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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님께서 20102281807분에 등록한 글에 댓글을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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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성질이 급해 화면만 바뀌어도 감정이 살아나지 않거나, 한글 등에 먼저 쓰고 붙여넣기 등의 방식을 취하려 하면 점검하고 글을 올리는 느낌이 들어 그만두게 되거나, 옮겨 쓰는 사이 제 코가 석자인데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이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움에 지워버리게 되기도 해서 직접 대고 쓰다보면 장황하고 말이 꼬이는 등의 부족함을 보입니다. 저의 기질과 성격 그리고 부족한 면입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전하고자 하는 뜻을 잘 이해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

답 글을 읽다가 오늘은 변경연의 구사부님을 통해 깨우치게 되는 방법을 하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추진하는 계획과 목표의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일의 과정들 중간에 작은 성과들이 모아져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루하지 않고 덜 힘이 들며, 탄력을 받아 지속력을 발휘해 나갈 수 있고 의지가 꺾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노력하시는 중간에 의도적으로라도 스스로에게나 상대로 하여금 포상을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고 제안해 봅니다. 휴전 상태를 취하고서 완전무결하게 일의 마무리를 지으려고 서두르거나 완벽주의를 지향하기보다 단계적으로 부분적인 성의나 노력을 표현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가령 싸우되 냉전기간 동안 집을 나가지는 않기로 했다면 일찍 귀가하여 조용히 책 읽을 시간을 갖거나 동네 독서실이나 까페를 이용하여 자신을 반추해 보고 당분간 다툼을 줄이는 노력 등을 서로 격려하고 보상해 주는 방식입니다. 언어로도 할 수 있고 분위기 연출이나 선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훨씬 기분이 나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어떨까요? 휴전 기간 동안 그로인한 기분 상함을 술이나 담배 등을 통해 풀려하기보다 참아주는 아내나 자신의 기분 전환을 위해 매일 꽃 한 송이를 화병에 꽃아 주는 것입니다. 점차 집안이 온통 아름다운 꽃향기로 가득해 지겠네요. 상징성도 의미도 나쁘지 않겠죠?


끝없는 헌신에 저라는 존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요? 헌신하면서도 나를 버리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요?

나를 버리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위안이라도 어디에 있을까요?

그래요. 우리가 역지사지 하며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문제점의 균형을 찾아가는 것도 입장을 바꾸어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가능한 일이요, 일/문제에 있어 상황의 결정/판단은 단편적 현상의 직시라기보다 축적되온 경험을 통해 잠재된 의식의 지배를 받아 판단/인지하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구라도 좋은 환경과 습관을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끌어 나가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망령될 수가 있는 것이고요.

단편적으로 당신(우리)이라는 존재는 아들, 남편, 아버지, 사회인 등이라는 것으로 이미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너무 확실하고 충분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생활에서 느끼지 못하거나 가치 기반이 흔들리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편하게 주변에서 현존하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기고, 다만 취하지 못한 선망의 대상들만을 성급하게 추구하게 될 경우 종종 헛갈림에 헤매게 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간과하여 놓치지 말고 차근히 모색할 시간을 갖는 것과, 지금처럼 이러한 결혼생활의 시기적으로나 상황적 요소들이 사회생활의 확대적인 면과 맞물려 돌아가는 현상에 대한 이해들도 함께 심도 있게 고찰해 보면서 보다 긍정의 대안과 모색을 살펴보는 일은 한 개인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 간의 융합을 위해 개개의 요소들에 대한 한 부분적 이해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필 왜 내가 대중에게 사례로나마 가십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부분을 조금 감수하고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누구나 한번쯤 겪게 되는 심각한 일이기도 하고, 요즘처럼 이혼이 난무하고 책임을 외면하려드는 싱글 족들이 늘어나는 추세에서, 더 나은 선택을 위한 개선이나 가치관 정립의 일환으로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결혼 등과 더불어 본격적인 사회생활(양가의 가족, 소득의 분배 및 지속적인 공급, 생활전반 및 사회적 책임 등)을 시작하며 동시에 시시각각 경쟁에 접하여 살게 되다보니 경쟁 우위나 지배를 가치로 두거나 의도하며 산 것은 아니지만, 어느덧 동화되어 사회가 조장하고 있는 경쟁적 구도의 시달림 속에서 가치의 기반을 찾게 되는 바람에 벌어지는 현상들과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무책임하게 자신의 합리화를 위해 문제를 확대해석하거나 책임회피 등으로 전가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말입니다.

