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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옹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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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0일 09시 57분 등록

이 글은 3기 연구원 신종윤님의 글입니다.

 

'아! 비가 오네.'

지난 금요일 새벽, 한참 과제를 하고 있는데 창 밖으로 뭔가 부스스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창을 빼꼼 열고 내다보니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낮엔 그렇게 덥더니만, '새벽이라 쌀쌀한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내리는 비 때문이었나 봅니다. 날이 밝으면 일찍 여행을 떠나야 하는 터라, 비가 그저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리는 비 사이로 이런저런 생각이 피어 올랐습니다.

이번 주도 어김 없이 주말을 다 바쳐서 과제를 해야 할 판이었는데, 무슨 배짱에서 였는지 여행계획을 잡고 말았습니다. 우선은 벌써 몇 달째 남편을 통째로 연구원 과제에 빼앗기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좋은 봄날에 아이와 셋이 근처 나들이라도 다녀오고 싶어하는 아내의 바램을 번번히 외면해야 했던 것이 많이 미안했습니다. 또 벌써 몇 차례 연기를 거듭해오던 친구들과의 여행계획도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가보자!'

일단 가자고 결정하고 보니 아내는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평소 같으면 내 몫이었을 숙박도 대신 알아보고, 가서 해먹을 이런저런 음식 준비도 하느라 과제 핑계를 대고 뒤로 빠져 있는 저보다 갑절은 더 바빠졌습니다. 대신 저는 주말에 해야 할 과제를 주중에 당겨서 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 여행을 가서도 마음이 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이라는 것이 사람 마음처럼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회사의 일은 평소보다 더 바빴고, 저녁마다 피할 수 없는 약속들이 생기는 통에 과제는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책은 거의 읽지도 못했습니다. 칼럼 주제는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막막한 상태에 금요일 새벽을 맞았는데, 부슬부슬 비가 내렸습니다. 마음이 급하니 생각처럼 책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뜬 눈으로 책과 밤새 씨름을 하고 나니 몸은 물먹은 솜마냥 무겁기 짝이 없습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시간을 계산해봐도 과제를 시간 내에 끝마치기는 어려울 성 싶습니다. 이제 와서 여행계획을 무르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보니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냥 십 만원 벌금을 물까?'하는 생각이 슬금슬금 피어 오르는데, 아내가 방법을 제시합니다.

"태안반도까지 가는데 세시간 넘게 걸리니까 차 안에서 해. 내가 운전하고 당신은 숙제하고, 그럼 되잖아?"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이고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차에 오릅니다. '가자, 아메리카로!' 책도 챙기고, 형광펜에 포스트잇도 듬뿍, 거기다가 노트북까지 챙겨서 차에 싣습니다. 차 안에서 어떻게든 숙제를 조금이라도 해야겠다고 굳은 마음을 먹고 일단 출발합니다. 날씨가 꾸물꾸물 했지만 차 안의 시간을 잘 활용하면 제 시간에 숙제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 희망이 생기는 것도 같습니다.

차가 출발하고,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꺼풀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밤을 꼬박 샜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차가 도로를 따라 살랑살랑 미끄러지는데 책을 들고 억지로 잠을 참으려니 눈은 빠질 듯이 아프고 머리는 어질어질합니다. 운전석의 아내 보기가 민망해서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하지만 잠시만 정신을 놓치면 연신 허공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몸과 마음이 함께 하지 못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차 속에서는 힐끗힐끗 시원한 주변 풍광을 곁눈질 하느라 책은 보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마음은 그나마 책 안에 있었으니 풍광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습니다. 몽산포의 아담하고 예쁜 펜션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저녁을 준비할 때도, 비바람 속에서 근사하게 잘 구워낸 바베큐 요리를 펼치고 친구들과, 아내와 소주잔을 기울이는 그 순간에도 '남북전쟁'과 '노예제도'에 대한 생각들이 가슴 한 곳을 '꾸욱' 누르고 있어서 그저 편히 먹고, 마시고, 즐기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온천지가 눈이 부셨습니다. 밤새 비도 바람도 걷히고 풀들이, 꽃들이 그리고 바람이 반짝반짝 온몸을 간질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슴 뛰는 순간에도 머리는 딴 생각이 들락거렸습니다. 펜션 주위의 숲길을 걷는 동안 자꾸만 시간을 흘끔거렸고, 바닷가를 거니는 가운데도 서울로 올라갈 상행선의 교통 정체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 자신이 한심하고 못마땅했습니다. 어차피 숙제를 제 시간에 제출하는 것은 물 건너 간 듯 보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조금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6월의 주제를 미리 느껴볼까 하는 생각으로 들른 현충사에서는 그나마 좀더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전시된 난중일기 원본을 보면서는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 목욕시키면서 곁다리로 샤워도 하고, 챙겨 갔던 짐도 정리하고, 쏟아지는 잠을 못 이겨 삼십 분쯤 눈을 붙였다가 깜짝 놀라 번쩍 정신을 차리고 책상에 앉으니 마루에서 9시 뉴스 소리가 들립니다. 정신을 추스르고 보니 상태가 안 좋습니다. 500페이지 가까운 책을 절반 남짓 읽은 것을 빼곤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리뷰도, 칼럼도, 인용문 정리도, 어느 것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한숨이 새어나옵니다.

과제는 과제대로 못했고, 여행은 여행대로 만끽하지 못했습니다. 오가는 차 안에서 읽은 책은 겨우 50페이지 남짓이 전부였습니다. 결국 돌아보니 책 50페이지 읽자고 1박 2일짜리 근사한 여행을 형편없이 망쳐버렸습니다. 얼마 전 구본형 선생님이 보내주신 '그날 참 좋은 하루였습니다'란 글을 읽으며, 하루를 가득히 즐기고, 그 안에서 팽팽하게 터질 듯이 살아 있는 선생님을 느끼며 감탄했었는데…... 조급증이 망쳐버린 짧은 여행에 대한 미련이, 이번엔 거꾸로 과제를 해야 할 내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지난 몇 달간, 일주일에 몇 번씩 밤을 꼬박 새면서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힘들다.'

하지만, 동시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이런 생각이 한번쯤 들 때가 됐잖아? 예상 못했던 것도 아니잖아? 이런 게 바로 고비야. 여기를 넘어서면 다시 달릴 수 있을 거야. 더구나 이번엔 혼자도 아니잖아.'

마음을 다잡고, 하는 데까지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더듬거립니다. 그러다가 고마운 글귀 하나를 찾았습니다.


    초기 개척민들이 서부로 간 것은 그들이 그것을 절실히 원했기 때문이지 그것이 용이한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p. 138)


가는 길이 쉬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쓰러져버리거나, 멈춰서 쉬고 싶은 유혹에 휩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조금 주춤거릴지언정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출발선에서 내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잊지 않겠습니다. 하기 쉬운 일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편함을 넘어서겠다고 결심했던 초심(初心)을 되새기겠습니다. 즐기겠다는 각오는 말로 뱉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혀 습관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실천으로 느끼겠습니다.

서부 개척의 놀라운 역사는 그것을 절실히 원했던 자유로운 영혼들에 의해 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겠습니다. 그 무엇도 그들의 영혼을 멈출 수 없었다는 역사를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잠시 주춤했던 가슴에 다시 기운이 차오릅니다. 내 인생의 서부를 '절실함'으로 개척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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