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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3일 09시 49분 등록
날마다 두려움 속을 걸었던 그때 그곳들,

'떠남과 만남' 2008년 개정판 서문


8년 전 회사를 나왔을 때 나는 여전히 월급쟁이였다. 평일 낮에 거리를 어슬렁거리면 알 수 없는 곳에서 화살이 날아드는 듯 불안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보려 했지만 나는 여전히 품삯에 길들여진 직장인이었다. 내 정신은 야성을 잃어버렸었다. 우리를 나왔지만 홀로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 짐승 같았다. 내 속에 숨어있는 자유로운 영혼을 끄집어내는 나만의 의식이 절박했다.

2달 동안 여행하기로 했다. 직장을 나오는 시점에 맞추어 출간된 세 번 째 책, ‘월드클래스를 향하여’ 에 관련된 인터뷰와 행사에 여러 날을 보내고 나니 두 달 예정한 여행은 한 달 반 정도 밖에는 남지 않았다. 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 별 계획이 없었다. 발길 닫는 대로, 지명이 나를 유혹하는 대로, 문득 머리 속의 한 기억을 찾아서, 내 마음대로 떠돌았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매일 25 킬로 이상을 걸었다. 걷는 것과 바람을 만나는 것 그것이 다였다. 종종 바람 속에서 그곳을 스쳐간 크고 작은 사람들의 자취를 냄새 맡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한 조각을 찾아보는 것이 이 여행의 목적이라면 목적이었다. 그저 이리처럼 떠 돌 수 있는 지를 시험했다. 턱 수염이 산적처럼 길어졌을 때, 여행에서 돌아 왔다. 그 후부터는 대낮에 거리를 걸을 때 어딘가로 부터 나를 꿸 듯 날아들던 불안한 화살들은 사라졌다. 나는 비로소 낮술을 마실 수 있는 건달로 입문하게 되었다.

‘낮술’과 ‘건달’은 불량하지만 내게는 자유의 언어들이었다. 종종 퇴사한 친구나 지인들이 날 찾아와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지 초조하게 물어 오면 늘 그들에게 낮술을 즐기라고 말했다. 빈둥거리는 건달의 일상을 즐길 수 있는 시기는 지금 밖에 없으니 이 좋은 시기를 절대 쉽게 놓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2 주일을 버티지 못한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다시 얼른 월급쟁이의 초조로 복귀하곤 한다. 서둘러 작은 가게를 하나 열고 작은 사업을 하나 벌이더라도 월급쟁이의 마음으로 시작한다.

그때 나는 내게 외쳤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올 때는 새로운 마음으로 나와야 한다. 새로운 세상의 두려움을 미리 과장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읽어야 한다. 좀 배고프면 어떠냐. 평생에 한 번 찾은 이 일의 불알을 꽉 쥐고 놓지 않을 것이다. 주어진 천복이니 이 길이 내 길이다. 엎어지고 뒹굴어도 이 길 위에서 죽으리라. 때마다 주어진 밥이 사슬이지 않더냐. 굶주림을 두려워하면 들판의 이리가 되지 못한다. 이런 마음이 나를 지배할 때 까지 나는 매일 걸었다.

8년이 지난 다음 그때 다녔던 몇 군데를 며칠 씩 여러 번으로 나누어 되짚어 보았다. 홀로 헤매던 그 길들은 그 당시 내게는 나의 길을 묻는 순례였다. 날마다 잠 잘 곳을 옮겨 다녔고 비가 쏟아지더라도 길을 나섰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백반 한 상을 시켜 먹었다. 되돌아보니 그 때 봄바람이 그렇게 차고 매서울 수 없었다.

얼마 전 다산초당에 이르러 홀로 마루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기약 없는 유배생활을 하며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중년의 사내 모습이 너무도 깊이 마음속으로 기어들었다. 문득 책을 쓰고, 제자를 기르고, 차를 다리는 행위들이 외로움을 이기고 자신을 잊어버린 세상과 화해하기 위한 처절한 수련이라 생각하니 외롭지 않고서야 어찌 정순할 수 있으랴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먹으면 되는 데 날마다 너무 많이 퍼먹기 위해 너무도 많은 시간을 쓰고 있구나. 그러다 인생이 끝나고 마는구나. 아침 상념이 비안개처럼 퍼져들었다. 비는 내리고 숲은 여전히 어두운데 늦은 아침이라 배는 또 고파왔다. 그래 그래. 먼저 살지 않고서야 또 어떻게 쓸 수 있으랴. 결국 밥과 존재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사이에서 삶의 이야기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삶이란 흔들리는 것이고 균형을 잃었다가 이내 다시 그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되돌아오는 불안정한 체계인 것이다. 오직 죽은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 변화는 삶의 원칙이다.

