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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9일 10시 24분 등록

여기 시가 하나있다. 이 시의 제목은 '내 고추'다.

 

변소에 가서

오줌을 누려고 하는데

해바라기가

내 고추를 보려고 한다

나는 안 보여줬다

 

어느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의 시다. 열 살짜리의 시인데, 귀엽다. 그러나 원래의 시는 다르다. 원작은 이렇다.

 

변소에 가서

오줌을 눌라고 하는데

해바라기가

내 자지를 볼라고 한다

나는 안 보여줬다

 

제목도 '내 고추'가 아니고 '내 자지'다. 사투리도 표준말로 고쳤다. 학교 선생은 다른 학생들에게 원작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불편해서 교육적 차원에서 젊잖게 고쳐두었다고 한다. 강제 개작을 통해 이 시의 어린 작가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 날 수 없게 되었다. 표준화 되었고, 무난해졌다. 그러나 교육이라는 거름망을 지나오는 동안 '열 살짜리 남자 아이'라는 본질을 잃고 말았다. 생명을 잃었고, 진실을 잃었고, 시(詩)를 잃었다. 해바라기가 보려고 하여 숨긴 것은 내 고추가 아니라 내 자지인 것이다. 고추라면 숨길 필요도 없다. 오직 자지이기 때문에 숨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프레데릭 와츠.jpg

 

신화는 문명의 고치지 않은 원판이며 야생의 사유다. 모든 어른 속에 아이가 들어 있듯이, 인류는 그 사유 속에 원시를 품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문명은 원시로부터 시작되었다. 원시를 품지 않은 문명은 죽은 것이다. 야생의 사유가 없는 문명은 아스팔트며, 가면이며, 생명이 다했거나 애초에 생명이 없이 만들어진 조화(造花)에 불과하다.

 

신화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오래된 원시의 철학이다. 그때 그들은 이 사유의 틀로 사람을 이해했고 자연을 이해했고 우주를 이해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미신이라고 불렀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야만이라고 모멸했다. 그러나 신화는 이야기 속에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는 진리의 상징이다. 그것을 풀어내면 옷 속에 감춰진 인류의 은밀함에 접근해 갈 수 있다.

 

IP *.128.229.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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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9 10:52:11 *.97.7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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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9 22:10:04 *.168.97.226

신화는 가장 오래된 원시의 철학!

느낌 있습니다.


요즘 공부가 재미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내가 재미있어서 하는 공부를 즐깁니다.


원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상상하는 것이 

제법, 저의 뇌를 흥분시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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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0 01:40:49 *.122.237.16

ㅋㅋㅋ 사부님, 통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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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7 13:07:04 *.37.14.12

자지란 생생한 표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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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8 06:55:30 *.180.231.209

해바라기는 그곳에 그냥 피어 있을을 뿐인데, 시속에 생생한 조연이 되었습니다. 멋진 해바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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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31 13:34:49 *.200.147.129

"야생의 사유가 없는 문명은 ~ 조화에 불과하다" 이 구절 좋으네요. ^^

 

"야생의 사유가 없는 삶은 ~ 가짜 삶에 불과하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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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5 11:16:08 *.139.108.199

자지를 자지라 부를수 없다니!

아무튼 유쾌통쾌한 글이에요^^


인류가 아무리 문명화 하더라도,

동물적 본성은 숨길 수 없겠지요,


그 본성과 문명을 조화롭게 어울리는 기술이 삶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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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1:25:54 *.212.217.154

자지를 자지라 부를수 없고,

보지를 보지라 부를수 없는 슬픔!


그것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비 문명에서 문명으로

'성장' 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화 이겠지요.


내 안에 숨겨진 어린아이의 그 순수함, 원시의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

그 에너지를 잘 되살릴 때

그 힘은 우리를 본래의 자신으로 되 돌아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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