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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님께서 20081160530분에 등록한 글에 댓글을 답니다.
님께서 계획을 세우고 수정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생각과 갈등 속에서 첫 번째라고 쓴 이유가 분명하게 있지요? 웬만한 경험은 다 해 보았지만 미칠만큼 죽을 정도로 성실히 살아냈는가 하는 물음에는 명확히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끝이 없는 길'이기도 하니까요. 어쩌면 흔들리면서 갈등하고 애태우며 살아가는 것이 삶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무언가에 집중해서 몰두한다는 것이 예사로운 마음으로는 버티어낼 수 없는 전체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을 원하기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깡그리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을 때에야 비로서 사람들은 깨닫고 새로운 각오로 임하며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이 안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모든 사항에는 항시 어려움이 따릅니다. 이곳 변.경.연의 사부님께서 책에 그렇게 절실하게 적어놓으셨고 또 님께서 그 내용에 공감한 이유는 무엇보다 필요를 느끼고 또 자신만의 꿈을 계획해서 달성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정에는 언제나 지난한 고통이 따릅니다. 무언가를 단단하고 확고히 달성해 낸 사람들의 모습에는 절로 얻어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불확실성에 대한 끊임없는 불성실한 예측과 자신을 괴롭히는 자신감 상실이며, 과정을 성취로 이끄는 동안의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이 아닐 런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그것은 고투이고 참을 수 없는 불안감으로 인한 반발과 변명을 늘어놓게 하고야 마는 마음의 분심들이지요. '진짜로 어려운가?', '정말 이것이 최악인가?' 라고 누가 봐도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이래도 되는걸까?', '잘 해낼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을 끌어들이는 공연한 마음 따위가 아닐까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 자신의 감정에 자주 속아왔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정말로 잘해 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며 공연히 옆길로 새어나가 염려하는 마음 같은 것 말입니다. 저에게는 작심한 상황을 이겨내지 못할 이유보다 잘 할 수 있는 자체를 의심하고 꺾으려는 나약함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항상 후회가 되지만 그때마다 이유라는 놈은 분명히 있어왔을 테고 더군다나 지나고 보면 그것이 무에 그리 큰 문제였을까 하고 새삼스럽기 짝이 없는 한편, 변화 역시도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 되기 쉽상이라는 것만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고는 합니다.

그 모든 선택은 님의 것입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누구도 님의 결정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이라는 주체적인 삶의 주인이요 위대하고 각별한 아무개라고 하는 神입니다. 공부하고 계획하여 실천하는 동안 수많은 갈등과 또한 기쁨에 찬 자유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것은 잠시인 것 같고 공연히 두려운 마음을 동반한 채 타인과 비교하고 세상의 사태에 목졸려하며 몸부림쳐 살아가는 것이 대다수 우리 일반인들의 삶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아수라의 번뇌 속에서 진흙탕 속의 연꽃처럼 홀연히 피어날 수 있는 힘은 아마도 끝이 없는 그 길을 묵묵히 지속해 갈 수 있는 뚝심과 일상의 항상성일 것입니다. 사부님의 말씀은 아마 이 한가지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좋은 습관을 몸에 익숙하게 붙여라.' 그러면 두려움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치환시켜 일상을 재편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보고 듣고 느낀대로 그대 자신들이 움직이고 진화해 가는 과정을 누구보다 그대 자신이 먼저 목격할 수 있기 때문에 확신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의 결과가 모든 사람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한 날 한 시에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조화속(질서가)이 아닐까요? 그러니 다만 할 뿐이지요. 그러는 사이 시나브로 삶은 어느덧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방향성을 가지고 가고 있지 않을까요?

저 역시도 님과 같은 갈등과 계획과 꿈 속에서 일을 접어 보기도 하고 또 원래의 일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일을 하면서 알게 됩니다. 노력한 것 만큼의 차이를 두고 느낌과 생각이 다르게 변화 된다는 것, 딱 그만큼의 깨달음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하여 더 열심히 진중하게 살아가야 함을, 그리고 절실히 깨닫고 실천이 몸에 꽉꽉 쳐박히고 배이도록 눈물나고 시리게 한바탕 이겨내지 않고는 내가 바라고 원하는 나는 없다는 것을 뉘우치게 됩니다. 님과 같이 걱정 속에서 잠이 깬 새벽녁입니다. 이루어 낸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이런 고민 속에서 잠을 깨고 지속시켜 나가야 함을 자각하는 것은 예전과는 다른 것입니다. 고작 이 작은 다름과 차이를 이루기 위해 그 많은 시간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가 속상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것이 시방의 나인 것을 요. 부인 할 것은 내가 얻으려고 한 것이 이것이 아니라고 하는 푸념이 아니라, 더 나아가지 못하고 안타까움 속에 발을 동동 구르는 어리석음과 한탄이 아닐까 하고 반성해 봅니다. 아무도 우리의 꿈의 시작을 막지 못했듯이 우리의 성취 또한 무엇에도 걸림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있다면 우리 자신의 미망과 분별없음 때문이겠지요.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자기 계발을 향한 변화와 혁신 앞에서는 함부로 발을 뻗고 나자빠져서는 안 되지요. 성과의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라기보다 진정하게 그렇게 됨이 일상을 이끌어 나가게 될 때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보듬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두 쪽이 나더라도 우리 자신의 내면 깊은 마음을 조각내어서는 이룰 것이 시원치 않을 테니까요. 정작 깨닫지 못함이 문제가 아니라 실천을 지속시켜 나가지 못함을 더 구체적으로 간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디를 굵고 단단하게 만들면서 곧장 뻗어나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함에 있어 가장 바탕의 힘은 무엇일까요? 누구나가 겪을 수 있고 당연한 과정의 한 형태인 이 고비를 지속시켜 나가는 힘은 정작 무엇일까요? 그 성장통의 현명한 이겨냄에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요?

