능을 발견하고, 강점을 발휘하고, 연습했지만 실패했다. 이제 무엇에 의지한단 말인가?" (p. 187)

마음을 때렸다. 그랬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실패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자 내가 연구원 시험에 합격한 뒤, 남해로 향하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 곳에서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나는 참 힘들었었다. 그 때 나는 이런 글을 썼다.

"난 안다. 내가 내 길을. 가지 못한 책임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님을.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어떤 누구도 아닌, 온전히 나만의 몫임을. 난 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가졌는데도, 행복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어리석은 염려 때문이었다. 정녕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했는데도. 잘해내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며 불안해하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작은 마음. 때문이었다."

여전히 내 안에는 그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작은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솔직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이 두려웠다. 최선을 다한 후 아무런 여력도 남아 있지 않은 그 텅 빈 허공이 싫었다. 그 캄캄한 틈새 사이의 심연이 소름 끼쳤다.

나는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비겁했다. '강점을 살리려다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피해 다녔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모든 것을 바쳐 본 적이 없다.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할 벼랑 끝으로 자신을 몰아세워 본 적이 없다. 사진반은 1년 반 만에 탈퇴해 버렸고, 영상원 시험을 볼 때는 둘째날, 10분을 지각하고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단념했고,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1년도 안돼서 접어버렸다.

무언가를 표현하는데 관심이 있었음에도 최선을 다해 그림을 배운 적도, 사진을 찍은 적도, 짧은 단편 영화 한편 만들어 본적도 없다. 정작 가장 하고 싶은 일들은 뒤로 자꾸만 미루고, 남이 보기에 모나지 않고, 무난해 보이는 일들만을 하고 있었다. 그런 비겁한 타협의 결과가 바로 지금의 나였다.

책을 읽다 잠시 켰던 TV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메리칸 탑 모델'이란 프로그램이다. 아마 시즌 7이었던 듯 하다. 4명의 후보 중 한 명이 떨어져야 하는 결정의 순간이다. 미래적인 마스크의 묘한 매력을 지닌 한 후보가 'too young'이라는 이유로, 미숙하다는 이유로 떨어졌다. 떨어진 한 명이 그 동안 들였을 노력과 땀방울, 그리고 떨어지는 그 순간의 아득한 절망 때문에 순간, 울컥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최악의 사태가 무엇인가? 당신은 재능을 발견했고, 강점으로 개발했고, 기대만큼 수행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지나치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실패 역시 배움의 기회이고, 실패를 거울 삼아 다음 번에는 더 나아질 것이다. W. C. 필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처음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다시 시도하라. 그리고 나서 포기하라. 웃음거리가 될 만한 점은 하나도 없다." (p. 189)

그렇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그녀는 최선을 다했고,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비록 떨어졌지만 수많은 후보들 중 최종 4명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부끄러울 게 그 무엇이란 말인가? 오히려 최선을 다하지 못한, 그래서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는 내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운 게 아니냐. 아니, 부끄러운 게 아니라, 괴롭기 짝이 없는 게 아니냐.

칼 융은 말한다. "자기 자신의 존재 법칙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우리 자신이 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이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다." 필요 없는 변명은 이제 그만두자. 남은 길은 하나 밖에 없다."

#2.
지난달,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라이언 킹'을 보았다.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이야기에 나는 무슨 눈물을 그리도 흘렸던 것일까. 나는 그 뮤지컬이 끝난 뒤 인형을 하나 샀다. 어린 사자, 심바의 인형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몫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누구도 최후의 순간, "너의 삶을 살았느냐?"는 무서운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자신의 진정한 몫을 발견하고, 일깨워라. 자신을 찾고,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일어서라. 일어선 그 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드러날 것이다.

그 부드럽고, 형체 없이 모호한 심바의 얼굴에, 자신을 발견한 진정한 사자의 얼굴이 숨어있었듯이, 자신의 온전한 영혼이 세상을 뒤흔드는 우렁찬 사자후(獅子吼)와 함께 깨어날 것이다. 힘찬 기지개와 함께 새로운 나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미루지 않을 것이다. 굳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차선을 선택하며 최선을 기대하는 어리석은 짓을 계속할 필요가 그 어디에 있겠는가.

