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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25일 15시 51분 등록
월간 '작은 이야기'(1999. 8)-느림과 기다림에 대하여
비온 다음 날 아침은 상쾌하다. 청량한 공기 속에 흙 냄새가 느껴진다. 촉촉한 차가움 속에 아침이 깨어나듯 나도 나로 깨어난다.

여의도 샛강은 이제 내가 어려서부터 자라오며 보아 온 친근한 강어귀의
풍경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갈대가 키를 넘기고, 그리운 야생풀과 꽃들로
가득 차 가기 시작한다. 막 비가 갠 아침 길을 걸으며, 흙 길 위를 가로지르
는 참으로 많은 지렁이들을 보았다. 땅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쭈
구리고 앉아 그것들이 움직여 가는 것을 보았다. 먼저 머리가 뾰쭉해 지면서
힘차게 앞으로 뻗는다. 그리고 이내 몸의 배 위쪽 부분에 해당되는 반쪽이 앞
으로 당겨져 오고 꼬리 부분이 따라 온다. 머리도 움직이고 꼬리도 동시에 움직
이는 법은 없다. 먼저 머리가 움직이고 몸이 따라온 후 꼬리가 멈추어 서야 다
시 머리가 뻗어져 나온다. 꼬리는 몸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몸은 머리가 움직
이기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없이 지렁이는 움직일 수 없다. 기다려야만 움직
일 수 있다는 것은 오래도록 우리가 잊고 있어온 원칙 중의 하나이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 밖에 있고, 늘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나 있
다. 인류의 위대한 발견과 발명은 자연에서 기인하지 않은 것이 없다. 노자(老
子)는 자연이 곧 도(道)는 아니지만 가장 도에 가깝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인간은 쉰다는 것을 잊은 것 같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한다. 오직 움직일 뿐
이고 더 빨리 움직이려한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더 힘껏 달려 가고 있지만
누구도 그곳이 어디인지 걱정하지 않는다. 오직 걱정이 있다면 그 대열에 합
류되어 못할 때 뿐이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모든 것을 놓치고 만다.

젊었을 때 우리는 풍족해 지려고 젊음을 바친다. 늙어서는 다시 젊어지기 위
해 벌은 것을 소모하며 산다. 기다림을 상실한 어리석은 분주함이다. 기다
림은 무엇을 놓쳐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 기대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기다림 없이 우리는 누구를 사랑
할 수 있는가? 자유로운 시간과 휴식 없이 우리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 새로운 생각은 게으름과 휴식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막 문이
닫히고 내려가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를 놓치게 된 것을 원통해 하지 말라. 또
는 뛰어가 막 떠나려는 버스에 올라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말라. 그대
가 시간을 잊어 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오히려 그대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게 될
때가 있음을 기억하라. 대합실은 놓친 기차를 기다리는 곳만이 아니다. 앞
으로 오게될 기차를 기다리는 곳이다.

오늘 아침 지렁이의 움직임을 보며, 소설가 이탈로 스베보(Italo Svevo)의 말
을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루에 두 세시간 정도는 편안한 소파에서
지낼 권리가 있다...그리고 몸에 해롭지 않은 소주 한병을 깔 권리가 있다."
좋은 친구와 함께 한 술자리처럼 편안하고 즐거운 말이다
IP *.208.140.138

프로필 이미지
2015.09.30 16:34:18 *.212.217.154

창조란것은

어쩌면 기다림과 여유가 익어서

나온말이 아닐까 합니다.


삶의 작은 쉼터에서 

쉬었다 갑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8.07.02 13:24:12 *.149.18.206

여유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창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모두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수천억 자산가가 하루하루 쫒기듯 바쁜 삶을 살기도 하고,

하루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그날의 고요한 노을을 여유로이 즐기기도 한다.

모두 스스로에게 달린 것이다.


바쁘게 달려가는 순간

잠시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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