비록 우직하거나 의연하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갈급하게 처한 개인적인 문제들을 공론화하고 지혜를 촉구하기 위한 시도조차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여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정 답답함에 대한 문제 해결의 모색 및 바른 기준과 혜안을 확고히 얻고자 의도함조차도 일상의 한 치부를 들어내는 것으로 오해되어 거론하기가 힘들고 지레 주눅이 들게 한다는 점은 시정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네 가정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본말의 의도를 왜곡하는 매우 안타까운 현상으로 지양되어야 할 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는 님의 남다른 솔직함이 매우 가치 있는 일이요, 작금의 현대인의 실생활에서 정말로 필요 불가결한 부분의 자연스러운 노출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당사자에게는 생의 근본 이념과 정체성 확립과 맞물려, 한사람 나아가 한 가정사에 있어 중요한 기틀을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가족 구성원 각자(부부뿐만이 아니라, 자녀, 양가 가족 및 친구 등)로 하여금 개인의 사회성과 실체에 중요한 모태가 아닐 수 없기도 할 뿐더러, 한 가정의 매우 절실한 부분으로 이해되어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지원과 함께 사회문화적 현상의 양상으로 취급되어 개선과 대책이 시급한 부분으로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회 양산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실제 과거에 비해 여성으로 하여금 점차 우월성이나 기득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는 그들의 가치기반을 흔드는 매우 갈급한 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 남성들 가운데에서조차 "인생 뭐 있어?"하며 지레 자신의 역량을 한정 또는 축소하고는 더 나은 바람직하고 긍정의 진취적인 기상을 꾀하기보다 그저 당장의 현실에 쉽게 안주하며, 편하게 실속이나 차리고 말자 정도를 고수하다 고꾸라지는 현상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요령껏 잘 살면 그만"이라고 하는 얕은 가치를 선망하다 보니 임시방편적이고 그릇된 처방을 일삼기도 하며 그야말로 가면적인 성공을 거두기에 급급하기도 합니다. 표면상으로 나타나는 외형적인 것들에만 온 신경을 쏟고는 실제의 상황에서는 건강한 항상성을 잃어 고독을 느끼며 죽고 싶을 정도의 심각한 우울감에 빠지거나 양심적 번뇌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도를 넘어 뻔뻔한 경우는 아예 말 할 것도 없지만 말이지요. 그러니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세심하게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게의 불륜이나 사회적 악이 그러하듯 자신들은 자신들이 하는 허무맹랑한 짓거리를 타인이 전혀 모른다고 전제하거나, 감쪽같이 속아주기만을 기대하고 초지일관 영악하게 잔머리를 굴리며 잡아떼기 일수 이거나,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 양 추악한 폐단을 서슴없이 자행하고도 마치 하늘의 뜻 이기나 한 것처럼 권세를 남용하거나, 기득권을 남발해 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절대 잘못을 시인하지 않음은 철칙으로 물론이고 더욱 앙큼 떨며 완벽한 눈속임으로 가증스런 임기응변의 연기를 서슴없이 해대기도 합니다. 대게의 경우 이러한 현상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말거나 분노하기만 하고 개선시킬 힘이 미약함은 아무소용이 없기도 하여 울분하다 지쳐 쓰러지고 말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달리 힘이나 여유가 없으니 말이지요. 

이러한 현상들과 마주하게 되거나 유사의 문제에 부딪힐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힘을 길러 갖는 것 혹은 사전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외에 아무 방안이 없기도 합니다. 가진 역량을 지속적으로 키워나가는 것이 급선무요 가장 안전한 방법일 수밖에는 없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내 지식과 실력은 누가 쉽사리 빼어갈 수 있는 것이 못되니 가장 든든한 자원이 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선 내가 속한 가장 가까운 주변인 가족부터 잘 보살펴 충실하게 지켜야 하고, 나아가 더욱 박차를 가하며 좋은 발전과 진화를 추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가정부터 바로 세우고 가장 밀접하게는 직장, 인간관계 등 사회생활에 따른 여러 현상에 대한 자신만의 주체성과 대처를 단도리 하는 한편, 궁극의 가치관 정립을 매순간 시나브로 확고히 다져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님의 이러한 시도와 고찰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요 어쩌면 위대한 개인으로 가기 위한 사전 단계의 혁명으로 까지 생각됩니다.


희생과 헌신, 일상의 항상성과 무엇이 다를까요?

