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구본형

구본형

개인과

/

/

  • 구본형
  • 조회 수 7059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12년 2월 14일 09시 03분 등록

대부분의 그리스 신들은 추상적인 개념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의인화한 여신이다. 아테네는 지혜를, 니케는 승리를, 헤라는 가정과 결혼을 각각 의인화한 것이다. 나는 변화 경영사상가이기 때문에 변화의 신이 누구인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변화의 신으로 특별히 불리는 신은 없다. 오히려 변화와 변신은 모든 신들의 공통된 속성이었다.

 

특히 천둥과 번개의 신 제우스는 변신의 귀재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인이 나타날 때 마다, 가정을 지키려는 아내 헤라의 눈을 피해 무수한 물상으로 변해 여자에게 접근한다. 흰 수소가 되어 에우로페를 유혹하고, 백조와 되어 네메시스와 교합한다. 그런가 하면 황금 소낙비가 되어 아름다운 다나에와 한 몸이 된다. 그러니 변화는 신의 중요한 본질일 뿐 딱히 변화의 신으로 지목되는 신은 없다.

 

 

그러나 굳이 하나를 들어 보라면 나는 네메시스 Nemesis를 변화의 여신으로 지목하고 싶다. 네메시스는 밤의 여신 닉스의 딸 중 하나다. 그녀는 제우스의 눈길을 끌었으나 그의 사랑을 거부하고 도망간다. 왜? 플레이 보이니까. 도망가면서 가지가지의 동물로 변신하다가 마지막에 거위로 변신하게 되는데, 여기서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를 피하지 못하고 교합했다. 네메시스는 알을 하나 낳았는데 목동이 이 알을 레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알에서 인간의 여인 중 가장 아름다운 헬레나가 태어났다. 그래서 종종 헬레나는 레다의 딸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그 후 네메시스는 '신의 보복' 을 의인화 한 여신이 되었다.

 

Nemesis_Louvre.jpg

 

(네메시스, 루브르 박물관)

 

그러나 그녀는 복수의 여신들인 에리니에스와는 구별된다. 에리니에스가 인간의 범죄를 추궁하여 복수하는 것을 뜻하지만, 네메시스는 '신들의 의분(義憤)'를 뜻한다. 즉 인간의 지나친 행복이나 왕들의 교만, 부자의 오만을 벌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선에서나 악에서나 모든 과도함에 대한 신의 보복을 뜻한다. 네메시스가 신의 보복을 내리는 방식은 과도함을 부추겨 결국 그 과도함으로 멸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령 자신의 부와 권력에 취해있던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네메시스의 부추김을 받아 키로스를 치러 갔다가 파멸하여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오만을 부추겨 추락하게 만든다. 사모스의 군주 폴리크라테스는 싸우기만 하면 이기는 전사였다. 어느 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승리들이 인간에게 과분한 홍복이라고 여겨 불안해 졌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반지를 바다에 던져 네메시스에게 제물로 바쳤다. 며칠 후 어부가 물고기 뱃속에서 찾았다면 그 반지를 왕에게 돌려주었다. 그 반지를 받아든 폴리크라테스는 '네메시스가 나의 제물을 흠향하지 않았으니 나는 이제 끝났구나'라며 탄식했다. 얼마 후 반란이 일어나 폴리크라테스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폴리크리테라는 이름의 여인이 있었다. 이름이 비슷한 걸 보면 아마 이 이야기는 폴리크라테스 이야기의 또 다른 변종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낙소스 섬의 이 여인은 매우 아름다웠다. 어느 날 낙소스에 적군이 쳐들어 왔는데, 그 대장이 폴리크리테를 포로로 잡게 되었다. 적장은 폴리크리테를 사랑하여 그녀의 말을 잘 들었다. 폴리크리테는 적장을 유혹하여 중요한 군사 정보를 빼내어 낙소스 군의 대장에게 알려 주었다. 낙소스군은 그 정보를 역이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낙소스인들은 공이 큰 폴리크리테에게 큰 명예를 주고 그녀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던 폴리크리테는 너무도 많은 선물을 받고 너무도 많은 명예의 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집으로 가기도 전에 숨이 막혀 문간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과도함을 벌하는 네메시스의 보복을 받은 것이다.

