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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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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7일 21시 39분 등록

 이 컬럼은 6기 박경숙 연구원의 글 입니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진화의 사다리를 오르는 길은 순례자의 길과 유사하다. 진화는 엔트로피법칙을 역행해야 이루어 낼 수 있는 어렵고 힘든 과정을 반드시 통과되어야 한다. 특히 용기라는 첫 번째 관문을 지나고 난 이후로는 한 단계씩 상승하는 것이 더욱 그러하다. 세상과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용기를 비로소 가진 이후에 제일먼저 우리에게 던져지는 과제는 통합적 시각을 가져야만 풀어낼 수 있는 ‘중용의 단계’이다. 이 수준은 강한 긍정 에너지가 발생하기 시작한 지점으로 낮은 상태의 ‘편파적인 관점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는 장소이다.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사물을 이원적으로 바라본다. 흑백의 논리와 편파적인 판단으로 세상을 가름한다. 따라서 대립과 분열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구부릴 수 없는 것은 부러지기 쉽고, 에너지를 분산시켜버리는 반대와 저항에 집중하면 생산과 창조를 이끌어 낼 수가 없다. 따라서 반대를 초월하는 ‘중용’적 태도는 유연성과 포용력,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파악능력을 갖게 해준다. ‘중용’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결과를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패배했다고 생각하거나 좌절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전혀 놀라지도 않게 된다. 중용의 자세가 가지는 강력한 힘은 이 ‘놀라지 않음’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중용의 단계’는 쉽게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흑백 논리가 선명한 사람들은 중용의 시각이 스스로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지므로,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떤 선한 이념을 고수하고 있다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거나 동전의 한면만을 보고자 한다면 그는 그 단계를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의 한계는 바로 이지점이고 그는 중용의 레벨을 오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되어 버릴 것이다. 어떻게 이 단계를 지나갈 수 있을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성장을 원하고 발전과 성공을 희망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희망을 제시하면 그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으려고 한다. 인간이 아직 꿈을 버리지 않았음의 증거이다.

몇 년전, 성공을 이뤄내는 우주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론다 번의 ‘시크릿(the secret)’에 전 세계가 열광한 적이 있다. 그 ‘시크릿’은 무언가를 그냥 원하기만 하고, 절대 의심만 하지 않는다면 원하던 소망이 어느날 이루어진다는 아주 단순한 개념이었다. 단순함에 사람들은 빨려들었다. 성공과 행복이 그리 쉽다는데 사람들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론다 번은 자신의 그 단순한 ‘시크릿’이 실존하는 물리법칙과 같은 성공의 법칙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수많은 사례를 보여주며, 이 법칙이 이미 동서고금에서 숱하게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상당히 그럴듯한 전개였다. 그리하여 론다 번의 책은 꿈을 이루고자 하는 많은 사람과, 부유함을 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신도 쉽게 꿈과 부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시크릿은 쉽게 성공을 만들어 내려는 사람들과 나약한 정신력을 지닌 독자에게 손쉬운 정신의 아편 같은 역할을 해내었고 호주의 프로듀서 출신이었던 그녀의 기획된 DVD와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시크릿을 통해 론다 번과 DVD 기획자들은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녀의 시크릿을 믿었던 숱한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전부 부를 이루었을까? 그때 시크릿을 신앙처럼 믿었던 사람들은 지금 과연 자신의 꿈을 이루었거나, 꿈을 이루는 길에 들어서 있을까?

미국의 한 목사가 있다. 부친의 교회를 급성장 시킨 차세대 기독교 리더로 부상한 조엘 오스틴 목사이다. 영화배우 같이 아름다운 사모와 함께 휴스턴 로케츠 프로 야구팀 구장에서 수만명이 모인 가운데, 엄청난 열광 속에 매주일 집회를 진행해가는 젊은 목사이다. 수백만부가 팔려나간 그의 책 ‘긍정의 힘’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조차도 한번쯤 보고 싶게 만드는, 신앙서적이라기 보다는 자기계발서 같은 책이다. 이 ‘긍정의 힘’이라는 그의 첫 책은 출판사의 상업성 전략에 따른 기획에서 였는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에 따른 성령의 인도에 의한 집필이었는지는 모르나, 비슷한 후속작을 여러 종 만들어내었고, 알맹이 없는 그의 후작들은 책값이 아깝다고 느낄 정도로 허접했다. 세 시간정도면 다 읽을 수 있을 만화같은 자기 계발서에 하나님만 차용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강한 영감을 주는 듯한 오스틴의 긍정주의 설교에 매주 미국 기독교인들은 더욱 더 빠져들고 있고, 그의 ‘긍정의 힘’시리즈는 지금도 전 세계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인세를 지불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 나는 의문이 생긴다. 그렇게도 오스틴에 열광하던 그들은 정말 행복해졌을까?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믿었던 사람들은 정말 작은 ‘힘’이라도 얻었을까?