가장의 희생과 헌신이란 다름 아닌 육체적 노동과 함께 가족에게 밥벌이를 해주고 평생 가족의 끈에 시달려야 하는 현실적 상황들을 보다 긍정화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가족 구성원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보람과 성취의 기반이 되고 상생의 확실한 지원이 가능하도록 슬기로운 가정 경영을 하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가장과 가족 구성원에게 필요한 요소와 부분들을 체크하고, 균형감을 가지고 의미있게 펼치며, 깨달아 리더해 나가는 한편, 지속적으로 더 나은 향상을 공부해 나가야 하는 점이 바로 희생과 헌신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또한 삼라만상의 일상적 토대와 기반 역시 바로 나로부터 모든 현상이 연결되고 의미부여 되는 것이기에 먼저 나를 돌아보는 것은 당연함 입니다. 모든 것의 동기가 당장은 타인을 위한 희생과 헌신만이 가중되는 시기에 처해 있을 지라도 그 결과와 산물은 결국에 이름의 주인을 찾아 들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설령 아무런 증인이나 증거할 성과도 없이 시행착오적인 과정만을 실행 중에 변변한 유서 한 장 못 남기고 허무하게 죽게 되고 말지라도 말이지요. 그러기에 존재가치를 가장 안정되게 인정해 줄 수 있는 가정이라는 기반을 확고히 하여야 하고, 지금과 같은 모색을 통해 바로 우리들이 깨달아 지키고 다듬어야 할 몫의 기본적인 과제를 찾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과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가장 먼저 나라고 하는 우주의 근본 점인 자신을 만족시켜 나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내 존재의 가치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구심점의 맥락이 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남을 위한 헌신과 희생도 바로 나라는 원점을 향한 (가족과 직장, 사회생활 등 관계 맺는 모든 것들과의 경영적 역량을 통해 되돌아오게 되는) 부메랑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의 선택은 각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구도자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솔로로서 학문에만 전념할 수도 있고, 보통의 가정을 꾸리는 경우 등 각자 지향해 가는 길은 다르지만 결국 한 점 흙으로 돌아갈 우리 자신을 향한 걸음걸이일 수밖에는 없는 셈이지요. 우리는 어떤 일에 엮여 살게 되던 종교적으로 희생과 헌신을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농도의 삶을 살아가게 마련인데, 어떤 모양으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영위해 갈 것인가는 바로 각자의 역량과 몫이 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왕에 주어진 삶이라는 일상을 어떻게 영위해 나갈 것인가를 모색하며, 바르게 알고자 탐구하는 자세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와 가치가 분명한 일이요, 이러한 모색들은 어느 시점의 누구이든 간에 칭찬받아 마땅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항시 깨어있는 삶을 꾸준히 지속하여 노력하지 않고서는 고요한 지혜의 샘물을 퍼 올리듯 맑은 정신을 유지하면서 진정한 일상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고, 시기적인 상황이나 발생한 문제는 저마다 다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은 커다란 덕목일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한 삶에 따라 일상의 항상성을 유지시켜 나가기 위해 헌신과 희생을 할라치면, 기왕이면 현명하고 즐겁게 운영해 갈 수 있기를 갈망하는 것이 당연지사요 매우 옳은 처사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과 고민에 빠지게 마련인 것들을 부꾸럽게 여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고민은 적고 실행이 많아야 건강한 삶이 영위될 것입니다. 저도 항상 이 점이 부족해서 큰일입니다.^^


