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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님께서 20084221052분에 등록한 글에 댓글을 답니다.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Q 나이 서른이나 됐는데, 뭘 하고 싶은지 뭘 잘하는지 모르겠어요

엄마에게 착한 딸, 동생들에게 멋진 언니가 되도록 웬만한 학벌과 직업 가지고 때 되면 결혼하고 아이 생기면 들어앉아 남편이 벌어오는 돈에 기대 살림하고 살아야 하나. 아니면 적성과 꿈을 찾아 나이나 주변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돈이나 내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아야 하나. 대학과 대학원 졸업하고 연구원으로 벤처기업에서 일한 지 1년8개월. 고등학교 때는 공대가 나랑 잘 맞는 줄 알았고, 또 한창 잘나가는 분야이기도 해 성공하고 돈 벌고 싶어 이쪽으로 왔다. 그렇게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 깨닫고도 이왕 시작한 거 본전은 뽑잔 심산으로 취업해 2년 버티고 그 담에 생각하자 했는데 슬슬 그 시기가 다가오니 일도 싫고 회사에 매일 나오는 것도 답답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박혀 있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때려치우자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뭘 잘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성격상 무작정 때려치우면 방콕폐인이 될 게 뻔하고.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A

0. 그거 아나. 당신 같은 사람 우리나라에 참, 많다. 나이 서른에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도 뭘 잘하는지도 모르겠단 사람들, 부지기수다. 사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단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젠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모른다는 거다. 당신 진로를 대신 택해 줄 재준 없다. 하지만 후자의 문제라면, 지금부터 뭘 고민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겠다. 오늘은 그 이야길 해보자.

1. 지난 아테네 올림픽 때다. 우리 리포터가 풍물취재로 한 어부를 인터뷰했다. 잡은 생선 중 크고 좋은 놈들 따로 놓는 걸 보고 리포터는 당연하다는 듯 이쪽 상등품은 팔 거냐고 묻자, 어부는 무슨 소리냔 표정으로 먹을 거란다. 왜 값을 더 쳐줄 물건을 팔지 않냐 하자 나머지 판 돈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단다. 좋은 놈들은 와이프랑 먹을 거란다. 행복관이 판이한 게다. 이런 어부, 우리나라엔 없다. 왜. 우린 그렇게 배우질 않는다. 스웨덴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인간은 소유욕과 존재욕구를 가지는데 소유욕은 경제적 욕망을, 존재 욕구는 인간과 인간이,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뜻한다고. 그런데 그 존재 욕구를 희생해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건 병적 사회라고. 공교육이 처음 가르치는 게 그런 거다. 사회 시스템 역시 그 가치관에 기초해 구축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건 그렇게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 기본 태도에 관한 입장이어야 한다. 우린 그런 거 안 배운다. 대신 성공은 곧 돈이라는 거. 돈 없으면 무시당한다는 거. 그 경쟁에서의 낙오는 인생 실패를 의미한단 거. 그렇게 경제논리로 일관된 협박과 회유로 훈육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초식동물처럼 산다. 초식동물의 군집은 가장 뒤처지는 놈이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 나머지의 안전이 잠정 담보되는 시스템이다. 거기 공적 신뢰 따윈 없다. 결국 끝줄에 서지 않으려 끊임없이 서로를 경계하며 두리번거리는 왜소하고 불안한 낱개들만 남을 뿐.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시도할 겨를도 없고 엄두도 안 날밖에. 우리네 평균적 삶이 그렇다. 여기까진 위로다. 갈피를 못 잡는 건 당신만이 아니란 거다.

2. 그러니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건지는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인간인지부터 아는 거다.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뭘 견딜 수 있고 뭘 견딜 수 없는지. 세상의 규범에 어디까지 장단 맞춰줄 의사가 있고 어디서부턴 콧방귀도 안 뀔 건지. 그렇게 자신의 등고선과 임계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윤곽과 경계가 파악된 자신 중, 추하고 못나고 인정하기 싫은 부분까지, 나의 일부로,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전혀 멋지지 않은 나도 방어기제의 필터링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는 지점, 그런 지점을 지나게 되면 이제 한 마리 동물로서 자신이 생겨먹은 대로의 경향성, 그런 경향성의 지도가 만들어진다.

거기서부턴 더이상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다. 더이상 자기합리화나 삶에 대한 하찮은 변명 따위에 에너지 소모하는 일, 없어진단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에너지는 생겨먹은 대로의 나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더이상 눈치 보거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 다음부턴 쉽다. 꿈이니 야망이니 거창한 단어에 주눅 들거나 현혹되거나 지배당하지 말고, 그저 자신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 가보고 싶은 곳들, 만나보고 싶은 자들 따위 리스트를 만들라. 그리고 그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라. 사람이 왜 사느냐. 그 리스트를 지워가며 삶의 코너 코너에서 닥쳐오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만끽하려 산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건투를 빈다.
- 딴지일보 김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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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 업무를 하신다니 반갑습니다. 저도 같은 업무를 하면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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