고금도 충무사에서 만난 이순신은 여전히 슬프다. 그곳은 언제나 조용하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그때도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이번에도 없었다. 나는 이 공간을 좋아한다. 어쩌면 가장 이순신다운 공간인지 모른다. 아산 현충사의 이순신은 죽은 다음의 성웅 이순신이고, 이곳의 이순신은 살아 있을 때의 바로 그 이순신이다. 노량해전에서 장군은 죽었고, 주검은 이곳 고금도 충무사 정문 건너편 작은 동산에 잠시 가매장 되었었다. 그리고 아산으로 옮겨졌다. 이곳은 쓸쓸하지만 아름답고 알 수 없는 파토스로 가득한 곳이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곳이지만 비장하고 또한 장쾌한 곳이기도 하다. 한 남자가 여기 있었다. 자기의 길을 가야했던 한 남자가 바로 여기 잠시 머물렀었다.

되돌아보니 이 책 속의 그 장소들이 내 목줄이 풀려 이리저리 떠돌던 바로 그 곳들이었다. 마흔 여섯 살에 매일 아침 짐을 꾸려 여관 문을 나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날마다 두려움 속을 걸었던 그곳들이었다. 미래를 너무 두려워하지 않도록 미리 두려움 속을 걸어 두게 한 그 장소들이었다. 그렇게 매일 걷지 않았더라면 다리가 꺾여 이미 주저앉았을 지도 모른다. 그 공간 속에서 비범하게 살았던 그 인물들의 외로운 숨결을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처럼 살지 못했을 것이다. 영광 있으라, 외로움들이여.
IP *.128.2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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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호
2008.03.13 11:26:11 *.251.96.174
선생님의 책을 자주 읽고 있어요. 읽었던 부분을 다시금 읽곤 하지요. 닮고 싶어서 그랬을 거에요. '날마다 두려움 속을 걸을 때' 저는 선생님의 책을 읽습니다. 가끔 도시를 떠날 때, 늘 이 책을 읽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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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2008.03.13 20:42:54 *.239.203.148
저번 설날때 kbs라디오에처음알게됬는데, 구본형씨글읽고 많이도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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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정명윤
2008.03.17 10:02:53 *.199.250.119
이곳 제주에는 아름다운 오름이 많습니다. 어제는 사람들이랑 원 없이 많이 걸었습니다. 봄맞으러 간 나그네 마냥 헉~헉~ 거리며 오름 능선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리고 오름등반을 마치고 나니 허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변 마을 한적한 식당을 찾아 흙돼지 삼겹살에 낮술을 걸쳤습니다. 첫잔을 빈속에 털어 넣으니 제대로 필이 꽂이 더군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흥얼 흥얼 흥겨운 하루였습니다. 아침에 이글을 읽으니 어제가 생각나는군요..., 기회가 되면 소장님 얼굴을 보는게 소원인데...,그리고 이곳 제주에서 아름다운 오름등반을 끝내고 제주의 "똥" 도새기(돼지) 삼겹살에 쇠주한잔 소장님과 낮술을 하고 싶네요..., 그런 영광이 내겐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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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2008.03.18 09:45:23 *.40.143.26
'언젠가 나도 그렇게 떠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짧은 여행에 함께 하기도 했던 책입니다. 봄날, 이 무렵 선생님의 여행이 생각나서였을까요? 출근 후, 문득 선생님의 글이 읽고 싶어, 몇 편의 칼럼을 읽다가, 이 글에서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몇 편의 칼럼에서 '시간'과 '세월'에 대한 상념에 잠길 뻔 하였지만, 이곳은 회사라는 자각에 그렇게 놓아두지 못합니다. 저도 만남이 그리울 때, 떠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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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
2008.03.18 11:07:19 *.248.237.31
"엎어지고 뒹굴어도 이 길 위에서 죽으리라. 때마다 주어진 밥이 사슬이지 않더냐. 굶주림을 두려워하면 들판의 이리가 되지 못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땐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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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3 19:39:27 *.212.217.154

영광 있으라, 외로움들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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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3 11:15:20 *.212.217.154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만약 선생님의 글을 만나지 못했다면,

미지의 길을 여행하는 이 길에서

이미 다리가 꺾여 쓰러지지 않았을까?

제게는 선생님의 글과 책이

그러한 장소였나 봅니다.


늘 그곳에 서 있는 곧은 나무처럼

그렇게 저를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의 날이 조금은 지났지만,

늦게나마 마음을 전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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