종교도 그 스스로의 한계를 뒤집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헌신만을 강조하며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며 올바른 가치라고만 강제에 가까운 강요부터 우선 일삼을 것이 아니라, 왜? 무엇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변화되는 지를 뚜렷이 떳떳하게 밝히고, 일상의 참여자가 진솔하게 느끼며 즐겁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가운데, 언제라도 의문의 물음에 적극적으로 대답할 수 있도록 하여(실체를 들어 내지는 못할지라도 뜻대로 쉽게 동화되지 않으면 무조건 강제하려 들거나 사악하다는 전제를 하며 몰아붙이기 전에 말예요), 그 정체를 뒤집어 까면서 모순된 맨살의 알몸을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투명하고 개방적으로 신뢰성 있게 있는 그대로를 통해 전도나 포교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백 마디 말이나 측근의 일방적 지지 세력 따위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24시간 CCTV를 돌리듯 당당한 흐름의 운영을 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진실 따위가 필요치도 않을 것입니다. 종교를 통한 선과 악의 결과가 있고 없고를 떠나 좋은 의도를 가지고 좋은 일에 참여하고 좋은 생각을 노력하며 살다가 가는 것이 종교적 선을 이루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보이고 싶고 내세울 것만을 무조건 강조하다가 은폐 조작하려 드는 따위가 아니라 언제든지 홀라당 까뒤집어서 그 실체가 드러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더 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올림픽경기를 통해 열광하는 것은 제한된 그 시간에 그동안의 희노애락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죄다 몽땅 까 보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점을 위한 결점을 찾지 않는 한 완벽한 경기를 통한 승리를 거둘 때, 우리는 가슴 뭉클한 전율과 함께 진정한 감동을 하게 되지 않던가요? 누가 보라해서 보는 것이 아니고 느끼라고 해서 느끼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과 실제에 주목한 깨달음을 얻게 되지 않던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은 신도 섬길 수 있어야 하거나 바로 나라고 하는 절대의 신부터 바르게 섬기는 공부와 순서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종교에 의한 깨달음을 얻고자 할 때 종교가 가진 가상의 힘에 기대여 의문을 잔뜩 품은 채 짧은 시간에 당면한 해답을 쫓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기만을 기대하기보다, 개인적인 당면 문제의 갈급이 무엇이고 무엇을 희망하며 어떻게 영위해 나가고 싶은 가를 함께 모색하는 가운데 필요와 가르침 사이의 균형감을 가질 수 있을 때, 진리에 대한 말씀이나 경전의 가르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실생활과의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믿는다고 표방하면 당장 천당에 가고 장소에 찾아 나서기만 하면 해탈이 절로 이루어지듯 금세 뚝딱 모든 것이 해결되는 만능이라고 전제하거나, 한편에서는 사탄이다 회계 혹은 참회를 강압하여 분리와 소외를 조장하기보다 휴식(창조; 구원도 마음 놓고 편하고 자유롭게 상상을 꿈꿀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에)과 안정을 통한 즐거움과 자유로운 참여 가운데 호기심이 일고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도록 능동적이며 진취적인 리더십/이끔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했는데, 가자마자 발심이 금전이나 희생 봉사로부터 나오는 양 은근 돈부터 걷거나 바라고 일을 싸놓고서 기다리며 봉사나 강요하면서 희생이 아람답다고 강조하여 가르치며, 머리 깎은 사람이나 머리 위에 수건을 뒤집어 쓴 사람이나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조리 침 튀기며 말로만 먼저 앞세우며 실상은 자신들의 필요를 해결하는 방안을 취하고 행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여의치 않은 가운데 그렇게라도 사회를 위해 공헌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어찌보면 편중되고 이기적인 모습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생전 처음가도 금품만 희사하거나 한바탕 육체를 혹사시켜 노동을 제공하면 성실한 신도로 각광받는 시대에 살고 있음이 목전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때로는 그 접근초차 불안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합니다. 언제부턴가 사회/종교 등은 돈 아니면 노동을 강요하며 우선적으로 물직적 기부에 치중하여 강조하면서 지나치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편하지 않은 점이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필자 역시 개인적인 안목의 이기심을 전제로 하는 말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우리 시대의 종교/복지 사업 등도 순종과 희생봉사만을 부각시키며 실제로는 노상 후원회 유치 등에 급급한 재원 조성만을 꾀할 것이 아니라, 즐거운 참여와 기꺼운 발심 등을 선사하며 상호간에 도움이 되는 진정한 운영 방식을 도입해 나가는 것과, 본래적 수행의 길에 집중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교횔 가거나 절엘 가도 수도승이나 헌신하는 수행자보다는 생활인으로서의 방편이거나 경영만을 염두에 둔 경영을 일삼는 높은 분들을 만나기가 예전에 비해 한결 쉽기만 해 생각해 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먼저 본래의 취지에 충실한 연후에 이어지는 감동으로 참여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의 무엇을 얻고자 하든 마음 가짐과 선택이 중요하다는 나름의 의미를 강조하면서요.^^ 모든 사물과의 인연은 시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도 주어지고, 뿐만 아니라 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경우가 될 수도 있기에 말입니다. 또한 개별적 관심이나 인연으로 사물과의 단 한 번의 시도나 접촉이라 할지라도 마주함 자체가 간단하고 단순한 현상 이상으로 이미 전체요 그것이 곧 영원성을 내포할 수도 있어서요. 오늘 님과의 글 나눔이 마지막이라 가정하면, 지금의 순간이 바로 우리 대화의 전부요, 일생의 지금 이 부분이 바로 영원함이 되고 말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한번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한번이라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순간적 현상이나 사실 자체가 생활적 의미 그 이상으로 전체적 개념이거나 영원성을 지니기도 한다는 뜻을 표현하고자 하는데 어째 전하고자 하는 의미의 전달이 쉽지 않네요. ???



