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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0일 17시 55분 등록
매너리즘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시작하는 법, 삼성물산 에세이, 2005. 3월

공허하고 무의미한 삶이 날마다 똑 같은 옷을 입고 우리를 찾아 올 때가 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이유의 근저에 ‘죽음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죽음의 연구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쿠불러 로스라는 사람이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살기에 꼭 해야 할 일도 아주 쉽게 뒤로 미룬다. 내일을 준비하고 어제의 기억에 갇혀 우리는 늘 오늘을 잃어버리고 만다”

매너리즘이란 어제가 오늘을 점령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이 어제와 같아지는 것이다. 똑같은 태양, 똑 같은 사람, 똑 같은 생각, 똑 같은 행동, 똑같은 삶, 이것이 매너리즘이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적 질병이다. 어제를 죽이지 못함으로 오늘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정신적 착란이 바로 매너리즘이다. 원인이 있으면 처방도 있게 마련이다. 나 역시 종종 이 질병에 걸리는데 그 때 마다 쓰는 처방이 있다. 잘 듣는다.

첫 번째 처방은 어제와 오늘 사이에 커다란 공백을 부여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어제가 오늘로 자연스럽게 이월되어 넘어와 오늘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종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나는 이 장치를 자궁이라 부른다. 대략 두 달에 한 번 정도 나는 이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3박 4일 동안 단식한다. 물론 술도 먹지 않는다. 포도와 물만 먹는다. 통상 나를 포함하여 10 명 정도의 참가자들이 이 프로그램에 함께 합류한다. 사람이란 이상해서 여럿이 같이 하면 재미있다. 그들은 꿈을 찾고, 나는 찾은 꿈이 발육부진이 되지 않도록 곁가지를 치고 물을 준다. 종종 이렇게 불필요한 삶의 관성을 끊어주는 상징적인 의식을 통해 우리는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 날 수 있다.

이 처방이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소 부드러운 방식을 찾아 쓸 수 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해가 바뀌거나 계절이 바뀌어 옷을 바꾸어 입을 때, 돌연 자신의 어제와 작별을 하는 것이다. 보신각종이 울려 퍼질 때를 활용해도 좋고, 떡국을 먹을 때도 좋다. 아니면 외투를 벗고 짦은 치마와 스타킹를 입게 될 때도 좋다. 어느 날 개나리가 확 핀 날도 좋고, 동네 어귀에 서 있는 그 목련나무가 첫 번째 꽃을 터뜨릴 때도 좋다. 언제고 자신의 가슴에 ‘필’이 꽂히는 순간 그때 어제를 엎고, 아주 특별한 하루를 심어두는 것이다. 자신에게 다시 살아 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루를 어떤 형식으로든 기록하는 것이다. 나는 좀 구식이라 일기를 쓴다. 기록하다 보면 하루가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다. 쓰다 보면 무심코 지나간 하루가 가슴에 느껴지기 시작한다. 지루함도 있고 반성도 있고 후회도 있고 특별함도 있다. 쓰다 보면 하루하루가 매우 특별한 얼굴을 하고 있어 하루의 얼굴들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루의 얼굴을 찾아 주는 것, 그리고 그 하루는 정리하여 역사 속으로 밀어 넣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날에는 새로운 일이 기다리도록 만들어 주는 것, 나는 이것을 ‘하루경영’이라 부른다.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기록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매일 쓰기 어려우면 횟수를 줄여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월요일과 목요일에 써도 좋다. 또 책 읽기를 좋아하여 하루에 한 시간씩 책을 읽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그 날 읽은 수 십 페이지에 대한 기록을 남겨도 좋다. 좋은 글귀나 핵심적인 내용을 1페이지 쯤 요약하고 그 옆에 자신의 견해를 적어두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일에 대한 전문성을 익혀가는 과정이라면 ‘혁신 레포트’를 쓰는 것도 좋다. 일상 속에서 의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오늘 하루는 어제 쓰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 하나를 찾아 내 현장에서 실험해 보고 그 결과를 모니터하여 기록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의 일하는 방식을 관찰하여 인상 깊은 부분을 적어두거나, 새로운 시도의 결과와 피이드백등을 메모해 두었다 정리하는 방식이 유용하다.

