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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0일 10시 29분 등록

 

2기 연구원 정재엽 님의 글 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글, <미국인상 American Impression> <미국남성 American Men>은 와일드가 27세 때인 1881, 미국으로 건너가 약 1년 동안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강연을 하며 보낸 체험에서 나온 일종의 여행기이다. 그는 3개월을 예정으로 강연 여행을 기획하였으나, 그의 강연을 듣고자 하는 많은 단체의 요청에 결국 1여년으로 연장하였다. 특히 <미국인상>을 보면 내가 공부했던 뉴욕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있다.

 

“미국은 현존하는 나라들 가운데 가장 소음이 심한 국가다. 미국인들은 아침에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가 아니라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에 눈을 뜬다. ...예술은 정교하고 섬세한 감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런 지속적인 소란은 결국에는 틀림없이 음악적 재능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 미국인들은 미를 만들어내려고 애썼지만, 결국에는 분명히 실패해왔다. 미국인들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현대생활에 과학을 적용시킨 방식이다. 이것은 뉴욕을 그냥 한번 대충 걸어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발명가는 존경의 대상이며, 여러 가지 도움을 받기도 쉽고, 창의력을 발휘하거나 인간이 하는 작업에 과학을 적용하는 것이 부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된다. 미국은 세상에서 기계가 가장 사랑받는 나라인 것이다.

 

<미국 남성>에서 미국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들은 아름답고 밝게 빛나는 두 눈과 지칠 줄 모르는 힘과 놀라운 민첩성을 지닌 젊은 남성들의 유쾌함이 두드러진다. ...그들은 책보다는 인간을 더 잘 알고 문학작품보다는 실제 인생이 그들에게는 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미국 남성들은 유머가 없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인정은 있다. ... 자신의 땅에 발을 디딘 이방인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 그들은 우연히 찾아온 방문객 모두에게 그들이 위대한 나라의 소중한 손님이라고 느끼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미국과 미국남성에 관한 글을 읽으며 문득 2000년 초반, 나는 뉴욕에서 공부하던 때를 떠올렸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자유로운 학풍으로 유명했다. 자유로운 펑키 패션에, 골목골목에는 성인용품을 파는 섹스숍이 즐비했고, 조그만 레스토랑에 무지개 깃발이 꽂혀있는 곳은 동성애자들이 자주 가는 표시였다. 한국의 거리와 대학가에 익숙해져있던 나는, 학기 초반 넘쳐나는 과제물과 새로운 학교 수업에 적응하느라 학교 주변을 관찰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생활에 익숙해지고, 친구들도 사귀게 됨에 따라 바쁜 뉴욕생활에 젖어들어갔다. 나머지는 큰 문제는 없었으나,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동성애에 관한 문제였다. 한국에 있을 때는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없었지만, 뉴욕시에서 게이나 레즈비언들이 길거리나 레스토랑에서 애정 어린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돌이켜보면, 중고등학교 사춘기 시절, 한 가수를 끔찍하게 좋아해 브로마이드나, 잡지를 찢어 일기장에 붙이는 등의 행동을 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동성애라기보다는 스타에 대한 관심이었던 것 같다. 사실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교육 받았음에도, 막상 학생들끼리 여는 파티나, 행사에서 자기 자신이 게이나 레즈비언임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마음이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런 나 자신도 모순에 직면할 때가 있다. 먼저 가족관계에서 내가 가장 편안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가 형이 아닌, 누나들이였다. 그리고 깊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에게서였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가장 마음 편하게 이야기 할 상대도 동기 남자 친구가 아닌 여자 친구나 선배들이었다. 대학시절, 공강 시간만 되면, 여자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젊음을 만끽했다. 남자 동기들이 학교 주변 술집에 가서 인생을 논할 때, 나는 여자 동기들과 커피를 마시며 정보를 교환했다. 나는 어수룩한 또래 남자들보다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여자들에게 훨씬 마음을 놓기 수월했다. 그것을 애정이라고 해야 할까, 우정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건 이성애건 우정이건 애정이건 나 자신을 돌아보아도 늘 여성들과 편안함을 느끼며 자유롭게 교류해왔다. 동성애적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도 짙은 여성성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다.
유학 초기 룸메이트와 관련된 일이다. 그 친구는 한국에서 총망 받던 작곡가였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였지만, 좀 더 실용적인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유학을 온 것이었다. 그와 룸메이트였지만, 그는 그의 사생활을 나에게 노출하기를 극히 꺼려했다. 그는 세탁도 혼자 따로 했고, 저녁을 먹는 것도 거의 혼자하거나 다른 친구들과 함께했다. 그는 한국 친구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고, 대부분이 미국 친구들이었다. 나는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안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친구가 열어 보았던 인터넷 주소창만 몇 개 클릭 하는 것으로도 그의 성정체성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 둘 다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늘 아끼면서 살아야만 했고, 그러기에 ‘친구’라기보다는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는 브루클린에 값싸게 나온 집이 있다며, 다음 달에 이사를 가겠다고 했다. 유학생활에서 이사를 가고 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기에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이사를 가는 날, 나는 그래도 룸메이트인데, 그에게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선물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유명 서점에 들러서 그를 위한 선물을 골랐다. 내가 고른 것은 동성애에 관한 책이었다. 대략의 내용을 보니, 동성애로 고민하던 사례들과 그런 사례들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동성애자로서 미국에서 사는 법- 당시 그 친구는 미국에 머물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등이 자세히 나와 있었고, 책값도 유학생이 지불하기엔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상당한 가격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 친구가 당당하게 살기를 바랬고, 다른 룸메이트와 더 좋은 관계를 이루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 그 선물을 준비했다. 우리 둘은 학교 근처 저렴한 중국 음식점에서 만나 그간 그 친구에게 고마웠던 점들 이야기 했고, 앞으로 졸업이나 진로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수순에 의해 준비한 책을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러나 이내 친구는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선물을 받아 좋아 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반대로, 그 친구는 한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무언가 걸렸다는 표정. 아니, 그것보다 나에게 실망했다는 표정이 더 정확하겠다. 그리고 약간의 눈물이 그 친구의 눈에 고였던 것도 같다. 기쁜 마음에 책을 받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다운 된 친구의 기분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니가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어떤 성향을 가지던지 말이야.” 그래도 반응이 시원치 않자 나는 분위기를 바꾸려 다른 주제를 던졌다.