아..... 그릇이 작아 그 사람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새삼스레 이 부분이 오늘 저에게 무척 새롭게 다가오네요. 첫날에도 이렇게 쓰여 있었던가 하면서 말이죠. 왜냐하면 님의 이 부분에 감동 먹었거든요.

저는 댓글 가운데 위의 신종윤님에게 "그대만한 사람은 흔치 않아" 라는 말을 종종 하는데 그러면 이 사람은 펄쩍뜁니다. "누나,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마. 우리 아내가 들으면 큰 일 나고, 대게의 다른 남자들은 나보다 훨씬 더 잘해, 그러니까 제발 하지 마요." 라고 애걸하듯 말합니다. 저는 사실 그가 집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단지 그를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항시 마음이 가족에게 모두 가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에 그 점이 가상할 뿐입니다. 근본이 그렇지 않으면서 어떤 일시적 행위만을 내세우며 자신이 성실한 가장임을 나타내려드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에 당연 돋보이는 부분이어서 이기도 합니다. 물론 때에 따라 내동 잘하는 사람도 순간만 방치해도 무슨 일을 저지를지 도통 모를 일이긴 하지만 말예요.^^ ㅋ

가족은 의당 믿음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저 단순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기도 합니다. 아무리 오래된 부부라 하더라도 아가페적인 사랑이기보다 에로스적인 사랑을 나누는 남녀관계의 부부인데 서로를 노력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함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하며 놓치기에 문제를 만들며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요즘은 부모나 자식 할 것 없이 쌍방의 패륜도 적지 않은 시대와 사회현상 가운데 살고 있기도 하니까 과거의 조상들보다 세심하게 더욱 성실히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하물며 아직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정도의 부부라면 좀 더 노력을 하는 것이 나쁠 것 없겠죠? 님께서는 어렸을 적에는 다소 밝지 못한 환경이었을 지라도 지금은 최소한 절대 꿀릴 것 없고 남부럽지 않을 만한 보통의 가정입니다. 어쩌면 보이지 않게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항시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자체가 일종의 스트레스 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당사자도 힘들지만 상대역시 항상 이해할 수만은 없는 것이 사람이고 현실이니 이 점도 생각하면서 불필요한 부분들은 과감히 거두어 끊어버리고 좋은 생각으로 임하고 실천해 가십시오. 위의 종윤처럼 가정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는 사람의 아내는 적어도 이러한 부분에서는 확신이 가고 그래서 좀 더 편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바로 이런 환경적으로나 역량의 다름과 차이점이 있어 저마다의 고민과 의미로 남다른 삶을 영위해 나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구체적인 예를 종윤으로 비교해서 든 것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함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그가 완전무결한 사내라는 뜻도 아니고요.^^ 다만 보여 지는 일상을 통해 신뢰할 만한 아우라 생각해서 입니다.

대게의 변경연의 남자들은 착한 심성의 소유자들이요, 정직하여 고지식하기도 하고 주변머리는 별로 없으며, 자수성가형이기도 합니다. 오직 성실함 하나가 인생 최대의 무기이기도 합니다. 덜 남자답고 멋은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선함과 신실함이 좋아 그래서 저는 변경연의 남자들을 좋아/신뢰합니다. 변경연의 여자들은 남자보다는 욕심도 많고 의지가 강한 것 같습니다. 항시 남보다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선도해서 이끌어가는 타입이기도 합니다. 깐깐한 자존심이 최대의 덕목이기도 하지요. 물론 개별성에 차이가 있고 이는 저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바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만.^^


도서 하나 추천하고자 합니다!

혹 읽으셨을지 모르겠네요. 혼자 읽을 때는 너무 이해가 가다 못해 당연하기까지 해서 뭘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당시로서는 무심히 여기던 책인데, 막상 두 사람이 한집에 살게 되어서는 독서의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책이 있는데,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책입니다. 저 역시 상대에 대한 기대치만 높았지 정작 믿거라 하는 상대에게는 표현과 방식에 서툴러 독서의 효과를 보지 못하긴 했습니다만 훌륭한 고전이기도 하니 읽고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기술이란 서로를 향한 진실하고 구체적인 노력 외에 무엇이 또 있는지 궁금해 지기도 합니다.

오늘도 두서없이 짧지 않은 글을 남기게 됐네요... . 그럼 행운을 빌면서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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