 

우주는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은 세상의 질서를 깨고 우주의 균형을 전복시키는 행위들을 징벌하는 것이다. 과도함과 오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네메시스는 그 과도함을 그만두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도함을 더 부추겨 자폭하게 만든다.   그러니 네메시스가 부측일 때 마다 과도함을 경계해야한다.  과도함을 버려야라는데,   버림의 방식이 바로 변화다.   변화란 한 상태에서 극점에 이르는 것을 경계하여  얼른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빠른 사회는 패스트 푸드를 만들어 낸다.   패스트푸드는 급속하게 먹거리와 먹는 방식을 바꾸어 나간다. 그러나 패스트 리빙이 과도해지면 건강은 파괴된다. 그러면 카운터 트랜드로 슬로 푸드에 대한 요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네메시스가 개입하여 보복하자,    현명한 사회는 그 경종을 받아들여 자정의 과정을 밟게된다.     변화란 우주가 과도함을 전이 시키는 과정이다.

 

이제 개인의 변화와 변신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때로는 예언자처럼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한 자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족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하게 된다 "

- 샨카라챠리아 Shankaracharya, 죠셉 캠벨의 '천의 영웅'에서 재인용

 

세상은 종종 무대로 비유되고, 삶은 종종 내가 맡은 배역으로 상징된다. 무대는 늘 그 세팅을 바꾸고, 나는 여러 개의 배역을 맡게 된다. 위에서 인용한 여러 개의 얼굴들이 다 내가 맡은 적이 있는 배역들이다. 우리는 늘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다. 동시에 다양한 우리는 우리 속에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의 현현이기도 하다.

 

자기를 잘 경영한다는 것은 부단한 자기 변화를 다룬다는 의미다. 시간 속에서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연은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이다. 자기를 잘 경영한다는 것은 하나의 나에서 여러 개의 나로 변용되어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동시에 여러 개의 배역에서 물러나 하나의 나로 귀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여러 개의 모습들과 '자기화해'(self-atonement)에 이르러 위대한 '하나 됨 at-one-ment' 으로 응집하는 것이다.

 

변화는 그러므로 끊임없이 두 개의 세계를 넘나든다. 늘 변하는 세계와 불변의 질서 사이를 말이다. 변화에 성공한 사람은 어제의 나를 십자가에 매달 수 있으며, 미래의 나와 화해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어제의 영웅은 내일의 폭군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 중 '제 4편 문명의 쇠퇴' 에서 이렇게 말한다.

 

" 한 대목에서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또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전에 성공한 일 자체가 커다란 핸디캡이 되기 때문이다.......이들은 이전에 창조성을 발휘했다는 이유로 지금의 사회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긴한 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위에 있으면서도 사회를 전진시키는 일에 쓸모가 없다. '노 젓는 손'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

 

토인비는 인간의 역사는 끝없는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라고 이해했다.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현재에 대하여 손을 놓고 있는 이유는 과거에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심취하는 정신은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란 창조자가 아니라 피창조자에 대한 숭배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인비는 이것을 창조성의 네메시스,   즉 창조성의 보복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성공에 대한 맹목적 숭배는 '휴브리스 아티', 즉 '오만은 파멸의 근원'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훌륭하게 자신을 경영한다는 것은 과거를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정지시킨 상태에서 과거의 제도나 기술 혹은 과거의 경험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과거를 우상화한 것이다. 생명을 잃은 것이다.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표현대로 자기 경영이란 '우리를 죽게 하는 자아를 발판으로 보다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것' 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창조적 소수들이다. 노 젓는 손을 쉬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끊임없이 사회를 전진시키는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

 

성공에 머물지 마라. 네메시스의 보복이 있을지니, 끊임없이 얻은 것을 내 놓고, 정점의 자리에서 변경으로 옮겨가라.

IP *.128.229.91

프로필 이미지
2015.11.01 18:23:13 *.212.217.154

성공에 머물지 말것

끊임없이 변화할것.

Stay hungry, Stay foolish. 


변화란, 생명의 본질.

변화하지 않는다는것은 본질을 거스르는 일.


프로필 이미지
2017.09.10 14:57:35 *.212.217.154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 삶에서 네메시스의 보복을 이겨낼 힘을 가질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