달라진 소중한 것을 찾아 그 실마리로 인해 굳건한 기둥을 세워 나아가게 됨을 상기해 봅시다. 노력한 만큼의 성장은 있게 마련입니다. 삶에 있어 우리의 번뇌는 당연지사입니다. 이것은 고민을 통한 올바른 성장의 지속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과도 같은 열망과 촉구를 원합니다. 요행은 힘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는 하나에 집중합니다. 비빌 언덕이 있을 때에는 둘 다를 잘 할 수 있을 지 즉 균형감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지를 철저히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둘 다를 잘 해나가려면 계획과 의지보다 현실적으로 주변 상황과 여건이 허락 되어야 합니다. 직위나 관계 그밖의 모든 면에서. 그렇지 못하면 정작 중요한 것을 뒤로 차일피일 미루거나 종국에 가서는 작은 일에 얽매어 큰 것을 버리게 됩니다. 공든 탑을 와장창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차선이 이제까지 노력한 중요성을 뛰어넘어 버리고 최선이 후선으로 밀려나게 되는 우를 우리는 자주 범합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가서야 그것을 했어야 된다고 말하곤 하지요. 장미는 아름다운 자태 못지 않은 가시를 품고 있습니다. 어쩌면 가시는 그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기 보호였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 우선하여 포커스를 맞추다 보면 이제까지 노력한 미래와 계획은 그 만큼 멈추어 서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역지사지로 이 어려운 때에 죽을 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을 사람을 진정한 사람으로 받아줄 리 있겠습니까? 님이라면 이유도 없이 그렇게 마음 좋게 살아가시렵니까? 그것도 상황이 좋을 때 말이지 내 코가 석자인 데 누굴 염려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열심히 하지 않는 데 누군들 믿어주고 더군다나 장래를 보장해 주겠습니까? 때때로 여러 갈래의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는 것이 더 우왕좌왕 갈팡질팡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깝게 편한 것을 두고 돌아가는 듯한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천 번을 작심하고 만 번을 계획하면서도 정작 이루기가 어려운 것은 금세 편한 길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에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초점과 전략에 미약하고 뚝심과 의연함에 취약성을 보인다면 독하게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만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나만 골몰하여 밀어부칩니다. 그렇게 기간을 정해놓고 성과를 조율한 뒤 냉철하게 판단해서 결단을 내립니다. 최선에 대해 더 이상의 미련이 없을 때는 뒤를 남길 여지가 없겠지요. 그때에는 차선으로 생각해 두었던 것에 대해 새롭게 다시 시도합니다. 이것이 서른이 아니고 마흔이나 쉰 쯤에 당면하게 된다면 더 문제이겠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너라면, 내가 만약 지금 서른이라면 언어에 확고히 도전하고 아무 딸린 식구나 걱정이 없는 혼자일 때 더 많은 일을 하겠어라고 말하곤 합니다. 십대에게 지금 수능을 본다면 나는 더 열심히 할거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직 님의 나이가 적고 부수적인 책임 사항이 적을 때 계획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더 시간이 가고 책임감이 늘어갔을 때에는 더욱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절실한 때에 그리고 이루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가 가장 좋고 현명한 때요 목표를 이루는 적절한 시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때때로 시간이 지나면서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지가 바로 저긴 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라는 신념과 투지와 같이 그 시기를 놓치고 나면 새삼스러워지고 다시 훨씬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계획하고 신념을 가지셨을 때 조금만 더 힘을 내고 달릴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결코 멈추어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묵묵히 나아가시다 보면 어느덧 그곳에 닿아 있을 것이고 새롭고 더 나은 계획과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움직여야 하고 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근육처럼 일상도 동여매어 놓으면 바로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만 두서 없는 글 멈추며 어쨌든 이왕 달리기로 한 것 끝까지 내달리기를 바라겠습니다. 이는 또한 님과 같은 처지에서 저 자신에게 하는 주문이요 각성이니 언짢으시더라도 괴의치 말아주시길 당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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