‘시크릿과 긍정의 힘’ 이 두 원칙에 왜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고 있을까? 왜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개념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을까? 어려운 시대,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 속에서 바라보며 우리는 신앙만큼 우리를 이끌어 줄 단순하고 쉬운 정신의 화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리라. 론다 번의 ‘시크릿’은 간절히 원하고 의심만 하지 않는다면 우주가 꿈을 이루어 준다는 법칙이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믿는대로 된다’는 ‘긍정의 힘’ 역시 하나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것이니 기도하고 믿기만 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동일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냥 믿으라는 것이다.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행위’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믿음에 대한 언급’만 있고 ‘행위에 대한 강조’가 없는 것이 이 둘의 특징이다. 왜 행위에 대한 강조를 제외시켰을까? 책임이나 행동에 대한 자신의 노력이 강조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흥미를 잃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믿음을 강조한 히브리서에는 ‘은혜를 받았다’는 성도가 많지만, 행위가 중요하다는 야고보서는 ‘은혜가 안된다’고 말하는 기독교인이 많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행위를 말하지 말고 믿음만 강조하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너희에 열광하며 따라 오리라. 그 원리를 론다 번과 조엘 오스틴 목사는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성장이 그리 쉽지만은 않고 변화나 진화가 단숨에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계획보다 한번의 실험이 신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피라미드를 만들어내는 건 한 개 한 개 잘 구워진 벽돌이라는 사실에서 나는 그들의 믿음보다는 행위의 중요성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그러나 행위보다는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와 서적에 사람들은 쉽게 끌린다. 따라서 우리가 이루어 놓은 종교들도 그러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불교를 믿는 불자들은 ‘원을 쌓으면 이루어진다’고 비슷한 원칙을 말하고 있으며, 또 다른 종교들도 결국은 ‘기복’을 제일의 원칙으로 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들은 절대 현실에서 복을 구하지 않는다는 일부 종교도 알고 보면 ‘천국에서의 상급’이라는 말로 죽음 이후의 행복을 추구하거나, 윤회의 업에서 벗어나 해탈한다는 ‘내세의 행복’을 꿈꾸고 있으니 결국은 ‘기복’이라는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믿음과 복에 대한 강조가 모든 곳에서 보인다.

왜 우리는 이렇게 복을 원할 수 밖에 없는가? 이때의 복은 꿈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프로이트가 말한 리비도와 같은 ‘삶의 충동’과 같이 희망을 갈구할 것이다, 그런데 그 꿈이나 희망, 복이 ‘시크릿’이나 ‘긍정의 힘’, 불교의 ‘원’만으로 이루어 질수 있는가? 야고보서의 ‘행위’ 없는 히브리서의 ‘믿음’만으로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시크릿을 믿고 투자했다가 원금전체를 날린 주식투자자 같은 실패한 회의주의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준다고 철썩같이 믿으며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한 초라한 행색의, 서리집사에게 조차 무시당하는, 억지웃음의 장로, 믿기 전보다 현실이 더 팍팍해진 광신도들의 냉랭해진 믿음, 아들의 대학 입시를 위해 절에서 수 천배를 하였으나 결국 관절염만 심해졌고, 연이은 입시에 실패한 군 입대를 앞둔 아들을 둔 병든 어머니.........우리 주변엔 이런 패잔병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이런 패잔병 중 한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열정이 있었으나 그 열정을 쏟을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무빙 타켓에 겨냥해 보았자 명중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백전백패 할 수 밖에 없는 만년 패자였었었다. 넘치는 열정을 조엘 오스틴의 믿음에 쏟았다간 광신도가 되었을 것이고, 시크릿에 부었다간 정신과 진료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적절한 ‘현실 검열’이 필요했으나 그들은 그것을 ‘믿음 부족’ 혹은 ‘의심’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성공하지 못하는 원인과 현세가 천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로 그 ‘의심’을 들고 있었다. 딜레마였다.