"아침. 마음 속의 숲길을 지나, 여기도 저기도 아닌. 마음과 마음 사이. 모든 것이 멈춘 듯. 조용한 그 곳으로 갈 것이다. 작은 강이. 천년 전의 바다처럼 유유히 흐르고.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오백 년 된 아름드리 참나무처럼 당당하게 서 있는. 숲으로 둘러 쌓인 동그란 공터에. 낡고 작은 집 한 채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나무 그루터기가 앉아있는. 그 곳으로 갈 것이다.

조용히 작은 집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면. 또박또박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한 아이가 서 있다. 아이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 보다. 영원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오려낸 종이 속. 까만 밤하늘 같은 눈으로 말하겠지. ‘내가 바로 너구나……”

우린. 집 옆 나무. 그루터기에 나란히 앉아. 아무 말도 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볼 것이다. 나무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의 결을 느낄 것이다. 숲 위. 동그란 하늘 위로 지나가는 구름의 향기를 맡을 것이다. 따뜻한 햇살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할 것이다.

그럼. 아이가 “이제 괜찮아.”하고 내 등을 톡톡 두드려 줄지도 모른다.

우린 춤출 것이다. 둘이서. 한바탕 야단법석을 피울 것이다. 온 숲이 떠나가도록. 마음껏 뛰어 놀 것이다. 같이 뒹굴 것이다. 아! 하고 고함지를 것이다. 신나게. 신나게. 노래 부르고. 마구마구 땀 흘릴 것이다. 우리가 맨 처음 보았던 영화. 킹콩을 다시 볼 것이다. 집 안 가득 낙서하고. 그림 그릴 것이다. 먹고. 마실 것이다. 아직도 가슴을 벌렁거리는 아이의 눈을 들여다 보며 물을 것이다. 네가 진짜.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내 안의 아이를 만날 것이다. 홍대 앞에 가서 시끄러운 음악을 들을 것이다. 신이 나면 춤을 출 것이다. 그림을 그릴 것이다. 부끄럽지만 어쨌던 시작할 것이다. 마이너 화이트의 사진처럼 '조용히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듯한, 아님 멈춘 듯한, 이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그런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나의 마음이 이끌리는 그것들을 바로 지금 시작할 것이다.

사부님은 말씀하신다.

"살아지는 대로 산다는 것은 주어진 작은 재능에 흥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우는 것이다. 자신을 존중하며, 진실해지는 것이다.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진실하다. 그들은 태어난 대로 생긴 대로 마음이 흐르는 대로 따라간다. 햇빛을 뼛 속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믿고 풀어주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신의 음성을 따라가는 것이다. 세상에 아직 남겨진 마음의 평화를 즐기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의 아침, p. 269)

아직은 형체가 없이 모호하지만, 자신을 이끄는 그 영혼의 길을 따라가라. 하루 하루, 새로운 자신을 발견해 나가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으로 최선의 나를 조각해나가라. 자, 이제 우렁찬 함성과 함께, 너의 맑은 눈을 떠라. 찬란한 시작은 늘 그렇듯 이렇게 초라하였다. 그러니 부디 용기를 내어 '그 누구도 아닌, 네가 되어라!'

라디오에서 영화 '갈매기의 꿈'의 주제가 'Be'가 흘러나온다. 내일 아침이면 출장을 떠난 아내가 돌아올 것이다. 공항으로 아내를 마중 나갈 것이다. 많이 외로웠다고 말하리라. 그러나 참 좋은 외로움이었다.


"너의 전신은, 날개 끝에서 날개 끝에 이르기까지." - 갈매기의 꿈, 리차드 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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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의 끝에 마치 이 글의 주제가처럼 흘러나온 노래, 'be'를 링크합니다^^)

* Jonathan Livingstone Seagull / Be, Neil Diamond

 
 

김도윤 변화경영연구소 3기 연구원(har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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