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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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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6일 11시 06분 등록

이글은 4기 양재우 연구원(bang_1999@naver.com)의 글입니다. 

 

‘1598년 11월 19일 슬프고도 또 슬픈 마른 북풍바람이 휘몰아 침’

 

나는 수많은 조선수군 중 한명의 사부(射夫)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가장 존경했던 장군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접하였고 통곡하였고, 가슴으로부터 솟구치는 피울음을 울어야만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의 소용돌이 속에 움켜쥔 화살로 수많은 왜적을 노량의 성난 물결 속으로 떨어뜨렸지만 그 아픔은 천분지 일, 만분지 일도 나아질 것이 아니었다. 장군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었다......


평소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던 장군을 지척에서 뵐 수 있었던 것은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인한 그의 추락때문이었다. 바싹 마를데로 마른 체구에 핏기없이 하이얀 피부 그리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은 보기에도 병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빛 하나만큼은 마주보는 사람의 심장을 뚫어버릴만큼 강하게 빛나고 있었고, 앙다문 입술에는 제 아무리 사나운 금부도사라 할 지라도 쉽게 대하지 못할 엄숙함이 서려 있었다. 말을 아꼈지만 가끔 들을 수 있는 그의 굵으며 짧고 끊어지는 목소리에는 결코 인간이 감당키조차 어려운 고통에 짓눌린 비장감이 서려 있는 듯 했다. 그는 목적을 아주 깊은 곳에 은밀히 감춘 채 날카롭게 갈아진 날을 갈고 또 갈고 있는 칼의 애끓는 울음소리와 같았다.

 

당시 나는 거제에 있었고 한창 다른 사부들과 함께 활쏘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제현령과 함께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 백의종군 후 도원수 권율장군의 명을 받아 전 수군의 전력을 살펴보고자 돌고있다 했다. 모든 조선수군들은 바닥에 엎드려 진심으로 애통해 하며 눈물 흘렸다. 그러자 그는 오히려 웃음을 보이며 이제는 괜찮다 하였고, 이럴 때일수록 조선수군의 힘을 모아 반드시 왜적을 물리쳐 이 전쟁을 우리 손으로 끝내자고 하였다.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거제에서 하룻밤을 묵은 그는 다음날 우리가 역시 활쏘는 연습을 하는 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엔 혼자였다. 멀리서 우리의 연습을 보던 중 갑자기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의 활을 잡아 몸소 시범을 보여 주고 활 쏘는 방법에 대해 자상히 알려주며,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화살은 곧 너의 분신이다. 너의 정신이 화살과 함께 날아간다고 생각할 때 너는 집중할 수 있고 그 힘이 붙는 것이다. 단지 활 시위를 힘차게 당겼다 놓는 것만으로는 결코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 너의 정신을 담아 쏘아라. 적을 죽이지 못하면 너는 왜구의 칼에 베어지고 말 것이다. 화살 하나하나가 곧 너의 목숨이고 생명이다. 죽고자 할 때만이 너가 살 길이 보일 것이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장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곧 나의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용기이자 힘이었다. 그때까지 목숨만 보존하고자 했던 나의 두려움은 모두 사라지고 어서 우리 민족을 짓이겨놓은 왜구의 심장 깊은 곳에 나의 화살을 박고 싶었다. 나의 피끓는 가슴을 왜구의 서늘한 피로 식혀주고 싶었다. 그래. 죽고자 할 때 나는 살 수 있으리라. 내가 죽기위해 싸울 때 내 동료, 내 가족, 친척, 조상 그리고 우리 조선이 살 수 있으리라.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정말 다행이도 그는 백의종군의 신분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였다. 아무도 그의 자리를 대신할 장수는 없었다. 그는 조선수군의 구세주였다. 나는 그가 통제사 복귀 후 이끈 명량해전에서 죽기 위해 싸웠고 결국 살아 남았다. 수많은 왜구의 총탄 속에서 나는 혼을 담아 활을 당겼고 날아간 화살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왜구의 몸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왜구의 피는 서늘했지만 내 옆에서 죽어가는 동료의 피는 너무 뜨겁기만 했다. 나는 처절함을 식히기 위한 더 많은 왜구의 피가 필요했다.