어떻게 하면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현실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을까? 믿음을 가지되 정신과 진료를 필요로 하지 않고, 열정을 품으나 거품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한가? ‘시크릿’과 ‘긍정의 힘’이 주는 믿음이 우리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선 그것들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언가가 반드시 추가되어야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순간순간 많은 패배를 하였으나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의 남은 날들을 승리로 바꾸기 위해선 새로운 어떤 전략이 필요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정교하게 계획된 어떠한 전략을 따를 때에 우리가 서바이블 할 수 있는가? 그 전략이 무엇인가? 이것이 오랜 나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하나의 답을 찾아내었다. 중용적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여유이다. 믿음과 측복 만을 갈구해서는 안된다면 그 반대편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어야 함을 나는 이제야 알 수 있다.

반대의 시각으로 전쟁터에서 살아나온 예를 보자. 그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서바이블 했고 우리는 그들의 전략을 삶과 인생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성장과 진화를 위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그들의 전략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진화시켜줄 것이다.

전쟁터에서 포로가 되어 주변의 많은 포로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지만 자신은 극적으로 살아나온 사람 중 유명한 사례가 둘이 있다. 빅터 프랭클이 한 예이고, 짐 스톡데일이 두 번째 예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삶을 승리로 바꿀 서바이블의 전략을 배울 수 있다. 시크릿과 긍정의 힘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지점을 우리는 거기서 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최고위 장교였던 짐 스톡데일(Jim Stockdale)은 ‘하노이 힐턴’ 전쟁포로 수용소에 8년간 수용되었다가 종전 후 석방되어 조종사 기장과 의회 명예훈장 등을 받아 최초의 3성 장군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그가 전쟁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실화들에 근거해서 만들어낸 ‘스톡데일 파라독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패러다임 시프트를 요구하는 새로운 원칙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Good에서 Great로 진화한 기업들을 조사한 짐 콜린스(Jim Collins)는 Great로 진화한 기업들에서 하나의 법칙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그는 ‘스톡데일 파라독스’이라고 부르고 있다. 짐 콜린스는 위대한 회사로 진화한 기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냉혹한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최종 승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고 위대한Great 회사로 우뚝 서고야 말리라는 맹세를 그들은 지켰다. 우리는 이 이중성을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고 부르기로 했다.”

‘냉혹한 현실직시’와 ‘굳은 믿음’, 이 이중적인 개념을 둘 다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기업만이 Good에서 Great로 진화했다 것이 스톡데일 패러독스이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관점에 대한 허용, 즉 통합적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만 이루어낼 수 있다. 중용의 단계이다. 스톡데일의 패러독스가 나온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전쟁 후 어떤 인터뷰에서 ‘수용소를 견뎌내지 못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냐는 기자의 물음에 스톡데일은 ‘그들은 낙관주의자였다’라고 답한 것에서 스톡데일 패러독스가 유래했다. 그것은 바로 ‘시크릿과 긍정의 힘’만으로 우리가 절대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비밀을 알려주는 축약된 지혜의 말이었다. 스톡데일의 파라독스는 포로수용소라는 제한된 공간과 수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서 실제로 삶과 죽음으로 갈리어 간 많은 사례를 통해 내린 하나의 원칙이므로, 우리에게 강한 충격과 깊은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수용소에서 서바이블할 수 있는 강력한 전략 하나를 만들어 나와 우리에게 꼭 배우라고 강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나는 강하게 받았다.

스톡데일은 말했다. “수용소에서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낙관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거야’ 하고 말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오고 크리스마스가 갑니다. 그러면 그들은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오고 다시 부활절이 가지요.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그리고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지요. 이건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결국에는 성공할 거라는 믿음, 결단코 실패할 리는 없다는 믿음과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고 규율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톡데일의 말이 파라독스가 되는 지점이다. 이 이중성을 우리는 늘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이 이중성의 동시 보유가 중용적 시각, 통합적 사고의 출발이 될 수 있다.