 

“그런데 너의 새 룸메이트는 너랑 무슨 관계니? 어떻게 만났어? 누가 소개시켜 준거니?  . 말하기 싫음 말 안해도 돼.” 하며 그 책을 서점에서 살 때 계산대 앞에서 서 있는 동안 누가 그 책을 보고 나를 게이로 오인할까 조마조마했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였다.

 

그 후, 나는 학교 신문을 통해 새로운 룸메이트를 만났고, 바쁜 일상생활에 다시 스며들었다. 친구가 이사 간 뒤로, 졸업 때까지 그 친구는 거의 보질 못했다. 우연히 다운타운 식당가에서 마주쳤을 땐, 서로 일행과 함께 있었으므로 가벼운 눈인사만으로 헤어졌다.

 

문득 동성애에 대한 기사나 누군가 커밍아웃을 한 기사를 접할 때마다 나는 그 친구를 생각한다. 1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마지막 식사를 하는 그 레스토랑에서 그 친구의 진실을 나는 눈감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혼자 알고 있는 비밀로 지켜주었어야 했다. 그동안 아웃사이더로 그가 겪었을 심장 떨리는 아픔에 동감하면서, 그의 진실을 눈감에 주었어야 했다. 그때의 내게 ‘진실을 공감 한다’는 위악이 그토록 멋져보였던 것은, 위로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오스카 와일드도 혹시 누군가 진실을 가슴속으로만 나누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만천하에 다 밝혀지기 이전, 누군가로부터 진심어린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누군가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어깨를 두들겨주고 싶다.    


***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마지막 희극 <진지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은 놀랍도록 즐거운 곳. 그곳에 그냥 머무는 것은 지루할 뿐이다. 하지만, 그곳에 있지 못한 다는 것은 정말, 비극이다. 

 

이는 그 자신이 머물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그를 몰라주었고, 그가 머물기에는 그 자신이 너무나도 뛰어났다. 청교도적 도덕심으로 무장된 19세기 말, 그가 살아내기에는 너무나도 대담한 삶을 이끌어내었다. 19세기 도덕주의와 교조적 기독교의 눈으로 보기에 그는 처단되어야 할 이단자였다.

 

1998 12. 나는 트라팔가 광장에 100년 만에 제막된 오스카 와일드의 흉상 제막에 관한 기사를 검색해 본다. 제막식 축사는 ‘난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한 영문 문화부 장관이 맡았다. 그의 복권에 관한 기사는 이 제막식의 의미를 20세기가 세계 시민에게 내놓은 키워드 ‘다양성의 인정’과 ‘관용’으로 풀이했다. 노동당은 동성애에 내려진 도덕적 비난과 법적 구속 또한 인간의 고유한 성적 주체성의 확보라는 시각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 <행복한 왕자>에서 그려졌듯이, 살아생전에는 몰랐던 사회의 어두운 모습들이 죽어 도시의 높은 곳에 서있게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 왕자처럼, 그 또한 죽어서야 비로소 그의 작품이 인정받게 될 운명을 지녔을 지도 모른다. 낭만적인 제비를 만나고나서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그도 자신의 후세를 통해서, 또 그의 작품을 제비와 같은 메신저로 그 자신만의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는 1935년에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자라고 어쩌면 좋겠냐며 긴 한숨을 내쉬는 한 미국 여성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동성애는 분명히 유리한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부끄러워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악덕도 아니고 타락도 아니며, 질병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동성애를 성 발달의 정지 단계에서 야기된 성 기능의 다양성으로 여깁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깊은 존경심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여럿이 동성애자이며, 그 가운데는 위대한 인물들 - 플라콘, 미켈란젤로, 레오나드로 다 빈치- 등이 포함되어있기도 합니다. 동성애가 범죄라도 되는 양 박해하는 것은 커다란 불의입니다. 그리고 잔인한 짓입니다.

- 엘레자베트 루디네스코, 미셸 플롱 <정신분석학 사전>

 

이제 동성애자들은 죄인은 커녕 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도 있게 되었다. 21세기의 사는 우리는 19세기의 천재 예술가보다도 자유롭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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