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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0일 01시 23분 등록

* 본 칼럼은 변화경영연구소 1기 연구원 김미영 님의 글입니다.

 

말랑말랑하다 못해 무르고 약해빠진 내 마음에 굳은살이 생긴 건 그때다.

 

울 엄마, 아들 낳겠다고 딸 다섯을 내리 낳고 남동생을 뱃속에 품고 있던 그 뜨거운 가을, 나는 고입원서를 썼다. 동생이 다섯이나 되는 맏딸의 책임감이었을까. 내 욕망에 대한 포기를 익숙하게 여긴 탓이었을까. 대학이냐 취업이냐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순서는 바뀔 수도 있다고 여겼다. 소꿉친구들 다 가는 인문계를 대신해서 여상을 선택했고 일찌감치 어른흉내를 내며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3, 12월의 첫날, 졸업고사를 앞두고 첫 출근을 했다. 빠른 생일이라 열여덟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나는 겉으로만 어른흉내를 내는 나약한 겁쟁이였다. 몇 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선택받았다는 뿌듯함은 잠시였다. 등교시간보다 늦은 출근시간이었지만 버스를 갈아타고 어딘지 모를 먼 곳으로 가야한다는 두려움,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만남들, 사회초년생이라는 설렘을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까지. 유일한 위안은 입사동기들뿐이었다. 몇 주간의 빡빡한 교육을 함께 하고 각 부서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 어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든든함이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그해 12월의 첫날, 추운 날씨보다 더 바짝 긴장한 채로 깜깜한 시각에 집을 나와 친구들이 있는 학교 대신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나는 알지 못했다. 9시부터 6시까지의 신입사원 교육이 배고픔일 줄은. 겨울밤 6시의 어둡고 낯선 거리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이 눈물일 줄은. 공중전화 박스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눈물을 삼키며 통화할 줄은. 뜬금없이 선배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하염없이 울게 될 줄은. 그 새벽, 첫 출근길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또 알지 못했다. 퇴근길의 나는 또 다른 나였다는 것을.

 

열여덟의 내가 감당하기엔 고된 하루였으리라. 맏딸이고 고3이고 책임감이고 선택이고 나발이고 그날의 나는 배고팠고 힘들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이런 하루가, 뭔지 모르겠지만 힘들어 죽겠는 이런 하루가 앞으로 계속 되리란 불길함이, 아니 나는 또 견뎌낼 거라는 피하고픈 자신감까지도. 그래서 나는 두려웠다. 지금까지의 어른흉내가 아니라 진짜 어른이 되어버린, 그래서 포기하면 안 될 고통 같은 뭔가를 선택했고, 그 현실을 결국은 받아들이게 되리란 것, 결국은 살아 내리란 것,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이 이미 시작되었고 나 또한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걸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바로 그때였다. 혼자만 감당해야 할 내 몸이 기억하는 굳은살 같은 게 생겨난 것이다. 스스로 강해지는 어떤 경계 같은 것, 눈물만큼 자랐을 영혼의 성장 같은 것도 세트로 함께. 물론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두려워서 혼자 울었고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을 뿐이었다. 힘들어서 포기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할 줄 몰랐다. 결석은커녕 지각이나 조퇴도 할 줄 몰랐던 내게 그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는 건,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건, 졸리면 나오는 하품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얼마 전, 작은 녀석이 고입검정고시를 치렀다. 대안학교를 자퇴한 지난 1년 동안, 3인 또래친구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일상인 혼자만의 시간을 듬뿍 보낸 사춘기 내 딸, 혼자 놀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고민하고 그랬다. 시험 전날, 생각보다 긴장되지 않고 별 느낌도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다며 묻지도 않았는데 담담하게 얘기하는 딸을 보며 나는 왜 그 첫 출근 날의 그 눈물이 문득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나를 닮아 약해빠지고 여린 아니 어린 꼬맹이 녀석에게도 굳은살이 조금은 생겼을까. 그렇담 얼마나 울었을까. 지금쯤 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으려나. 그게 바로 살아가는 힘이란 걸 알게 되려나.

 

돌이켜보니 그때 그 눈물은 나에 대한 사랑이었다.

나라도 나를 안아줘야겠다는, 눈물의 온도만큼 따스한 연민에 찬 위로였다.

나름의 힘듦을 겪어낼 내 딸도 나를 닮은 사랑을 경험하게 될까.

아니, 어쩌면 벌써 알고 있으려나.

 

- 김미영 mimmy38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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