믿음을 가지되 현실을 망각하면 안되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말되 자원의 한계 역시 직시하면서 우리의 매일을 채워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무대책과 무책임한 낙관주의자로 살아가서는 실패만 더할 수 있기에 짐 콜린스가 가슴에 품고 다닌다던 “우린 크리스마스 때까지 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에 대비하세요.”를 우리의 가슴에도 역시 늘 새겨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스톡데일 파라독스’는 ‘의미’를 가진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가 가르쳐주는 ‘의미’위에 새로운 전략을 하나를 더 얹어주는 느낌이다. ‘스톡데일의 파라독스’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 위에 ‘현실직시’라는 안전장치를 하나 더해주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프랭클의 의미가 ‘믿음’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스톡데일의 현실직시도 함께 라는 ‘이중성’은 ‘의심’의 작용도 함께 하고 있으니, 믿음이 광신으로 빠지지 않을 안전장치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전장치를 가진 자만이 죽지 않고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의심이라는 ‘파라독스’가 될 수밖에 없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다룰 수 있는 중용의 단계를 통과해 나갈 때, 우리는 꿈을 이루고 자유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시크릿과 긍정의 힘만으로는 통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긍정과 낙관만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어 간다는 굳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스톡데일의 현실직시는 강력한 ‘인지의 전환’을 요구한다. 굳은 긍정주의를 채택했으나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긍정만으로는 생산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성공으로 만들어 내는 힘은 낙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냉혹한 현실을 비관할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다. 비관에 따른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을 때에만 사람은 움직이기 시작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신은 반드시 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결과적으로 인생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낙관주의자, 열심히 교회를 다녔으나 자신만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다고 자책하는 기독교인들이 다시 힘을 얻기 위해선 통합적 전략, 중용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은혜와 긍정과 시크릿에만 의존해서는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없다. 전략을 다시 수정해야 한다. 긍정에만 기대해서는 안 된다. 믿기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시크릿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시크릿을 법칙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에 기반을 둔 행동이었다. 행동만이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행동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중지되지 않고 지속되기 위해서 시크릿과 긍정의 힘과 낙관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행위 없는 믿음만으로는 피라미드의 단 한개 벽돌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행위를 일으키는 건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를 바라보는 믿음이고, 반드시 피라미드를 만들어 내겠다는 목적이 그의 매일을 이끌어 갈 때, 그는 결국 피라미드를 만들어 내는 기적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영의 구루(guru)라고 불리는 게리 해멀이 ‘경영의 미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험은 계획을 이긴다. 인간은 누군가를 통제하기 좋아한다. 사람들은 계획에 따라 미래가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가 점점 믿지 못할 상황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경쟁을 뚫고 성공하려면 계획에 의존하기보다는 미래에 대비하는 실험을 준비하는 편이 더 낫다.

백번의 계획보다 단 한 번의 망치질이 훨씬 더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믿음에 따른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과 함께 실패의 의심도 함께 하면서, 끊어지지 않는 매일의 실천과 실험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석방되리라는 믿음과 함께, 올 크리스마스까지는 석방되지 못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잊지 않는 중용의 자세와 통합적 시각으로 매일의 훈련을 지속해야 한다. 그것이 누적되어 생산물이 만들어 지고, 생산물이 있을 때 비로소 시크릿은 그들의 법칙이 아닌 나의 법칙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아 니가 참 잘했다’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믿음과 의심, 낙관과 함께 냉정한 현실 직시라는 두 개의 상반된 관점을 동시에 보유하고 계획을 능가하는 실험을 매일 해 나갈 때, 우리는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 꿈을 이룰 수 있게 전략하나를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상반되는 것들을 동시에 가질 수 있을 때 무기력에서 시작한 우리의 순례가 중용의 단계를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통합적 시각을 가질수 있게 될 때, 우리의 열정은 거품으로 흘러 넘쳐버리지 않게 되고, 우리의 냉정이 자신을 얼어붙어버리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믿음과 의심이라는 양날의 칼을 매일 가는 것이 통합적 시작을 통한 중용의 태도를 가지는 기본 훈련의 하나임을 기억하자. 반대되는 이념을 동시에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안전장치를 하나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 양날의 칼을 동시에 쓸 줄 알게 되면 비로소 자기 내면의 잠재력을 믿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고,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안달하지 않을 수 있다. 안달하지 않는 인생만큼 안전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 역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자신이 어떤 혼란을 겪었던, 어떠한 파국을 당했던 간에 그는 근본적인 수용의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용의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이것은 다음 단계로의 성장, 즉 자발성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비난하는 태도가 없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려는 충동조차 느끼지 않는다. 대립이나 경쟁에 무관심하고 정서가 안정될 수 있다. 이 모든것의 출발은 두 개의 상반되는 개념을 동시에 허용할 수 있을 때부터 가능하다. 그러므로 믿음과 의심, 이것을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자기 운명에 대한 의심까지 함께 녹여가진자 그들이 바로 무기력의 독소로부터 자신을 살려낸 사람들이고, 영웅으로 갈수 있는 인자 하나를 보유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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