지식을 만들어 내는 것과 함께 지식의 유통 역시 중요하다. 카페나 불로그를 만들어 가까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 매우 좋다. 혼자 시작한 일은 쉽게 그만 두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초대되어 개입된 일들은 쉽게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 긍정적인 자긍심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록하면 자신의 것이 된다. 기록하면 연구가 되고 책이 되고 지적 재산이 된다. 기록 없는 지적유산은 없다.

세번 째 방법은 짐을 다시 싸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다시 짐싸기’ 라고 부른다. 나는 이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서 배웠다. 보통 우리의 일생은 한 20년 배우고, 한 40년 일하고, 그 나머지는 여생으로 은퇴한 생활을 한다. 30대와 40대에는 따라서 일에 치여 살게 마련이다. 이 때 이 지루한 반복과 관성을 조절하여 창조적이고 다이나믹한 생명력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은퇴의 시간을 한 번에 말년으로 몰지 말고, 여러 번으로 나누어 써 보는 방식이다.

부서를 옮기거나, 직급이 바뀌거나, 하는 일이 달라 진지 오래 되어 내성이 붙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될 때는 가능한 오래 동안 휴가를 내고, 은퇴한 사람처럼 특별한 여행을 하는 것이 좋다. 1주도 좋고 2주도 좋다. 사정이 허락하여 더 오래면 더 좋다. 은퇴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이다. 특별한 장소를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몽골이나 티벳, 아프리카 같이 지금의 삶과 전혀 다른 또 다른 삶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가게 되면 정신은 신선한 충격들로 충만하게 된다. 해외만 좋은 것은 아니다. 절에서 며칠 쉴 수도 있고, 배낭 매고 산 속을 헤맬 수도 있다. 우리는 이때 쉴 수 있고, 느려질 수 있고, 감탄하게 된다.

삶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이를 즐겨야’ 한다. 어제를 보낼 수 있어야 하고,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을 준비해야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과거의 검증된 방식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인생의 대부분을 쓰는 것은 커다란 실수다. 더욱이 어제의 방식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시대에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정신적인 낙후는 매일 조금씩 새로워 지기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타성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하루하루가 고만고만하고, 미래의 삶 역시 아무 것도 약속하지 못할 때, 그리하여 인생이 그저 그렇고 답답할 때, 어제를 떠나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어느 방법이 더 좋은 것은 없다. 그저 자신에게 맞고, 한 번 써 먹을 만 것을 체화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삼으면 된다. 오늘은 어제로부터 자유로운 또 다른 세상이다. 매너리즘이라는 어제의 두꺼운 커튼을 걷어내면 오늘이라는 햇살이 무찔러 들어온다. 이 감탄이 바로 오늘의 찬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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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곤
2005.03.23 10:33:43 *.248.117.4
이 처방전은 약값을 내지 않아 좋지만 지속적으로 투약해야 하네요. 사실 이런 주제로 글을 한번 쓰고 싶었는데.. 구본형 소장님의 내공앞에 바로 무릎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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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2005.04.12 21:31:41 *.235.30.16
저도 이번 주말에 특별한 의식을 함 해볼까합니다. 그리고 마흔이 되기까지는 나에게 계속 투자하렵니다. 갈등하고 있던것을 확실히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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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욱
2005.08.07 23:33:19 *.73.192.229
구본형 소장님의 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한편의 글, 당신의 미래를 바꾼다'는 말이 있는데
구 소장님을 두고 한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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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8 11:56:46 *.212.217.154

내일을 바꾸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추천해주고싶은 글입니다.

살짝은 나태해 진 나 스스로에게도 좋은 글이구요^^

다시 돌아보고, 추스리며, 앞으로 나아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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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6 13:18:42 *.212.217.154

'메너리즘'이라는 단어에 멈추어 글을 읽었습니다.

지금 스스로가 메너리즘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무언가 앞으로 나아가는 내 자신을 질척이는 뻘밭속을 걷고있듯, 질척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결국은 모두 마음의 문제이겠지요.

스스로의 걸음으로 그 질척임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오늘도 한걸음 내딛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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