1598년 11월 17일 노량으로의 출격명령이 떨어졌다.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었다. 우리 조선을 명나라 침략의 중간기지로 삼기 위해 일으킨 임진년 전쟁의 끝에 나는 서있었다. 비록 왜구들 끼리의 내전(內戰)으로 인해 적의 장수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지만, 이미 조선 땅을 밟은 왜구들은 결코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우리 가족, 형제, 부모, 친척, 동료들이 흘린 피와 울어도 울어도 멈추지 않는 피울음, 애절타못해 목이 타게 질렀던 그 통곡소리를 그대로 돌려줄 것이다. 이 전투가 곧 나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죽음은 죽어서 좋은 것이고 삶은 살아서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 하나의 죽음은 곧 왜구 천명 이상의 죽음이 될 것이다.

 

노량의 앞바다는 화가 날 데로 나 있는 상태였다. 수 많은 죽음을 받아들인 물결이 더 많은 피를 달라고 원하는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량은 더 이상 바다가 아닐 것이다. 이 곳은 이름모를 수많은 왜구의 무덤터가 될 것이다. 배 옆단을 사납게 내리치는 노량의 거센 물결은 더 이상 기다릴 인내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장군의 칼이 하늘을 찌름과 동시에 우리의 화살은 왜구의 심장을 향하여 날아갔고 수많은 왜구들이 배에서 떨어지며 노량의 목마름을 달래기 시작했다. 곧 날아오는 총탄 속에 우리 사부, 격군 또한 피를 쏟기 시작하였다. 사격소리와 활시위 소리 속에 인간의 아우성은 점차 커져만 갔고 화약연기속에 사방은 한치앞도 제대로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혼란해져만 갔다. 왜적의 배와 근접한 상태에서 준비해 둔 볏단을 던지고 불화살에 불을 붙였다. 어둠을 가르며 날아가는 불은 살아있는 힘찬 몸부림과 같았다. 어릴 적 쥐불놀이의 아름다움이 노량 위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불이 생전 이처럼 아름다운 적은 없었다. 배를 삼켜버리는 불의 또아리가 온 천하를 삼킬듯 커져가고 있었다. 이 전쟁에 나는 없었다. 나의 혼은 내가 쏜 화살을 따라 온 사방의 왜구의 심장을 후벼파며 날아 다니고 있었다. 솟구쳐 나오는 왜구의 피를 확인하고서야 나는 다른 왜구의 심장을 향해 움직였다.

 

우리의 배가 대장선을 호위하여 전투에 임한 지 얼마되지 않을 때였다. 갑자기 바다 위 마른 북풍이 회오리치듯 대장선을 휘감고 지나갔다. 어둠과 화약의 짙은 혼란 속에 장군의 옥체가 고목나무 스러지듯 서서이 가라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뚜렷이 담을 수 있었다. 심장이 터져 나갈 듯, 눈에 피눈물이 솟구칠 듯, 온 몸의 혈압이 몸의 가장 자리 부분으로 향하여 마구 돌진하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장군이 여기서 이럴 수는 없었다. 우리 민족의 꿈이 여기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이것은 꿈이자 허구이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무리 소리쳐도 목구멍에서 일말의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끄윽, 끅’ 하는 동물의 울음소리만이 쏟아져 나왔다. 총탄이 날아오는 그 곳을 향하여 내가 가진 모든 화살을 있는 힘을 다하여 쏘아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속 분노만이 나를 대신할 뿐이었다. 나는 분노였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였다. 스스로의 불타오름을 주체하지 못해 일순간에 한줌 재로 타버릴 분노였다. 순간, 가슴 팍이 둔탁한 통증과 함께 가슴에서 그리고 입에서 새빨간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미 빨간 갑판을 더욱 더 선명한 빨간색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아... 이제 나는 사는 것이구나...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구나... 온 정신이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겠구나... 그리고.... 장군과 함께, 장군을 모시고 갈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구나.... 불이여... 노량이여... 우리에게 안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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